[SOH] (전편에 이어)
3) 배움을 구하고 도를 깨닫는 이치
도가(道家) 이론에 따르면 사람이 세간(世間)에 오는 것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며 반본귀진(返本歸真)하기 위한 것으로 ‘무극(無極)으로 되돌아가기 위함’(《도덕경》제28장)이다.
여기서는 어떻게 배움을 구하고 도를 깨달을 것인지 한자 속에서 답을 찾아보자.
(1) ‘지(智)’자의 구조는 ‘知+日’로 기본적인 뜻은 모르는 것이 없고 무엇이든 다 안다는 것이다. 이 글자의 구조로부터 말하자면 ‘日知’란 지혜(智)를 가리키며 그 함의는 바로 날마다 지식의 수확이 있고 도리를 알아서 꾸준히 나태해지지 않으면 반드시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 ‘혜(慧)’의 함의는 총명하고 재지(才智)가 있다는 것이다. 이 글자는 형성문자이자 회의문자로 그 구조는 ‘彗+心’이다. 여기서 혜(彗)는 빗자루로 쓰레기나 먼지를 쓸어버리는 것이고 심(心)은 바로 사람마음(人心)이니 각종 욕망과 집착을 널리 지칭한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지혜가 없다면 자신의 마음에 때가 너무 많아 가려졌기 때문이니 수시로 깨끗이 청소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글자의 구조에서부터 말하자면 사람의 지혜는 끊임없이 자신의 각종 사람마음을 청소하고 그것들이 증가하거나 강화하지 못하게 하는 데서 온다.
노자는 “학문을 하면 날로 늘어나고 도를 닦으면 날로 줄어든다(為學日益,為道日損)”고 했다. 도를 구하는 사람이 마땅히 버려야 할 것은 바로 자신의 각종 사람 마음이다. 이렇게 해야만 비로소 진정한 지혜가 생겨나올 수 있다.
혜(慧)는 또 회(會)와 발음이 같으니 지혜가 있어야지만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3) 학(学)이란 글자는 정체(正體)로는 학(學) 또는 斆이라고 쓴다. 윗부분 중간에 있는 효(爻)는 본래 주역에서 괘효(卦爻)나 괘 그림을 가리킨다. 고인들은 이를 또 효(效 본받다)로도 해석했으니 바로 본받아 모방한다는 뜻에서 도(道)・문장(文章)・도리(道理)로 확장되었다.
또 윗부분 양옆에 있는 글자는 두 손으로 책을 받드는 모습이다. 아래에 있는 자(子)는 학습이란 모름지기 어려서부터 시작해야 함을 가리키며 또한 학습에는 젊어서 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또 자(子)와 그 우측에 있는 복(攵)를 더하면 자(孜 힘쓰다)가 되는데 의미는 열심히 근신하되 나태해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설문해자》에서는 학자를 “깨달음(覺悟)이다”라고 해석했다. 다시 말해 학습이란 깨달음의 상징이자 보장이니 깨달음을 얻으려면 반드시 진지하게 학습하고 근면하게 노력하며 해이해지지 말아야 한다.
(4) ‘전(典)’자의 함의는 표준과 법칙으로 또한 표준과 법칙의 책을 가리킬 수도 있다. 고대 중국어에서는 오제(五帝)의 책과 성현(聖賢)각자(覺者)의 가르침을 가리켜 전(典)이라 했다.
《이아(爾雅)·석언(釋言)》에서는 이를 경(經)이라 풀이했다. 《설문해자》에서는 “전(典)은 책(冊)과 기(丌)를 따른다”고 했다. 여기서 책이란 서적을 가리키고 기란 원래 물건을 받치는 받침대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책장이나 책 상자로 확장되었다. 글자형태에서 서적을 애호하고 신중하게 대함을 표시한다.
또 전(典)은 전(巔 산꼭대기)과 발음이 같은데 최고표준과 가르침을 의미하니 바로 경전(經典)이다. 사람이 되거나 도를 닦거나 모두 마땅히 최고표준으로 자신을 요구해야 하며 이렇게 해야만 성현각자의 가르침과 고심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게 된다.
