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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中文化] 한자(漢字)의 도(道) (3)

편집부  |  2021-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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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SOH] (전편에 이어)


2) 대도(大道)와 생명에 대한 인식


《주역·계사상(繫辭上)》에 “형이상의 것을 도(道)라 하고 형이하의 것을 기(器)라 한다(形而上者謂之道,形而下者謂之器)”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도(道)란 바로 무형(無形)・무상(無相)의 우주법칙을 가리키고 기(器)란 바로 형형색색의 만물(萬物)・중생(衆生)을 가리킨다. 아래에서 우리는 한자를 통해 전통문화에서 도와 기에 대한 인식을 분석해보자.


(1) ‘도(道)’라는 글자의 본래 뜻은 도로(道路)로 태극원리 속의 도는 바로 우주의 법칙이나 규율이며 우주시공과 만물중생을 육성하는 근본이다. 일체 존재는 모두 도의 체현이며 일체 중생의 사상관념 역시 모두 부동(不同)한 층차와 경계(境界)에서 도의 체현이다. 소위 말이나 행동이 하나하나 사리에 들어맞는다는 뜻의 ‘두두시도(頭頭是道)’에서 도가 바로 이런 뜻이다.


한편 글자 구조를 보자면 道는 首에 辶(之)를 더한 것으로 여기서 수(首)의 본래 뜻은 머리이고 여기서 왕이란 뜻이 파생되어 나온다. 지상의 중생은 본래 천상(天上)의 왕(王)이다. 辶는 회귀(回歸)를 대표하고 귀진(歸真) 또는 귀위(歸位)의 길(노선 또는 법칙)을 가리켜 도라 한다.


이를 더 분석해보면 首의 위에 있는 두 점은 두 눈을 대표하며 중간의 一은 한마음(一心) 한뜻(一意)을 대표하고 아래의 자(自)는 자신에게 의지한다는 뜻이다. 아래의 辶은 끊임없이 행진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방향을 분명히 알려면 한마음 한뜻으로 자신에게 의지해 열심히 실천해 최종적으로 반드시 도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다.


(2) ‘사(师)’의 정체(正體)는 ‘사(師)’인데 고인들은 사(師)를 퇴(垖 duī 작은 산이나 언덕)와 잡(帀 zā 포위의 뜻)으로 풀이했다. 즉, 사방이 다 작은 언덕으로 포위되어 있는 것처럼 아주 많다는 뜻이다. 스승(老師), 선생, 가르치는 사람을 지칭하고 또 여러 사람이나 군대 등을 가리킨다. 또한 법(法)을 본받고 학습한다는 의미도 있다.


대도(大道)의 각도에서 본다면 師는 一과 帥의 조합이다. 여기서 一은 바로 도(道)를 말하고 수(帥)는 이끄는(率) 것으로 통솔하고 인솔한다는 뜻이다. 때문에 이 글자의 바른 해석은 道로 사람을 이끄는 자가 스승이란 의미다. 다시 말해서 스승(師)이 된 자는 우선 도를 전하고 도에 밝고 도를 깨달아 도를 얻어야지만 비로소 스승이 될 수 있고 학생이나 제자된 자는 반드시 그 스승을 존중하며 반드시 그 도를 중시해야 하는데 그 도를 중시해야만 진정으로 그 스승을 존중할 수 있다.


(3) ‘신(神)’이란 글자의 구조는 ‘示’와 ‘申’을 합한 것이다. 여기서 시(示)는 천상변화인데 다시 말해 펼쳐내고 표현한다는 뜻이다. 신(申)이란 인도하고 유발하고 이끌어낸다는 뜻으로 다시 말해 연화(演化)와 창조(創造)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최대의 전시와 표현은 바로 천지만물 일월성신(日月星辰)이기 때문에 고인(古人)은 만물을 이끌어내는 것을 가리켜 신(神)이라 했다. 즉 만물을 창조한 이가 신이란 뜻이다. 동시에 사람은 미혹 속에 있기에 신은 직접 본래면목을 사람에게 드러낼 수 없고 다만 천지만물의 존재와 활발한 생기 그 자체가 바로 신력(神力)의 체현이다. 사람은 천지만물에 대해 마땅히 늘 경외(敬畏)하는 마음과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지녀야하는데 이 역시 신을 공경하는 체현이다.


