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공자가 도(道)를 묻다
『장자외편 지북유(庄子外篇知北游)』에 기재된 데 따르면, 공자는 노자에게 “오늘은 좀 한가하니 제가 외람되지만 선생께 도에 대한 가르침을 청합니다.” 라고 했다.
이에 노자는 말했다. “당신은 먼저 재계(齋戒)하여 마음을 소통하고 정신을 깨끗이 씻어내며, 당신의 그런 재능과 지혜를 버리시오. 대도는 현묘하여 표현하기 어렵소! 내가 당신을 위해 대체적인 윤곽을 말하리다.”
노자는 계속 말했다. “빛은 어둠에서 생기고 이치는 무형에서 생기며, 정신은 도(道)에서 나옵니다. 모습(形質)은 정밀한 곳에서 생기며, 만물은 형태를 빌려서 탄생합니다. 그런 까닭에 아홉 구멍을 가진 생명은 태(胎)에서 나고, 여덟 구멍을 가진 생명은 알(卵)에서 태어납니다. 그것의 도래는 종적이 없으며, 그가 간 곳은 끝이 없습니다.
문을 알지 못하고 거처도 알지 못하니 사방이 탁 트여 막힘이 없고 성대합니다. 이것을 얻은 사람은 사지가 강하고, 생각이 막힘이 없고 귀와 눈이 총명합니다. 마음 씀씀이가 고달프지 아니하여, 사물을 대함에 자연스럽게 되어감에 따르고 규정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하늘이 그것을 얻지 못하면 높아질 수 없고, 땅이 그것을 얻지 못하면 넓어질 수 없으며, 해와 달이 그것을 얻지 못하면 운행하지 못하며, 만물이 그것을 얻지 못하면 왕성하게 번창할 수 없으니 이것이 바로 도입니다.
하물며 박학다식한 사람도 지혜가 필요 없으며, 언변이 좋은 사람도 총명할 필요가 없으니, 성인은 이로 인해 앞에서 말한 갖가지 방법을 포기합니다. 이를테면 보태도 보태지지 않으며, 덜어내도 덜어지지 않는 것과 같이 성인이 견지하고 실행해야하는 것입니다.
깊어서 마치 바다와 같고, 높고 큰 모양이 끝나면 다시 시작합니다. 만물을 운송하면서 어떤 것도 결핍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위 군자의 도란, 피상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만물을 지탱하는 것은 모두 그것에서 기원하여 모자람이 없습니다, 이것이 곧바로 도입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이 생육(生育)되는데, 음도 아니고 양도 아닙니다. 대지 사이에 머물러 사람의 형체를 구비했을 뿐 장래에는 결국 그 본종(本宗), 본질(本質)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본질상에서 보면, 사람의 탄생이란 정기(精氣가 모인 물체에 지나지 않으니, 비록 오래 살고 일찍 죽는 차이가 있으나 그 차이는 얼마나 될까요?
말하자면 순간에 불과한데, 하필이면 당요(唐堯:요가 도당[陶唐]씨인 데서 나옴)와 하걸의 시비를 구별해야 하는가! 나무의 과실과 풀에서 자라는 열매는 스스로 생장하는 이치가 있고, 인륜의 변치 않는 도리는 설령 구별하기 어려울지라도, 이빨이 서로 배열되어있는 것처럼 순서가 있습니다. 성인은 이런 일을 만나면 어기지도 아니하지만 가령 자신이 지나가더라도 만류하지 않습니다. 화합하면서 순응하는 것, 이것이 덕입니다. 무심으로 순응하는 것, 이것이 도입니다. 이것에 의해 비로소 제왕의 업적(帝業)이 흥성하고, 제후가 흥기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천지 사이에 사는 것은 마치 빠른 말이 틈을 지나가는 것과 같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갑니다. 짧은 시간에 힘차게 생겨나고, 순간에 떠나서 끝이 납니다. 저절로 변화하면서 아마도 이미 펼쳐졌습니다. 변화 중에서 태어나고 변고(變故)중에 죽습니다. 생명은 이로 인해 슬퍼하고,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슬프고 가엾습니다 . 생명은 천연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이리저리 흩날릴 것입니다. 혼백이 떠나고 몸도 함께 따르게 되니 이것이 최종적인 회귀입니다.
드러나지 않는 것이 나타나고 나타난 것이 사라지게 되는 것은 사람들이 다 같이 알고 있으며, 결코 끝까지 캐지 않으며 바로 사람들이 함께 논의하는 것입니다. 도를 얻은 사람은 말하지 않을 것이며 말을 하면 여전히 도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표면적인 관습으로는 가치 있는 인지를 얻을 수 없습니다. 말 잘하는 것이 침묵만 못합니다, 도는 들을 수 없는 것이며 듣는 것이 귀를 막는 것만 못합니다. 이것을 가히 크게 얻음을 말할 수 있습니다.”
5. 공자가 도에 관하여 듣다
주(周)나라 경왕(敬王) 22년(기원전 498년), 공자는 이미 명성이 자자했지만 여전히 도를 깨닫지(领悟) 못했다. 노자가 벼슬을 그만두고 패현(沛:지금의 장쑤성)으로 돌아간 것을 알고, 노자를 찾아가 접견하였다. 《장자·천운(莊子·天運)》편에는 "공자가 당시 나이 51세에도 도를 깨닫지 못하니, 남쪽 땅 패로 가서 노자을 만났다“ 는 기록이 있다.
노자가 말했다. “오셨소. 나는 당신이 지금 북방의 현자(賢者)라고 들었습니다. 도를 깨달았습니까?”
공자는 아직 터득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노자가 물었다. “어떻게 도를 구하고 있습니까?”
