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 중국은 세계 최대의 인구 대국이다. 하지만 먼 옛날부터 중국에 인구가 많았던 것은 아니다.
중국의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한 것은 청나라 무렵이며, 뜬금없게도 그 배후 중 하나로 지목되는 게 고구마다.
中 인구 증가의 일등공신 고구마
고구마가 중국에 처음 전해진 것은 명나라 말기인 1593년 무렵으로 추정되고 있다. 콜럼버스가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의 서인도제도에 도착해 현지작물인 고구마를 처음 스페인으로 가져온 후 거의 100년 만의 일이다.
콜럼버스는 카리브해의 아이티섬에서 낯선 뿌리 작물인 고구마를 발견해 스페인으로 가져왔지만 품종이 개량되기 전인 당시의 고구마는 더운 아열대 지방에서 자라는 박물이었기 때문에 16세기 말까지 유럽에서는 농작물로 널리 퍼지지 못했다.
스페인과 포루투갈은 자신들의 땅에서 고구마를 제대로 키우지 못하자 그 종자를 인도와 필리핀을 비롯해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로 가져와 퍼뜨렸다. 새로 개척한 식민지에서의 식량 확보를 위한 목적이었다.
이후 고구마는 여러 경로를 통해 중국으로 들어왔는데, 그 경로 중 하나가 청나라 사람 천쓰위안이 쓴 책 ‘금서전습록’에 자세히 나온다.
16세기 말 명나라 신종 때 중국 남부 푸젠성에 진진용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의 집안은 명문가가 아닌 중인급이었기 때문에 벼슬길에 나서기가 쉽지 않았던 데다가 당시 푸젠성에서는 장사를 해 돈을 버는 것이 유행이었다.
진진용 역시 일찌감치 공부를 접고 어려서부터 장삿길에 나섰다. 대만과 마주보고 있는 푸젠성은 명나라 때부터 바다를 통해 해외로 나가는 관문이었기 때문에 그 역시 당시 여송국으로 알려진 필리핀을 오가며 장사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진용은 고향에서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작물을 발견했다. 바로 고구마였다. 달달한 맛을 가진 데다 두 개만 먹어도 밥을 먹은 것처럼 배가 불렀다. 게다가 메마른 땅에서도 잘 자랐기 때문에 이 낯선 작물을 고향으로 가져가 팔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고구마를 필리핀 영토 밖으로 가지고 나가는 것이 문제였다. 당시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으며 고구마를 전파한 스페인 관리들이 고구마 종자가 외국으로 나가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했기 때문이다.
이에 진진용은 스페인 관리의 운을 피하기 위해 한 가지 꾀를 냈다. 고구마 줄기를 밧줄처럼 엮은 후 그 속에다 고구마 종자를 감춘 것이다. 이렇게 필리핀 루손섬을 떠난 그는 일주일 동안의 항해를 거쳐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와 고구마를 심었다.
그가 심은 고구마는 푸젠성의 풍토에서도 무럭무럭 잘 자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푸젠성에 큰 기근이 들었다. 이깨까지만 해도 진진용이 가져온 고구마는 그의 집 주변에서만 재배됐을 뿐 성 전체로 널리 퍼지지는 못했다.
그런데 가뭄이 들면서 백성들이 굶주림에 시달리자 푸젠의 한 관리가 고구마가 가뭄에도 잘 자란다는 소문을 듣고 진진용의 도움을 받아 고구마 재배법과 고구마 종자를 퍼뜨려 기근으로 배고픔에 시달리던 백성을 구했다.
이렇듯 흉년이 들었을 때 쌀 대신 양식도 되고 맛까지 좋은 고구마였지만 17세기를 지나 18세기까지만 해도 푸젠성을 벗어나 중국 전역으로 널리 퍼지지는 못했다.
교통이 불편한 데다 재배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구마가 중국에 널리 퍼진 것은 18세기 중반 이후 건륭제 무렵으로, 이와 관련해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청나라 최고전성기를 이룩한 건륭제는 89세까지 살았는데 변비로 고생이 심했다. 어느날 황제가 주방인 어선방을 지나는데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군고구마 냄새였다.
건륭제가 군고구마를 먹어보니 맛이 좋아서 종종 간식으로 먹었는데, 고구마 덕분인지 변비가 사라지고 정신까지 맑아졌다.
그리하여 황제는 고구마가 인삼보다 더 좋다고 극찬했는데, 이 말이 민간에 전해지면서 사람들은 고구마를 ‘땅에서 나는 인삼’이라는 뜻에서 토인삼(土人蔘)이라고 부르게 됐다.
이후 중국에 대기근이 들었을 때 건륭제가 구황 식품으로 고구마를 널리 전파한 덕분에 수많은 사람이 흉년에도 굶어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에 걸쳐 일어난 급속한 중국 인구 증가에 고구마가 일조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건륭 연간에 산둥성을 중심으로 중국에 연이어 기상재해가 잇달았다. 건륭 11년인 1746년, 황허강이 범람하면서 산둥성에 대홍수가 발생했다. 이듬해에는 반대로 극심한 가뭄이 들었다. 5월까지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다가 6월에는 때아닌 서리가 내리면서 농사를 완전히 망쳤다. 땅에 뿌려놓은 종자까지 모두 얼어 죽을 정도였다.
이 무렵 청나라 정부는 구황작물로 고구마를 주목하고 전파에 힘을 기울였다. 이 덕분에 건륭제 이후 고구마는 흉년에는 양식을 대신하는 구황식품으로, 평소에는 도시에서 빈부를 막론하고 모두가 즐겨 먹는 간식이 됐다.
디지털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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