(4) ‘불(佛)’자의 구조는 ‘亻’과 ‘弗’이다. 불교에서는 수행해서 깨달은 각자(覺者)를 불(佛)이라 한다. 글자의 구조에서 말하자면 佛은 弗人이니 불(弗)이란 비(非)나 불(不)의 뜻이다. 다시 말해 부처는 사람마음(人心)이 전혀 없고 사람의 상(人像)이 전혀 없는 것으로 오직 사람의 몸이 존재하기만 하면 제아무리 경계(境界)가 높을지라도 부처라 부르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비유하자면 만약 동물이 수행할 수 있어서 어느 동물이 수행해 사람의 경계에 도달할 수 있지만 그것이 동물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한 사람이라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5) ‘승(僧)’이란 글자의 원래 뜻은 불교에서 수행하는 출가인을 가리킨다. 그 구조는 ‘亻+曾’으로 증(曾)의 의미는 바로 일찍이 전에라는 뜻이다. 때문에 이 글자의 구조에서 말하자면 승이란 전에 일찍이 사람이었던 자를 가리킨다. 고급생명이 보기에 불가(佛家)든 도가(道家)든 출가인이라면 일단 속인 중에서 나와 전업수행자가 된 것으로 더는 평범한 속인이 아니다.


다시 말해 그는 반신(半神)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요구 역시 높아진다. 동시에 그의 승려 신분 또한 수시로 현재 자신이 더는 일반인이 아니니 마땅히 높은 표준으로 자신을 요구해야 한다고 일깨워준다.


(6) ‘귀(鬼)’란 글자는 ‘甶+人+厶’ 세 글자가 합해진 것이다. 그중 불(甶 귀신 머리)이란 글자는 바로 귀신의 머리란 뜻이며 사(厶)는 사(私)와 통한다. 그러므로 글자 구조로부터 보자면 귀신(鬼)이란 인(人)을 따르고 사(厶)를 따른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사람이 돌아갈 곳을 일러 귀(人之所歸為鬼)”라 했다. 그러므로 이 글자의 구조에서 말하자면 사람의 외모가 만약 귀신의 형상에 부합하고 동시에 내심(內心)이 귀신의 심태에 부합한다면 그럼 이 사람은 장차 귀도(鬼道)로 돌아갈 것이다.


가끔 지금의 많은 젊은이들이 귀신처럼 머리카락을 위로 세우고(甶) 내심이 이기적이고 제멋대로 인 것을 보면 나는 정말로 그들의 미래가 걱정된다.


(7) ‘완(玩)’의 구조는 ‘玉+元’이다. 기본적인 뜻은 유희나 관상(觀賞) 등인데 또는 희롱하거나 무시한다는 뜻도 있다. 이 글자의 구조로부터 보자면 ‘옥(玉)’은 가지고 노는 대상이고 ‘원(元)’은 선천(先天)이나 원시(元始)의 생존상태를 가리킨다.


높은 경계 속 생명은 고생과 어려움(難)이 없기 때문에 일체 생활 상태가 모두 아주 행복하고 자재(自在)하다. 중생은 본새 천상의 왕이기 때문에 놀기를 좋아함은 사람의 본성이고 천성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은 또 오행(五行) 속에 있기 때문에 손오공이 오행산 아래 눌린 것과 같은 상태에 처해 있다. 이때 놀려고 생각하면 진정한 재미가 없고 아울러 정욕(情慾)이 온몸에 가득한 상태에서 놀기만 한다면 그럼 욕망을 방종시켜 득보다 실이 많아질 것이다.


때문에 오직 시간을 아끼고 도를 닦아 귀진(歸真)해 최종적으로 왕(王)의 상태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영원한 행복과 대자재(大自在)에 도달할 수 있고, 그때라야 비로소 진정으로 잘 놀 수 있다.


또 완(玩)은 완(完 끝장이란 의미)과 발음이 같으니 사람이 오로지 즐거움만 탐한다면 반드시 끝장나게 마련이다.


