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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中文化] 현장(玄奘)의 ‘서역 취경(取經) 행각’은 실화 (하)

편집부  |  2021-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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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 법사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SOH] 앞서 말했듯이, 당승 현장은 불법 진경을 구하려고 서천으로 가는 도중 허다한 간난신고와 생사의 고험을 겪었으며, 5만리 여정을 거쳤다. 마침내 고대 인도의 나란다 사원에 도착한 그는 주지인 계현(戒賢) 대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정진하면서 5년 동안 산스크리트어도 배웠다.


그 후 현장은 인도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불법을 교류하여 명성이 날로 높아졌다.


한번은 고대 북인도의 바르다나왕조 제3대 계일왕(戒日王, Harsa-vardana)이 수도 카나우지(Kanauj, 曲女城)에서 전례 없는 전국 불학 토론회를 개최했다.


현장은 그 회의에서 그 자신이 범어로 쓴 논문을 발표했다. 참석자들은 모두 그의 치밀한 논술에 탄복했고, 18일 회기 동안 아무도 그의 논점에 반박하지 않았다. 현장은 그 당시 인도 대륙의 각국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는데, 그의 명성을 따라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인도에서는 상하 계층을 막론하고 당나라에서 온 승려의 재능과 학문이 세상에서 으뜸가며 비길 데가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실제로 현장의 이름은 인도 교과서에도 줄곧 남아 있다. 오늘날 인도에서 그는 여전히 지명도가 가장 높고 존경받는 중국인이다. 그는 하르샤 바르다나 왕과도 깊은 우정을 맺었다.


현장은 인도에서 존경과 숭배를 받았는데, 어떤 국왕은 심지어 현장을 위해 100동(棟) 사원을 공양하려고 했다.


그러나 동토로 불경을 가져오려는 초심을 잃지 않았던 현장은, 정관 15년(641년)에 계일왕을 작별하고 귀국을 준비했다.


현장은 정관 18년(644년) 당나라로 돌아왔다. 장안성의 사람들은 그를 맞이하기 위해 모두 거리로 나왔다. 길을 따라 이루어진 관리와 백성들의 환영 행렬은 10리에 달했다.


현장은 16년 전, 막막하고 불안한 심정으로 장안을 떠났지만, 돌아올 때에는 전례 없는 대대적인 환영과 영접을 받았다.


장안 주작대로 남단에는 현장이 인도에서 20마리 말과 낙타에 실어온 불경 520첩 657부, 육신 사리 150과(顆), 금과 은 등(等)의 불상 7존이 진열되었다.


그날 하늘에서는 무지개빛의 상서로운 구름이 나타나 불경의 바로 위 사방 몇 리를 돌면서 홍복사(弘福寺)까지 대동했다.


■ 당 태종이 현장을 만나다


당 태종 이세민은 9살 때 눈병을 앓았다. 이 때문에 그의 아버지 이연은 직접 장안 초당사 부처님을 배알했는데, 그 후 이세민은 병이 나았다. 어린 시절, 이 경험을 잊을 수 없었던 이세민은 즉위 후 불교를 크게 진흥시켰다.


정관 19년(645년) 2월, 당 태종은 현장을 불러들였다. 현장이 도착하자 당 태종은 즉시 일어나 영접하며 극진히 대했다. 당 태종은 대담 중 서역의 풍토와 민정, 정교 법령 등에 대해 물었고 현장은 일일이 답변했는데, 기억이 뚜렷하고 조리가 분명했다.


당 태종은 매우 기뻐하며, 현장에게 서역 여행담을 써서 후세 사람들의 공부에 편리를 도모할 것을  부탁했다. 아울러 그에게 “예전에 석도안(釋道安, 초기 중국 불교를 대표하는 동진 시대의 고승)은 법기라고 했는데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면서, "내가 보기에는 법사님의 말씀이 전아하고, 기개가 신중하여 옛사람을 훨씬 능가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태종은 해가 뜰 때부터 밤이 될 때까지 현장과 담소하기를 즐겼다.


1년 후, 현장은 조서를 받아 저술한 12권 『대당서역기』를 완성했다. 이 책에는 현장이 방문한 110개국과 전해 들은 28개국의 지리 정세, 농업 물산, 왕의 궁실, 군사 사법, 종교 풍속 등 여러 방면의 내용이 소개됐으며, 많은 불교 이야기와 전설도 담겼는데 그 가치는 헤아릴 수 없다.


『대당서역기』는 인도 역사에 상세한 사료를 보충해 주었다. 현장은 ‘Indu’의 독음에 따라 ‘천축’을 ‘인도’라고 바로 잡았으며, 인도사의 재건에도 큰 공헌을 했다.


■ 당 태종은 역장을 개설하고 직접 『유가사지론』을 위한 서문을 쓰다


태종의 지지 하에 조서를 받들어 국가 역장(譯場, 고대 중국의 불교 경적 번역기구)을 개설한 현장은 불과 20년 만에 불경 1,335권을 번역하는 역경 사업을 주관했다. 이는 거의 5일마다 1권씩 번역한 셈이다.


불경에 대한 이전의 한문 번역은 직역에 치우쳐 한족 언어 습관에 부합하지 않거나, 의역에 치우쳐 원래의 뜻을 잃었다.


그러나 현장은 직역을 위주로 하는 동시에 의역으로 보조하여, 원래의 뜻을 손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해하기도 쉽도록 했다.


