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 세계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나라는 몽골 제국이다. 13세기부터 시작해 14세기 중반까지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던 연합국이다. 몽골 제국이 역사에 남긴 영향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서양 천문학과 지리학, 동양의 기독교 전파와 중국의 종이, 화약, 나침반의 서양 전파 등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동서 문물 교류를 빼놓을 수 없다. 널리 알려진 거창한 문화유산 이외에도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먹는 음식에 이르기까지, 몽골 제국이 남긴 흔적은 아직까지도 일상생활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우리말 ‘한참’의 어원에서도 몽골 제국의 영향을 찾을 수 있다. 사전적 정의는 ‘시간이 상당히 지나는 동안’이지만, 그 어원은 원나라의 역참 제도로, 역참과 역참 사이의 거리에서 비롯된 말이다. 역참은 빠른 교통이나 통신을 위해 가축을 키우고 관리하면서 사람과 가축이 쉴 수 있도록 마련된 숙박 시설로, 몽골 제국 교통망의 근간이다. 우리나라 대표 증류주인 소주와 중국술인 백주는 물론 미국의 햄버거, 홍콩의 딤섬 역시 몽골 제국, 특히 역참 제도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 문화 교류의 기반이 된 원나라의 역참 제도
몽골 제국이 역사에 남긴 가장 큰 업적은 동서 문화의 교류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배경에는 유라시아의 광활한 영토를 거미줄처럼 연결한 역참 제도가 있다. 그 네트워크는 얼마나 짜임새가 있었으며 어떤 파급 효과를 가져왔을까?
몽골 제국은 일정한 지역마다 역참을 설치해 그곳에 사람과 말을 함께 두고, 전해진 소식을 다시 다른 이웃 역참에 전하도록 했다. 육상 교통 통신로인 육참(陸站)뿐만 아니라 수상 교통로인 수참(水站)도 있었는데, 수참은 선박을 통해 교통하고 통신하는 운송체제였다. 육참은 주로 가축을 활용했는데 가축 형태에 따라 말을 이용한 마참, 소를 이용한 우참, 당나귀를 둔 여참, 노새의 나참, 양의 양참, 개를 둔 구참 등이 있었다. 북방의 눈이 많은 곳에서는 개를 운송 수단으로 삼은 구참을, 고원의 산간 지방에서는 노새와 당나귀를 둔 나참과 여참을 활용했다고 하니, 현지 상황까지 고려한 얼마나 효율적인 교통 체제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역참 제도는 칭기즈칸(1167?~1227)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칸(1185~1241)이 체계적으로 정비했고 이어 중원을 차지해 원 세조가 된 쿠빌라이 칸(1215~1294)이 역참 조례를 발표하면서 완비됐다고 하는데, 이는 몽골 제국을 공간적·시간적으로 연결했고 군사와 경제의 물류 체제를 구축하는 기반이 됐다.
역참 제도가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꼼꼼하게 연결했다고 하지만 몽골 제국 전역에 얼마나 많은 역참이 건설되었는지를 종합적으로 알려주는 자료는 없다.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원 나라에는 역참이 약 1500여 개소, 역참에 배치된 말과 노새가 5만 마리, 소가 9000마리, 수레가 4000, 배가 6000척 규모로 파악되니 그 제도가 얼마나 치밀하게 짜여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일괄적으로 파악된 숫자가 아니라 원나라 법률 제도에 관한 공문서를 수집해 편찬한 『경세대전을 토대로 집계한 자료다. 『경세대전 역시 명나라 중기 이후 거의 흩어져 없어졌고 그 일부를 『영락대전』 등에서 엿볼 수 있는 정도다.
『경세대전』 중에서 몽골어로 역참을 뜻하는 참치站赤’ 조항에 의하면 원나라 역참은 동으로는 고려, 동북으로는 지금의 흑룡강 하류인 여진족 방어 초소 눌한(奴兒子), 북으로는 키르기스, 서로는 일한국, 남으로는 월남인 안남(安南)과 미얀마인 면국(緬國)에까지 뻗어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다양한 역참 노선 중에서 만주와 고려를 잇는 노선은 북방의 주요 간선으로 북쪽으로는 흑룡강성, 남쪽으로는 고려 개경(개성)까지 이어지는데, 이 노선에 모두 135개의 역참이 있고 노선에서 관리하는 역마가 6515필, 수레가 2621, 소가 5259두, 개가 3000마리였다.
몽골 제국의 역참은 당시 몽골 제국을 방문한 유럽인에게도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마르코 폴로(1254~1324)는 『동방견문록」에서 역참을 '얌(yamb)'이라고 부르면서 도로를 따라 30킬로미터에 하나씩 설치됐으며, 전령사들이 사용하는 이런 숙소(station)는 크고 멋진 건물인데 방마다 좋은 침대가 있고 원하는 것을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왕이 와서 이용하더라도 좋은 숙박 시설이라 할 것이라고 소개했다. 일부 숙소는 400마리의 말을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도로를 벗어난 초원이나 사막에도 숙소가 있는데 이런 곳은 역참과 역참 사이의 거리가 60킬로미터에 이른다고 적었다.