(8) ‘성(性)’이란 글자의 구조는 ‘忄(心)’과 ‘生’의 결합이니 心을 따르고 生을 따른다. 여기서 심(心)이란 정신이며 생(生)이란 생명이다. 이 글자의 구조에서 말하자면 성은 바로 태어나면서부터 지니는 정신적 특징이다. 때문에 사람의 타고난 본성[秉性]은 바뀌기 힘들다.


사람은 타고난 본성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개성(個性)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사람의 타고난 본성은 어떻게 생긴 걸까?


《중용(中庸)》에는 “하늘의 명(天命)을 일러 성(性)이라 한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하늘(天)이란 바로 불법(佛法)이자 대도(大道)이며 불법(대도)이 우리에게 부여한 최초의 가장 원시적인 생명특징을 가리켜 성(性) 또는 본성(本性) 또는 진성(眞性) 또는 천성(天性)이라고 한다.


사람의 남녀 구별은 오직 후천적이고 사람이 세간에서 윤회하는 가운데 지니는 육신의 특징에 불과하다. 이는 사람의 바람과 인연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사람의 본성과는 같지 않다.


일체 생명의 본성은 모두 불법(佛法) 또는 대도(大道)가 부여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본성은 바로 불법대도의 체현이며 중생은 모두 불성(佛性)이 있고 모두 도심(道心)이 있다. 때문에 고인(古人)은 “사람은 시초에 성이 본래 선하다(人之初,性本善 역주: 삼자경에 나오는 말)”고 했다.


사람이 나쁘게 변하는 이유는 사심(私心) 때문에 본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끊임없이 사심을 제거하는 과정은 바로 끊임없이 자아본성을 찾는 과정인 동시에 또 한 사람이 도(道)를 깨닫고 도를 얻는 과정이다.


(9) ‘원(元)’의 본래 뜻은 머리(頭), 시작(始), 으뜸(首), 큼(大), 근원(原) 등이다. 즉 원시적이고 선천적이란 함의를 지니는데 또 원수(元帥)나 두령(頭領) 등을 가리킨다. 이 글자의 구조에서부터 보자면 ‘一’과 ‘兀’이다.


여기서 일(一)은 바로 도이고 높고 평평한 것이 올(兀)이다. 일체 중생에 대해 말하자면 그의 가장 본질적인 생명, 가장 높은 자신이 바로 원신(元神)이고 원신은 도(道)에 가장 가깝다.


사람의 원신은 바로 무극(無極 도)의 의지의 체현이기 때문에 중생은 평등하고 크고 작은 게 없으며 선이나 악도 없다.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그의 원신을 탄생시킨 그 경계야말로 그의 가장 높은 경계이고 이 경계로 회귀하는 것이 바로 반본귀진(返本歸真)이다.


(10) ‘광(光)’자는 고대에는 ‘광(灮)’으로 썼다. 즉 ‘火+兒’인데 여기서 아(兒)는 사람을 뜻한다. 즉 사람 위에 불이 있는 것이 광(光)이다. 정상인의 신체 주위에는 모두 휘광(輝光)이 존재하는데 속담에 “좋은 사람은 머리 위 석 자에 화(火)가 있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석 자란 정상인의 생명장(生命場) 범위이다. 고급 생명이 보기에 삼계(三界)의 범위는 바로 석 자의 땅이기 때문에 석 자 머리 위에 신령(神靈)이 있다고 말한다.


또 사람의 능력이 제아무리 커도 그 능력이 미치는 범위는 석 자를 넘지 못하기 때문에 손오공은 영원히 여래불(如來佛) 손바닥을 벗어날 수 없었다. 대도(大道) 속에서 수련하는 사람은 그 경계가 높을수록 휘광이 더욱 강하고 빛줄기가 만장(萬丈)에 달한다.


때문에 사람들이 ‘덕을 본다’(沾光 역주: 직역하면 빛에 닿거나 물든다는 의미) 덕을 본다고 하는데 바로 수행인의 빛에 물드는 것을 말한다. 수련자 부근에 있는 사람 및 그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모두 수익을 얻을 수 있다.