공자는 “제가 구한 것은 법도(法度)이나, 5년 동안 아직 얻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노자 : “그러면 어떻게 했습니까?”
공자 : “저는 음양의 변화에서 찾으려 했는데, 12년이 되도록 아직 얻지 못했습니다.”
노자가 답했다.
“그럴 테지요. 만약 도라는 것을 가져다 바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러면 사람이 국왕에게 가서 바치지 않을 리 없습니다. 만약 도라는 것을 선물로 줄 수 있다면, 부모에게 드리지 않을 리 없습니다. 만약 도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말해 줄 수 있다면, 그러면 자기 형제들에게 말하지 않을 리 없습니다; 만약에 도라는 것을 사람에게 줄 수 있다면, 자손들에게 주지 않을 리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되지 않는 것은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안으로 도를 인지(認知)할 수 없기 때문에 대도(大道)가 머무르지 않고, 외재적인 일 처리가 바르지 않아서 도가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서 나오는 말이 밖에서 받아 들일 수 없다면 성인(聖人)은 전수할 수 없습니다; 밖으로부터 오는 도가, 만약 많은 이들이 안으로 깨닫지 못한다면 성인은 연민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명성이란, 천하의 공기(公器)라 혼자서 많이 가지면 안 됩니다. 인의( 仁義)란, 선왕이 머물던 처소와 같아서 잠시 머물지언정 오래 머물러서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곤란에 처하는데 마치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옛날 고덕(高德)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인(仁)에서 도를 빌렸고, 의(義)에서 잘 곳을 의지하여, 소요대도(逍遥大道)의 현묘한 경지에서 노닙니다. 검소한 들판에서 생활하며, 남에게 베풀 것을 의식하지 않고 농원에서 홀로 생활합니다. 소요(逍遥), 그것은 무위입니다 ; 구간(苟簡), 그것은 검소하고 단순하게 쉽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 부화(不貸), 그것은 낭비가 없다는 것입니다. 형식에 제약을 받지 않으니 옛사람들은 이를 칭하여 생기가 넘치는 본원에서 노니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재화를 탐하는 자는 남에게 이득을 양보하지 않고, 지위를 추구하는 자는 남에게 명예를 양보할 줄 모르고. 권력에 연연하는 자는 남에게 권력을 위임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종일 잃는 것이 두려워 전전긍긍합니다. 이것을 잃으면 슬퍼하여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줄곧 명리 권세를 추구하면서 자성(自省)할 줄 모릅니다. 그들은 하늘이 내릴 벌을 받을 자들이 아니겠습니까?
원한, 은혜, 획득, 베픔, 간언, 교화, 생존, 살육, 이 여덟 가지는 사람을 바르게 하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자연의 변화법칙에 따라 순응하는 자만이 오직 방해받지 않고 운용하기에 적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품행이 단정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단정하게 만들 수 있으며, 마음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런 사람에게는 깨달음의 문이 열리지 않을 것이오.”
6. 공자가 도를 얻다
《장자 내편(莊子•內篇)》에는 공자가 노자에게 이런 말을 했음이 기록되어 있다.
“저는 《시:詩》、《서:書》、《예:禮》、《악:樂》、《역:易》、《춘추:春秋》 이 6경(經)을 제 딴에는 오랫동안 익혀 알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것을 가지고 72 군주에게 유세하고, 주공단(周公旦)과 소공석(召公石)의 자취를 밝혔지만 한 군데도 채택되어 쓰인 데가 없습니다. 참으로 심합니다! 무릇 사람을 달래기가 이다지 어렵습니까? 도를 밝히기가 이다지 어렵습니까? ”
노자가 말했다.
“당신은 치세의 군주들과 만나지 못했으니, 이는 진정한 행운입니다! 소위 6경이란 선왕의 자취입니다. 어찌 옛 행적의 본원이겠습니까? 당신이 오늘 이야기하는 것은 마치 발자취를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발자국, 신발이 밟은 것인데, 단지 발자국은 신발이 아닙니다!
흰 새가 서로 마주 보면서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고도 마음이 통하여 새끼를 낳고, 벌레가 숫컷이 위쪽에서 울며, 암컷이 아래쪽에서 호응하여 서로 마음이 통하여 새끼를 낳습니다.
본성을 바꿔서는 안 되고, 운명을 변화시켜서도 안 되고, 때를 지체시켜서는 안 되고 대도를 막아서도 안 됩니다. 만약 도를 터득하면 무엇을 말미암든지 안 될 것이 없지만, 도를 잃으며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
이번에 돌아간 후 공자는 석 달 동안 두문불출하다가 다시 노자를 만났을 때 말했다.
“저는 도를 얻었습니다. 까막까치는 알을 까서 새끼를 낳고, 물고기는 곤경 속에서 서로 도우며 새끼를 낳고, 꿀벌은 스스로 자화하여 태어나며, 동생이 생기면 형이 사랑을 잃을까 봐 울고불고합니다. 오랫동안 나는 만물의 자연스런 조화에 순응하지 못했습니다. 자연만물의 조화 이치에 따르지 못하면서 또 어찌 사람을 교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노자는 말했다. “좋구나! 공구(孔丘)는 도를 얻었도다.”
공자는 초기에 사람의 도리를 널리 알리려는 뜻으로 노자를 만났는데, 문을 열고, 미혹되어 풀리지 않는 의문 속에서 점차 도에 접근하게 되었다. 노자는 그를 위해 단계별로 의혹을 풀고 깨우치게 했으며, 마치 흐르는 시냇물처럼 거침없이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한즉 2천 5백여 년간 길이 사람들을 교화하여 영향을 끼쳤다. (끝)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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