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 이 세상에서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잃음’이다! 집권자는 권세(權勢)를, 부자는 재부(財富)를 노인은 건강을 잃는 것을 몹시 두려워하며, 재사(才俊)는 재능을 잃는 것을, 숙녀는 미모를 잃는 것을 매우 두려워한다.
이들이 잃지 않으려는 것들은 정말 중요한 것일까?
사람들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사회적 공인(公認), 주관적 관념과 감정, 삶의 쾌적함과 육신의 안락함 등을 잃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며, 심지어 그런 두려움에 대해 생각조차 하기 싫어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세간에서 세상사는 무상(無常)하며 ‘잃음’은 피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바꾸고, 다른 사람을 대하는 우리의 관념과 태도를 바꾸는 것뿐이다.
사람이 ‘잃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생에서의 진정한 소중함을 알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잃음’이 실질적으로 좋지 않거나 잘못된 것이라면 우리는 그래도 그것을 두려워할까? 오히려 다행으로 여길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고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바로 이 속성은 그것이 결코 가장 좋거나 귀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결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혜의 한계로 인해 이러한 것에 대해 명확히 통찰하기 어렵다.
한 생명에게 있어 가장 진귀한 것은 무엇일까? 중국의 전통문화, 특히 전통 수련 문화에서 몇 가지 해답을 찾아 볼 수 있다.
■ 모든 난제에 대한 가장 좋은 해결책은 ‘잃음’
생활 중 어떤 어려움이나 문제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할 것인지, 원래의 낡은 관념을 ‘잃을 것’인지, 또는 우리 자신의 집착 속(牛角尖里)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할 것인지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명성이나 재부를 놓고 쟁탈할 때,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얻음(得)’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갖 머리를 짜내 그것을 얻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명리에 대한 ‘잃음(포기)’을 선택할 것인가? 또는 ‘쟁탈’을 선택할 것인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생각할 것이다. 왜 내가 그에게 양보해야 하지? 왜 그가 유리하도록 해야 하는가?
이유는 없다! 그냥 자신을 바꿀 수 있는 기회, 자신의 원래 관념을 포기할 수 있는 기회를 한번 주는 것뿐이다. 매번 이렇게 ‘잃음’을 잘 할 수 없더라도, 한 번 시도는 해 보고 그 결과를 확인하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물질과 명예, 재부가 정말로 자신의 것이라면 너무 애태우지 않더라도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올 것인데, 그것이 하늘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어떤 것을 잃거나 강탈당한다면 그것은 본래 당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일 수 있다.
우리가 모순을 대할 때 ‘쟁투’나 ‘쟁탈’ 등 원래 가지고 있던 관념을 포기하고 ‘잃음’을 선택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항상 평온과 평화가 함께 할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모든 행복과 건강의 원천임을 알게 되어 기쁨 또한 클 것이다. 모순 앞에서 한 걸음만 물러서면 더없이 넓은 세상이고, 한순간을 참으면 풍랑이 잠들어 무사 평온해진다.
■ ‘잃음’의 경지
‘잃음’은 한 층의 낮은 경지를 버리고, 더 높은 경지로 매진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이것을 해낼 수 있는 것은 세간의 유형적 강요에 따른 것이 아니라 생명의 승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체현이다.
우리의 마음이 항상 물처럼 깨끗하고, 솔직·성실하며, 사람에게 자애롭고,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의 "사(私)"와 "자아(自我)"라는 속박 장애를 홀가분하게 벗어나 지나갈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아마 더 깊은 한 층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우리 생활 중에 드러나는 것은 단지 표면적인 겉모습일 것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나쁜 욕망, 행동, 탐욕, 오만함 등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더 이상 세간의 것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을 것인데, 그 세간의 것들이 이미 티끌처럼 작아졌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여전히 세상의 모든 것을 평소처럼 즐길 수 있지만, 그것을 잃었을 때 마치 바람이 스치는 것처럼 우리는 더 이상 고통스럽거나 심란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을 진정으로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작용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연못은 한 방울의 물을 잃어도 심란하지만 바다는 한 방울 물도 잃어버릴 염려가 없다.