(5) ‘정(定)’자의 구조는 ‘宀+正’으로 기본적인 의미는 편안하고 조용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면(宀)은 고대 중국에서 독립적인 글자로 쓰였으며 의미는 덮개가 있는 거처로 여기서 집이나 실(室)이란 뜻이 나왔다. 아랫부분은 바로 정(正)의 변체다. 그렇다면 무엇이 정(正)인가, 하나는 심태(心態)를 단정히 하는 것이고 둘째는 몸가짐(身態)을 단정히 하는 것이다.
더 세부적으로 말하자면 正은 ‘止’+‘一’인데 여기서 지(止)는 이르다 도달한다는 뜻이고 일(一)은 도(道)이니 즉 도에 도달하는 것이 정(正)이다. 그러므로 이 글자의 구조에서부터 말하자면 실내에 거처하며 안정된 후 자신의 심태를 도(道)와 합일하는 것이 바로 정(定)이다.
도(道)와 합일했기 때문에 이때 비로소 도를 알고 도를 얻은 상태가 된다. 때문에 고인이 정(定)이 혜(慧)를 낳을 수 있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6) ‘필(笔)’의 정체는 ‘필(筆)’이고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도구 내지는 글로 쓰거나 기록한 것을 가리킨다. 글자의 구조에서부터 보자면 필(筆)은 죽(竹)+율(聿)이다. 여기서 율(聿)은 필의 본래 글자다. 소전(小篆)의 자형을 보면 손으로 붓을 쥐고 있는 모습이다. 중국 고대에 붓대는 모두 대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죽(竹)을 따른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필(筆)은 3부분으로 구성되는데 바로 竹+𦘒+一이다. 여기서 죽(竹)은 재료를 가리키고 엽(𦘒)은 손재주를 가리키는데 손재주가 있어야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일(一)은 바로 도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붓으로 글자를 쓰거나 문장을 쓰는 것은 도를 체현하는 것으로 글자를 쓰고 문장을 쓰는 원칙이 바로 도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간체자인 필(笔)로 쓰는데 이는 竹+毛로 구성되는데, 이는 단순히 붓이란 글자의 구조를 설명하는 외에도 또 하나의 내함이 있으니 바로 현대 대륙인들의 문장은 대부분 다 모택동(毛) 사상의 틀 안에서 쓴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학교 교과서를 포함해서 자연과학은 물론이고 사회과학도 모두 모택동 사상의 틀 안에 있으며 근본적으로 도가 있고 없고를 고려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미 정도(正道)에서 벗어난 것이다.
(7) ‘사(史)’는 《설문해자》에서 “일을 기록하는 사람이다. 오른손으로 중을 잡는다(記事者也,從又、持中,中,正也)”고 했다. 여기서 우(又)는 손이란 뜻이고 중(中)은 정(正)을 말한다. 사는 실(實), 사(事), 시(是)는 모두 발음이 같다.
다시 말해 역사는 사람이 쓰는 것으로 중요한 사건을 기록하는 것이다. 하지만 객관적이고 중정한 입장을 유지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해야지 사심(私心)이나 특정한 개인 또는 집단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써서는 안 된다. 하지만 오늘날 중국의 교과서는 이런 요구에 거의 부합하지 않는다.
(8) ‘의(意)’자의 구조는 음(音)과 심(心)의 결합으로 다시 말해 心音(마음의 소리)으로 사람의 심정을 가리킨다. 동시에 이 글자는 또 立, 日, 心 세 글자의 조합으로도 볼 수 있는데, 입(立)은 우뚝 선다는 뜻이고 일(日)은 정대광명(正大光明)함을 표시하며 심(心)은 내심의 생각을 가리킨다.
영화에서 등장인물의 내심을 표현할 때 때때로 화면 이외에 소리의 방식으로 표현하는데 사실 우리 사람의 일사일념(一思一念)과 모든 생각은 단순히 유형(有形)유상(有像)일뿐만 아니라 또 성음(聲音)이 존재한다.
당신이 그런 염두에 대한 생각(想)이나 소리(響 想과 발음이 같다)를 끝내면 그럼 고급생명은 곧 보고 들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모든 사상염두는 몰래 감출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마땅히 마음이 바르고 내심(內心)이 광명해야 한다.
(9) ‘사(思)’는 현대 중국어에서 모두 알고 있는 뜻 외에도 고대에는 포용이란 함의가 있었다. 《상서·홍범(洪範)》에는 “사(思)는 포용이니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은 포함하지 않음이 없다(思曰容,言心之所慮,無不包也)”라고 했다.