사람의 휘광이 어둡거나 희미할 때는 종종 재수가 없을 때다. 반대로 사람의 정신이 분발하고 일신에 정기(正氣)가 있을 때가 바로 그의 광채가 사람을 비추고 득의양양해질 때다. 다시 말해 순풍에 돛단 듯이 원하는 대로 일이 성사될 때다.


(11) ‘사(厶)’의 고대 중국어 발음은 지금의 ‘사(私)’와 완전히 같았다. 우리가 보는 厶의 외형은 삼각형이지만 대부분의 동물들 특히 여우, 족제비, 고슴도치, 뱀, 쥐 등의 얼굴형은 모두 삼각형이다.


지금 많은 젊은이들의 성형수술을 좋아하고 자신의 얼굴형은 갸름한 송곳모양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데 다시 말해 역삼각형이다.


그런데 이것은 복이 있는 관상이 아니라 자신의 복분(福份)을 깎아먹는 관상이다. 우리가 흔히 서양 영화에서 무당(巫堂)의 관상을 보면 송곳처럼 뾰족한 모습이다. 관상학에서는 눈이 삼각형인 사람은 대부분 음험하고 악랄하며 사악하고 이기적이라고 본다.


우리는 또 미국 항공우주국에서 1999년에 찍은 지구의 대부분을 덮은 구름으로 구성된 마귀형상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의 눈이 바로 전형적인 삼각형이다.


(12) ‘대(大)’ 자의 구조는 ‘一’과 ‘人’의 결합이다. 고대 중국어에서 일(一)은 도(道)를 표시하는데 가령 《설문해자》에서는 일을 “처음 태시(太始)에 도(道)는 일(一)에서 비롯되었고 하늘과 땅으로 나뉘고 만물을 만들어냈다.(一, 惟初太始,道立於一,造分天地,化成萬物.)”고 했다.


《회남자·전언(詮言)》에서는 “일이란 만물의 근본이다(一也者,萬物之本也)”라고 했다.


《노자》에서는 “성인은 하나를 품어 천하의 본보기가 되었고 하나를 얻어 만사가 갖춰졌다(聖人抱一以為天下式,得一而萬事備)”고 했다.


그러므로 이 글자의 구조에서 말하자면 도(道)를 얻은 사람이 대(大)가 된다. 속인은 모두 사심이 있는데 사(私)는 사(絲)와 발음이 같으니 사심(私心)은 사람을 작아지게 만든다. 사심이 너무 중하면 곧 ‘소인(小人)’이 된다.


때문에 도를 깨닫고 도를 얻으려는 사람은 사심을 제거해야만 비로소 득도(得道)할 수 있고 비로소 소인(小人)에서 대인(大人)이 될 수 있다. 때문에 득도한 사람이라야 ‘크게(大)’ 된다.


(13) ‘법(法)’의 함의는 대단히 홍대(洪大)한데 인류 사회에서 법(法)은 우선 법률제도나 법규를 가리킨다. 또 한 층의 의미가 있으니 표준・규범과 사람들이 본받고 학습하도록 제시하는 도리(道理) 등을 말한다.


높은 경계에서 보자면 법(法)은 바로 천지우주와 만물중생을 육성한 근원으로 천지우주의 운행 법칙인 동시에 또 우주중생에 대한 공통의 요구가 되며, 불가에서는 불법(佛法)이라 칭하고 도가에서는 대도(大道)라 부른다.


한편 법이란 글자의 구조로 말하자면 ‘氵(水)’와 ‘去’를 더한 것으로 마치 물이 흘러가는 것과 같다. 물은 생기를 띠고 만물을 자양하는 동시에 또 더러운 때를 씻어버릴 수 있어 물이 지나가는 곳의 일체를 완전히 새롭게 할 수 있으며 또한 공평(公平)하고 공정(公正)하다.


《도덕경》에서는 “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으니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툼이 없다(上善若水,水善利萬物而不爭)”고 했다.


우주의 법은 바로 중생을 육성하고 중생에게 이익을 주며 중생을 깨끗이 씻고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다. 법(法)은 또 벌(罰)과 중국어 발음이 같은데 고인은 법을 바로 형벌(刑罰)로 여겼다. 이를 사용해 난폭한 자를 금지하는 것으로 죄악을 징벌하는 표준이 바로 법이다.