이는 번역사에 새로운 모범을 세웠는데, 후세 사람들은 현장 이전의 역경을 '구역'이라고 통칭하고 현장이 번역한 불경을  '신역'이라고 했다.
 

정관 22년(648년), 현장은 『유가사지론』 100권을 번역하여 당 태종에게 올렸다. 당 태종은 이를 본 후 '불교는 광대하다'며 칭찬을 거듭했다. 그리고 자신이 예전에 한 불법에 대한 일부 비난은 모두 망언이었다고 인정하며, 직접 경서의 서문을 작성했다.


당 태종은 현장에게 마운(摩雲) 가사 한 벌과 면도칼 한 자루를 특별히 공양했다. 이 마운 가사는 만금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바, 정교하게 수 놓는 데 만도 여러 해가 걸리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고 할 수 있다.


■ 불법을 적극 장려한 당 태종


당 태종은 종종 현장을 궁전에 머물게 하며 불법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조정 중신, 예를 들어 장손무기(長孫無忌), 저수량(褚遂良), 재상 어지녕(於志寧) 등도 모두 현장법사와 친분을 맺고 불법을 깊이 믿기 시작했다.


불교는 당 태종의 지원을 받아 당나라에서 흥성하기 시작했고 정관 연간에 크게 선양됐다. 당시 천하 승려는 십만 명이고 국내의 사찰은 3,716개소에 달했으며 기개가 융성했다.


당 태종은 현장의 도량 식견이 높아 고관대작의 재질이 있다고 생각하여, 환속해서 조정을 보좌하라고 일찍이 여러 차례 그에게 권했다.


그러나 현장과의 교류가 많아짐에 따라 당 태종도 점차 생각을 바꾸었고, 학불 출가에 대해 더욱 존중하고 흠모하게 되었다. 또한 "출가인은 대장부의 일이니, 장군 재상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정관 23년(649), 당 태종이 중병에 걸리자 현장은 종남산 취미궁에서 당 태종과 함께 기거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듯이 늘 함께하면서 불교의 생사관에 대해 서로 담론했다.


현장은 어탑(御榻) 앞에서 당 태종을 위해 경을 강의하였고, 이는 병이 중했던 황제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현장은 당 태종이 생명의 마지막을 다하는 과정을 함께했으며, 태종이 사망한 후 장례 절차에 따라 장안으로 돌아왔다.


대당 성세 시기의 불가 사상 전파 규모는 전례가 없었다. 관리는 인과응보를 깊이 믿었고, 청렴결백하게 공무를 집행했으며, 백성들은 마음을 닦아 선을 향하여 민풍이 순박했다. 조야상하(朝野上下)의 정치가 맑고 사회가 안정되었으며, 밤에도 문을 닫지 않고 길에서 떨어진 것을 줍지 않았다.


■ 공을 이루고 물러나 승천 시간을 예지하다


현장이 옥화사에서 『대반야경』을 번역할 때 일찍이 제자들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사람의 형체는 가상과 같아서 오래 가지 못한다. 나는 65세 때 옥화사에서 죽을 것이다."
 

5년 후 마침내 ‘대반야경’ 600권이 완역되었다. 현장은 체력이 쇠진함을 자각하고 제자에게 후사를 전하기 시작했다.


인덕 원년(664년) 정월 24일, 현장은 주변의 불경번역 제자를 모두 불러 작별 인사를 했다. "이 세상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이미 완성되었으니 계속 머물 필요가 없다. 나는 장래 미륵보살이 인간 세상에 태어날 때 그를 따라 세상에 나가 불사를 많이 하고, 바른 지혜로 정법 정각하여 득도 원만하기를 기원한다.“


"내가 죽은 다음 후사는 반드시 절약해야 한다. 거적 한 장으로 나를 감싸서 외진 산(山)의 물가에 묻으면 된다.“


현장은 2월 5일 삼경에 마치 꿈속처럼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안색은 발그레하고 평소보다 더 온화했다.


비보가 전해지자 당 고종은 사흘 간 파조(罷朝)하며 "짐은 국보를 잃었다!" 며 탄식했다.


■ 사후 두 달이 지나도 안색이 변하지 않다 


인덕 원년(664년) 4월 14일, 현장의 장례는 도성 장안에서 거행되었다. 장례 치르는 사람은 100여만 명이었으며, 황실에서 백성까지, 불문에서 세속인까지 모두 눈물을 흘리며 마치 부모가 죽은 듯이 슬퍼했다.


그날 밤, 승속이 함께 묘지에 유숙하여 영혼을 지키는 사람이 3만여 명이나 되었다. 15일 새벽, 현장을 매장하고 봉토할 때는 울음소리가 땅을 뒤흔들고 천지가 변했으며, 새와 짐승이 슬피 울고, 초목도 슬퍼했다.


『대당고삼장법사현장행장(大唐故三藏玄奘法師行狀)』에 따르면 현장법사는 사망한 지 60일 후에도 안색이 마치 살아있는 것 같고 향기가 나며 심지어는 새로운 머리카락까지 자랐다고 한다.


현장은 전심전력을 다 했고, 생사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신불(神佛)의 가호 아래 생명의 전 에너지를 바쳐 중대한 사명을 완수하여 중국 불교의 발전과 번영에 큰 공헌을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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