한자의 조자(造字) 원칙에서 보자면 사(思)는 회의문자이자 형성문자다. 심(心)을 따르고 신(囟)을 따른다. 여기서 신(囟)이란 뇌를 가리킨다. 고인은 심과 뇌가 합작해서 사상을 낳는다고 보았다. 본래 뜻은 사고, 생각, 고려다.
보다 높은 각도에서 보자면 사(思)는 사(私)와 발음이 같다. 한자에는 동음동원(同音同源)이란 특징이 있어서 발음이 같은 글자는 서로 뜻을 확장 대체하거나 또는 해석하거나 부각시킬 수 있다. 때문에 소위 사상(思想)이란 바로 사상(私想)이 되며 다시 말해 사적(私的)인 것을 생각하는 것으로 성인이나 각자를 제외하면 인류사회 속의 그런 사상가(思想家)들은 대부분 사상가(私想家)로 그다지 가치 있는 인식이 없다.
(10) ‘상(想)’은 현대 중국어에서 사색, 생각, 염두, 추측, 희망 등의 뜻을 지닌다. 심(心)+상(相)으로 구성되었고 심(心)을 따르고 상(相)을 따르는데, 상(相)이 발음이 되는 회의문자다.
여기서 심(心)이란 사람마음을 가리키고 상(相)에는 용모, 모양, 형상 등의 뜻이 있다. 이 글자의 구조에서 말하자면 마음의 모양이 바로 상(想)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모든 사상염두는 모두 형상이 있는 것으로 즉 모두 살아 있는 것으로 높은 경계(境界)에서 보자면 ‘무엇을 생각하는가’가 바로 ‘무엇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사람이 일단 마음을 움직이면 그쪽의 생명이 모두 볼 수 있고 이런 사상염두들은 모두 진정한 자신이 아니다. 이는 또 사람의 나쁜 사상이 아주 쉽사리 사마(邪魔)가 빈틈을 타서 사람을 조종해 잘못되거나 나쁜 일을 저지르게 할 수 있는 원인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도가(道家)에서는 청정무위(清淨無爲)를 말했다. 《역전(易傳)》에서도 “역(易)은 생각함이 없고, 함이 없는 것으로 적연(寂然)하여 움직이지 않다가 감응하면 천하의 모든 이치에 통한다.”라고 했다. 다시 말해 높은 층차의 지혜는 사람마음으로 상상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청정하게 입정(入定)에 든 후 마음을 써서 감응하고 감수할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상(想)은 향(響)과 발음이 같은데, 사람의 사상은 그 형상이 있는 것 외에도 동시에 또 소리가 존재한다. 가령 영화 속에 나오는 화면 외 음향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고인(古人)은 사람마음에서 일념이 생기면 천지가 모두 안다고 했다. 세간의 사람은 그 누구도 비밀이 없다.
(11) ‘오(悟)’의 구조는 ‘心+吾’다. 여기서 심(心)은 사람마음을 대표하고, 수도자에 대해 말하자면 심성(心性)문제를 가리킨다. 오(吾)란 바로 자신 나를 말한다. 본래 뜻은 분명히 알고 이해하며 각성한다는 뜻이다. 이 글자의 구조에서 말하자면 일에 부딪히며 우선 자신의 심성문제에서 찾는 것을 일러 오성(悟性)이 높다고 한다.
우리가 부딪히는 그 어떤 번거로움이나 그 어떤 문제든 본질상에서 말하자면 모두 자신의 사람마음의 문제이자 심성문제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때문에 곤경에서 벗어나려면 반드시 자신의 심성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달리 말해 경계(境界)는 마음에 따라 달라진다는 경수심전(境隨心轉)이 바로 이런 뜻이다.