중국에도 역참 제도와 비슷한 역원 제도가 과거부터 있었다. 하지만 역원 제도는 사신과 관리들의 이동에 주로 활용됐던 수준에 불과했다. 이와 달리 몽골 제국의 역참 제도는 그 규모가 방대하고 촘촘할 뿐만 아니라 물자와 인력의 운송까지 담당하는 포괄적 운송체제였다.
사실 유목을 하던 몽골인은 농경민족으로부터 물자를 사야 했다. 직물과 생필품을 모두 외국에서 구입해야 했기에 역참 제도는 단지 군사적 목적이나 통신 수단뿐만 아니라 경제 활동의 근간이 됐다. 당연히 몽골 제국과 원 나라는 역참 제도를 통해 상업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역참 제도에 따른 상업 발달은 원나라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그 파급 효과를 단적으로 엿볼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원나라 때의 증류주인 소주다.
■ 사치 금지 품목, 소주
한반도에 증류주인 소주가 처음 전해진 것은 고려 말인 14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고려사』에 우왕 원년인 1375년에 처음으로 소주라는 술이 보인다는 기록이 있다. 우왕은 즉위하던 해 2월, 교서를 내렸다. 요즘 사람들이 검소함을 알지 못하고 사치스럽게 낭비하며 재물을 함부로 쓰고 있으니 지금부터는 소주와 화려한 수를 놓은 비단, 금이나 옥으로 만든 그릇 등의 물건 모두 사용을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비록 혼인을 하는 집이라도 명주와 모시만 사용하여 사치를 금하고 근검절약하는 풍속을 만들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서 소주를 마시기 시작한 시기는 14세기 후반이고, 또 사치 풍조를 막기 위해 비단과 금, 옥의 사용을 금지할 때 소주도 항목에 포함됐으니 당시 소주가 매우 고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소주는 우리나라에서 독자적으로 개발한 술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소주를 비롯한 증류는 아랍에서 만들어져 전 세계로 퍼졌는데 아시아의 동쪽 끝에 위치한 우리나라에는 원나라 때 중국을 거쳐 14세기 중후반에 전해졌다. 그렇다면 중국에서는 소주와 같은 증류주가 언제부터 등장했을까?
중국에서 증류주인 소주, 현대 명칭으로 백주에 대한 기록이 처음 보이는 문헌은 원나라 때의 요리책인 『거가필용사류전집』이다. 저자가 알려져 있지 않은 이 요리책은 원나라 성종 때인 14세기 초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에 '남번소주법南#燒酒法’이 나와 있다. 남쪽 나라의 소주 만드는 법인데 현지에서는 '아리걸阿里之'이라고 한다고 덧붙였다.
이어 원나라 황실 어의가 1320년 무렵에 집필한 요리책 『음선정요』에 다시 증류주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좋은 술을 증류시켜 이슬을 거두어 아라길(阿刺吉)을 만드는데 아라길은 열이 많고 몹시 독하다고 소개했다. 그리고 원나라 말기의 문헌으로 14세기 중반에 편찬된 『지정집』에도 아이기(阿爾奇)라는 증류주 만드는 법이 적혀 있는데, 이 책에서는 이 술이 서역(西域)에서 왔으며 지금은 만천하에 퍼져 있다고 소개했다. 또한 명나라 때 의학서인 『본초강목』에는 소주가 옛날 방법이 아닌 새로운 방법으로 만든 술인데 소주 제조법은 원나라 때부터 시작됐다고 나온다.
발효주를 증류해서 만드는 술인 소주에 대한 원과 명나라 문헌을 종합해 보면, 아리걸, 아라길, 아이기라고 부르는 술의 제조가 원나라 때부터 시작됐으며 이르면 13세기 말에 중앙아시아인 서역을 통해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문헌에도 서역을 통해 전해졌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아라길, 아리걸이라는 이름 자체가 모두 아랍어 ‘아락(arak)’을 한자로 음역한 것으로, 아랍어로는 '땀, 이슬'이라는 뜻이다. 소주, 백주 이외에 증류주를 나타내는 또 다른 용어인 ‘이슬로(露)’ 자를 쓰는 노주(露酒)와 의미가 같다.
13세기 말에 전해진 증류주는 14세기 중반에 이미 중국 전역은 물론 고려에까지 전해졌을 정도로 만천하에 퍼졌다. 또한 원나라 황실의 요리책에 만드는 법이 수록돼 있는 것을 볼 때 소주가 아주 귀한 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증류주, 최첨단 기술의 집약체
막걸리, 맥주, 포도주와 같은 발효주가 자연 발생적으로 만들어진 것에 비해 증류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당시 고도의 과학적 지식이 필요했다. 최초의 증류 기술은 기원전 20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됐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목적은 술이 아닌 향수와 향료 제조였던 것으로 보인다.