■ 정말로 중요한 것
사람은 흔히 자신의 것이 좋고, 자신의 생각과 선택이 옳으며, 자신의 노력과 경험이 좋다고 여긴다. 아마도 이것은 ‘사(私)’와 ‘자아’가 조성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자신의 것이 좋다는 데 동의할 수는 있지만, 늘 그것을 고집할 수만은 없다.
특정한 작은 영역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좋고 유익하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을 더 넓은 생명 범위와 더 깊은 층면으로 확대하면 한계가 드러날 수 있다.
이러한 제한된 ‘사(私)’는 우리를 자신의 고유한 관념의 틀에 빠지게 하고, 스스로 벗어나기 어렵게 만들 것이다. 따라서 과감히 자신의 ‘자아’와 ‘사(私)’를 끊임없이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생명이 보다 높은 한 층으로 승화할 수 있는 보장일 것이다.
시대 전반에 걸쳐 성취를 이룬 많은 사람, 훌륭한 과학자, 위대한 예술가 등은 자신의 생각뿐 아니라 편안한 생활을 포기하고, 자아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과 돌파를 통해 그처럼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
자신의 발밑 풍경에만 집중하고 미련을 두면, 더 높은 산을 오를 시간과 포부를 갖기 어렵다.
■ 인생은 ‘자아’와의 한 판 바둑
인생은 한판 바둑이고, 자신과 대결하는 것은 바로 ‘자아’ 관념이다. 이 과정은 매우 어렵고, 심지어 상대를 분명히 파악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것 같은데, 바둑을 두는 사람보다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이 수를 더 잘 읽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단계마다 승리에 대한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고, 대국의 모든 단계에서 자신의 ‘자아’를 지속적으로 분명히 인식하고 능가 할 수 있다면, 반본귀진(返本歸眞)이라는 최종적 승리에 이를 수 있다.
당신이 이러한 태도로 인생의 바둑에 임한다면 대국이 끝날 무렵이 되더라도, 당신은 더 이상 최종 성패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대국 시작부터 승자이기 때문이고, 당신의 생명은 첫 바둑돌을 포석했을 때 이미 승화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국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이러한 나쁜 것들을 다소나마 제거하는 것일 뿐이다. 물론, 만약 일정 시간 내에 아주 빨리 ‘자아’를 초월한다면 정말 기쁘고 축하할 일이지만, 이 과정은 매우 어려운 과정일 것이다.
■ 끊임없이 잃으면 시시각각 승화
자아 관념을 찾아내고 버리는 것은 상대적으로 어려운 과정이지만 그것은 확실히 생명의 승화로 가는 지름길이다. 우리가 봉착하는 모든 어려운 상황은 하천의 폭포와 같은 것으로, 한 차례 정화 과정이다. 좋지 못한 불순물을 제거하고 나면 우리는 여전히 원래처럼 맑고 깨끗해진다.
여러분은 한번 생각하고 실행해 보시기 바란다. 오늘 우리가 만난 사람과 상황 중에서 우리 자신의 어떤 탐욕스러운 마음, 좋지 못한 생각을 발견했는지? 발견했다면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노력했는지? 또한 우리가 아직 마땅히 버려야 할 어떤 나쁜 생각과 행동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지?
오늘 자신의 나쁜 것들을 조금이라도 버렸다면, 우리는 이미 조금 승화한 것이다.
만약 앞으로 7일 동안, 우리가 ‘잃음’에 대해 노력한다면, 매일 조금씩 나쁜 생각과 염두를 제거할 수 있다. 그리고 나서 다시 2주 또는 30일 동안 노력해서 이렇게 한다면 31일째가 될 것인데, 돌이켜 보면 다양한 각도와 태도로 ‘잃음’에 대해 다룰 수 있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잃음’에 대해 두려움이 없는 것은 일종의 영적·육체적 자유이며, 두려움을 모두 버리는 것은 생명이 더 높은 한 층으로 승화하는 것이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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