(12) ‘수(守)’의 구조는 ‘宀+寸’으로 본래 뜻은 보살피고 지킨다는 뜻이다. 《설문해자》에서는 “수(守)란 관(官)을 지키는 것으로 면(宀)을 따르고 촌(寸)을 따르는데 면은 관부(官府)이고 촌은 법도이다.”라고 했다. 의미는 사람이라면 관방의 법도를 존중하고 따라야지 함부로 행동하지 말아야한다는 것이다. 수련자에 대해 말하자면 각자(覺者)・상사(上師)의 가르침이 바로 법도이니 언제 어느 곳에서든 늘 상사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바로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13) ‘덕(德)’이란 글자는 척(彳 chì)과 덕(㥁 dé)으로 구성되며 덕(㥁)이 소리가 된다. 척(彳)은 표정이나 행동과 관련이 있는데 여기서 파생되어 행동이나 일하는 것을 가리킨다. 덕(㥁)은 덕(悳)이나 덕(惪)으로도 쓰는데 구조를 보면 ‘十目一心’이 들어 있다. 여기서 ‘십목(十目)’이란 여러 사람을 가리키고 일심(一心)이란 모두 인정한다는 뜻이다.
즉 자신의 진심(眞心)과 선심(善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설문해자》에서는 덕이란 글자는 밖으로는 사람에게서 얻고 안으로는 자신에게 얻는다고 했다.
다시 말해 여러 사람들이 돌아가고자 바라는 곳이자 또 자기 본성의 품성이 요구하는 것이 바로 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덕(德)으로 사람을 복종시키고 덕과 명망이 높은 것을 중시한다. 동시에 덕(德)은 득(得)과 발음이 같은데 덕이 있어야 얻음이 있고 복분(福份)이 있으며 덕이 없으면 얻음이 없고 복분도 없다.
한 사람이 가진 복은 그가 가진 덕의 양과 비례한다. 때문에 고인들은 천하에 오직 덕이 있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다고 했다.
한편 고대 중국어에서 덕(德)이란 글자에는 또 올라간다(升)는 함의가 있는데 승은 바로 제고다. 왜냐하면 덕은 하늘의 도에 부합하기 때문에 덕이 큰 사람은 쉽게 자신의 경계를 제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련계에서는 이를 근기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다.
(14) ‘본(本)’이란 자의 함의는 원래 초목의 뿌리를 가리킨다. 《설문해자》에서는 “나무 아래를 본이라 한다”고 풀이했다. 즉 초목의 바닥이나 뿌리 부위가 본(本)이란 의미다. 또 처음 원래 근원이란 뜻이 있으로 木을 따르고 一을 따른다.
오행학설에서 목(木)은 주로 생(生)을 주관하므로 여기서 목(木)은 생명과 중생을 대표한다. 아울러 일(一)이란 글자에 담긴 뜻은 바로 도다. 《설문해자》에서는 “오직 처음 태시(太始)에 도(道)가 일(一)에서 서고 천지가 나뉘며 만물을 화생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본(本)이란 글자는 구조적으로 말해 생명의 근원이 바로 도(道)란 뜻이다.
도는 바로 만물과 중생의 본이다. 수도자에게 있어 만약 내심이 도에서 벗어나면 그것은 바로 본을 망각한 것이다. 사실 속세의 중생 역시 이와 같지 다르지 않다.
(15) ‘술(術)’자의 함의는 기능(技能), 기예(技藝), 방법(方法), 책략(策略) 등이다. 그 구조를 보면 彳+術+亍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이중 彳(척 chì)과 亍(촉 chù) 두 글자는 작은 걸음으로 걸어간다는 뜻이다. 왼쪽으로 걷는 것이 척이고 오른쪽으로 걸으면 촉이 되는데 둘을 합하면 행(行)이 된다. 즉 근면히 행하고 노력해서 연습한다는 뜻이 있고 또 아무런 지장 없이 순조롭게 간다는 뜻도 있다.
또 술(術)의 구조를 보자면 나무(木) 위에 점(點)이 하나 있는데 태극원리에서 목(木)은 바로 도를 가리키고 도의 가장 기본적인 표현이자 일점의 표현이 바로 술(術)이다. 그러므로 도술(道術) 또는 법술(法術)이란 바로 이런 뜻이다.
인류사회 속에서 다양한 업종에서 생존기능과 존재형식이 모두 술인데 가령 예술(藝術), 무술(武術), 수술(數術), 의술(醫術), 산술(算術), 방술(方術), 건축, 요리, 양식 및 각종 업무가 있다. 방법과 책략 등은 심술(心術)이 되고 손과 발을 움직이는 것은 기술(技術)이 된다. 심술이든 기술이든 모두 도(道)의 체현이며 그 표현형식은 사람의 생존기능이다.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반드시 필요하며 없어선 안 되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 또 사람에게 그 속에서 도를 깨닫고 도를 닦게 하려고 존재하는 것이다. 술(術)은 도(道)를 근본으로 하며 도(道)는 술(術)을 표현으로 한다.