증류주의 기원에 관해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는 학설은 없다. 중국에서 시작됐다는 설도 있고 이탈리아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지만, 보통은 아랍에서 발달해 전 세계로 퍼졌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아랍을 증류 기술 전파의 진원지로 보는 이유는 8세기 이후 아랍 문헌에 알코올의 어원이 된 아랍어 ‘알코올(Al Kohl)’이 자주 보이는 데다 이 무렵 아랍에서 연금술이 크게 발달했기 때문이다.
연금술은 흔히 주술적 수단을 이용해 비금속을 황금과 같은 귀금속으로 바꾸는 황당한 기술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정확하게는 하나의 물질을 어떤 작용을 통해 다른 물질로 바꾸기 위한 연구다. 일종의 화학반응이라고 할 수 있는데 8~9세기 아랍에서는 이런 연금술 연구가 활발했고, 이를 통해 염산, 황산, 소다 같은 물질이 만들어졌다. 증류주인 알코올 역시 연금술을 통해 개발된 것으로 본다.
알코올의 발전과 관련해 거론되는 인물로는 8세기에 활동했던 자비르 이븐 하이얀(721~815)이 있다. ‘화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연금술사인 자비르는 증류 실험을 통해 순수한 물질을 얻을 수 있음을 증명한 최초의 학자로 꼽힌다. 그리고 10세기 아랍의 의사 알라지(865?~925?)는 직접 알코올을 만들어낸 의사이자 연금술사로 알려져 있다.
아랍에서 만든 증류주가 동양으로 전해져 중국은 물론 고려에까지 퍼진 것은 14세기 중반 이후로 본다. 그렇다면 증류주가 서쪽으로 전해져 유럽에 퍼진 시기는 언제일까? 유럽에서 증류주에 관한 기록은 13세기 말과 14세기 초에 보인다.
13세기 말 독일인 의사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1193~1280)가 최초로 증류 과정을 명확하게 적은 기록이 있고, 14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의사이자 연금술사인 아르날두스 드 빌라노바(1240? ~1311?)가 수많은 아랍의 의학 서적을 번역하면서 증류주를 '아쿠아 비 테Aqua Vitae'라고 불렀다. 아쿠아 비테는 생명의 물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통해서 당시 유럽에서의 증류주의 지위를 짐작할 수 있다.
유럽에 아랍의 증류주가 소개된 것은 동양과 마찬가지로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이지만, 널리 퍼지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무렵이다. 처음에는 주로 수도원의 수도승과 연금술사, 의사 사이에서 의료용으로 증류주를 만들었지만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진과 위스키, 브랜디와 같은 증류주를 의료목적이 아닌 상업용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동양과 서양에서 증류주 제조 기술이 널리 퍼진 시기에 약 1세기의 시차가 생긴 이유는 무엇일까? 정치, 경제, 군사, 문화를 포함해 여러 이유를 꼽을 수 있겠지만 그중 몽골 제국의 역참 제도가 한몫한 것으로 보고 있다. 상업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잘 발달된 아랍의 연금술과 증류 기술이 빠르게 아시아로 전파될 수 있었다는 해석이다.
발효주에 비해 알코올 도수가 훨씬 높은 독주인 증류주의 전파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당시 증류 기술은 최첨단 화학 기술이었고 고부가가치 산업 기술이었다. 14~15세기 무렵의 증류주는 단순한 술이 아니라 의약품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도 단종이 즉위하던 해인 1452년, 부친상을 당해 심신이 허약해진 단종에게 중신들이 “주상께서 나이가 어리시고 혈기가 부족한 데다 날씨가 덥고 무더우니 ‘소주(燒酒)’를 드시라”고 권하는 대목이 보인다. 명나라 때의 『본초강목』에도 ‘소주는 적당량 마시면 한기를 물리치고 습한 기운을 가라앉히며 울적한 기분을 달래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술을 약으로 처방했음을 알 수 있다. 15세기 유럽에서 의사들이 증류주를 개발하고 의약품으로 활용한 것도 같은 이유다.
잘 정비된 몽골의 역참 제도는 소주와 같은 증류주의 발달과 함께 중국 음식 문화에 직간접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일례로 역참이라는 교통 운송 시스템의 정비로 인해 원나라 수도인 대도(지금의 베이징)는 물론 중국 곳곳에 항저우, 양저우, 푸저우와 같은 거대 상업 도시가 발달했고, 주점이라는 숙박업소를 비롯해 요식업이 출현했다.
요식업의 번창은 음식 문화에도 영향을 끼쳐 당나라 때 이후 다시 한 번 차 문화가 꽃피었다. 차와 함께 먹는 다과, 즉 딤섬의 발달 역시 역참 제도와 무관하지 않다. 또한 원나라 음식이 몽골 이외에 한족, 여진, 서역, 인도, 아랍, 터키의 음식 문화와 합쳐지면서 다양해진 것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디지털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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