법은 또 벌(伐)과 발음이 같으니 법에 부합하지 않으면 곧 토벌된다.


법은 또 발(發)과 발음이 같아서 대법에 부합해야만 반드시 흥성하고 발달할 수 있다.


(14) ‘주(主)’에는 임금(君), 위(上), 으뜸(宗), 주재(宰) 등의 뜻이 있으니 최고 권력과 모든 재물을 관장하는 사람이 바로 주다. 그 구조에서부터 말하자면 ‘丶+王’이다.


주(丶)는 법도를 제정하고 만물을 구별하며 시비표준을 명확히 하고 주견(主意)를 정하는 것이다. 왕(王)이란 바로 한 나라와 세계를 통치하는 원수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주(主)’자의 구조에서부터 말하자면 주(丶)가 왕(王) 위에 있는 것으로 뭇왕(衆王)들을 분봉(分封)하고 뭇왕들을 이끌고 관장하는 만왕(萬王)의 왕(王)이 주가 된다. 주의 규칙이 바로 법도(法度)가 되며, 주의 의도가 하늘의 뜻이 되며, 뭇왕의 일체 복분과 영예는 모두 주가 부여하는 것으로 주가 원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주견이 정해지지 않은 것은 바로 마음속에 법도가 없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법도가 있어야지만 하늘의 뜻에 순종할 수 있고 상천(上天)의 보호와 복을 받을 수 있다.


(15) ‘묘(庙 사당)’는 정체로는 ‘묘(廟)’가 되며 고대 중국어에서는 ‘모(貌)’와 서로 통했다. 종교형식이 이뤄지기 전에 묘에 모시던 조각상은 대부분 다 조상(先人)의 형상이었다. 이를 통해 후손들에게 조상의 용모를 기억하고 우러러보며 제사를 지내게 하기 위해서였다. 때문에 《설문해자》에서는 묘(廟)를 “선조의 모습을 존중하는 것(尊先祖貌也)”이라고 풀었다.


반면 유석도(儒釋道) 삼교(三敎)의 사당에 모시는 조각상은 대부분 성현(聖賢)과 각자(覺者)로 다시 말해 수행자와 세인들에게 경건하게 성현과 각자의 가르침을 믿게 하고 생명의 의미를 명백히 알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묘(廟)’는 ‘묘(妙)’와 발음이 같기 때문에 세인들은 묘 안에서 오묘한 이치(妙理)를 알고 오묘한 도(妙道)를 깨달을 수 있다.


정체자로 보면 묘(廟)는 ‘广’과 ‘朝’로 구성된다. 이중 광(广)은 전당(殿堂)을 상징하고 ‘조(朝)’는 알현하거나 성상(聖像)에 참배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의 사묘(寺廟)는 점차 이런 기능을 상실했는데 왜냐하면 출가인들과 묘를 지키는 사람들이 이미 일종의 직업으로 전락해 신불(神佛)보살(菩薩)과 성현(聖賢)각자(覺者)를 이용해 돈벌이를 하고 월급을 받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이 신불이 보기에 모두 죄가 있는 것으로 그 결말은 반드시 좋지 못할 것이다.


이상의 한자에서 우리가 볼 수 있다시피 신전문화(神傳文化) 속에서 도(道), 신(神), 주(主), 법(法) 등의 글자가 지닌 내함은 박대정심(博大精深)한 것으로 이미 원래 모든 종교의 논술과 범위를 아주 멀리 벗어난 것이다.


또 이상에서 언급한 기타 한자들에 담긴 함의 역시 부동(不同)한 경계의 생명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극히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이런 인식은 또 진정한 수도자(修道者)가 부동한 진수(眞修)층차 중에서만 비로소 점차적으로 체득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마음을 써서 깨닫기만 하면 매 사람마다 모두 자신의 독특한 인식이 있을 수 있는데 이 역시 한자의 내함이 원만(圓滿)하고 누락 없는 표현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 正見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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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soundofho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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