도가 없으면 술이 없고 술이 없어도 도를 인식하기 어렵다. 도가 얼마나 높으면 술도 그만큼 높고 도는 깨달음에 근거해서 얻는 것으로 오성이 높지 않은 사람은 술 역시 정밀하지 못하다.
(16) ‘로(路)’의 구조는 ‘足+各’으로 본래 뜻은 도(道 길) 또는 도(途 도로)이다. 여기서 각(各)의 의미가 남다른데 자기와 피차가 서로 다르다는 뜻이다. 족(足)은 발이다. 그러므로 이 글자의 구조에서 말하자면 길은 각자의 발밑으로 모범이 없고 공식이 없다는 뜻이다.
기왕에 모두 걷는 길이 서로 다르다면 두 사람의 발걸음이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수도자에 대해 말하자면 생명의 내원이 서로 다르고 각자(各自)의 귀숙(歸宿)도 같지 않다. 그럼 아마도 각자(各自)의 표현 형식 역시 천차만별일 것이다. 하지만 바른 도리에 따라 걷기만 한다면 틀리게 걸어가지 않을 것이다.
(17) ‘사(寺)’의 구조는 ‘土+寸’인데 촌(寸)은 바로 분촌(分寸)이나 법도란 뜻이다. 고인은 촌(寸)이란 글자를 지킴(守)으로 이해했는데 법(法)을 지키는 것이 바로 촌(寸)이다.
사(寺)는 중국 고대에 관서(官署)의 명칭인데 가령 대리시(大理寺 최고법원), 광록시(光祿寺), 태상시(太常寺), 홍려시(鴻臚寺), 태복시(太僕寺) 등이 있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후로는 출가인이 수행하는 곳 역시 사(寺)라 불렀다.
관서든 아니면 사원이든 모두 우주의 법칙이 세간에서 체현된 것이기 때문에 신전문화(神傳文化)의 내함 중에서 관리가 되는 것 역시 수행이고 또한 이 부분의 사람이 수행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가령 역사적으로 충신양장(忠臣良將)은 모두 이와 같다.
만약 이 글자의 구조에서부터 말하자면 촌토(寸土)가 바로 사(寺)가 되는데 촌토란 또 촌심(寸心)이자 사람마음이다. 그렇다면 그 어떤 사람에 대해 말할지라도 오직 마음에 법도가 존재하기만 한다면 그의 몸이 어디에 있든 모두 사(寺) 안에 있는 것이고 모두 수행이다.
(18) ‘희(戲)’라는 글자는 희(戱)로도 적는데 즉 허(虛)+과(戈)다. 무대 위에 설치된 모든 것은 도구가 되고 모두 가짜이며 모두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이다. 인생 역시 연극과 같은데 만약 모두 다 자신이 연기자임을 알고 우리 모두 연극 속에 있음을 안다면 그럼 누구도 더는 연극 속 스토리를 진짜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역할이 어떠한가에 대해 집착하지 않을 것이며 그런 무대배경이나 소위 재물에 연련하지 않을 것이다.
설사 그의 손에 쥐고 있는 물건이라도 그것이 자신이 아님을 알 것이며 모두 극 중 스토리의 필요에 따른 것으로 자신의 진정한 수요에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진짜로 여기고 따질 필요가 있겠는가? 굳이 번뇌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상의 분석으로부터 알 수 있다시피 어떻게 학문 및 수도의 원칙을 연구하는 가에 관해 우리의 신전한자(神傳漢字) 속에는 모두 각기 다른 정도의 제시가 있다. 아울러 모두 완전히 대도(大道)의 요구에 부합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일상적인 학습과 수행 속에서 아주 관건적인 한 점은 바로 진지하게 책을 보는 것임을 체험할 수 있는데, 매 구절 말의 함의와 요구를 진지하게 체험하고, 자신의 일사일념(一絲一念)에 주의하면서 꾸준히 나태해지지 않는다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 正見網
편집부
(ⓒ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soundofho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