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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차이나] 중국의 대표 음료, 茶

디지털뉴스팀  |  2020-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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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unsplash]


[SOH] ‘푸드&차이나’는 음식과 관련된 이야기를 통해 중국의 이모저모를 알아보는 코너이다.  중국은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한 나라지만 그들의 모습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면 그 민낯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많이 다를 수 있다.


중국은 우리의 이웃국으로 싫든 좋든 계속 살을 맞대고 살아야 하는 관계이다. 중국의 음식의 역사는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두루 영향을 끼치는 만큼 우리가 중국을 보다 정확히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중국의 대표 음료, 茶


중국은 차(茶)의 나라다. 차를 하루도 마시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로 차가 일상화됐다. 물론 요즘 중국 젊은층에서는 커피도 즐기고 차 대신 광천수라는 생수도 많이 마신다. 하지만 이들 역시 일상에서는 주로 차를 마신다. 중국 물에는 석회 성분이 섞여 있어 그대로 마시기에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얼핏 생각하기에 중국인들이 일상적으로 차를 마신 역사는 아주 오래전부터일 것 같다. 중국이 차 발상지인 데다 삼국 시대를 무대로 한 소설 ‘삼국지’도 유비가 찻잎을 사는 것에서 시작하는 만큼 최소 2,000년은 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실제로 중국에서 차가 널리 퍼진 역사는 생각보다 길지 않다. 8세기 무렵의 당나라 때부터다. 물론 이때 차는 사대부들이나 부자들이 주로 마셨다. 일반인들이 차를 마실 수 있었던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중국에서 차가 퍼진 과정에는 일반 상식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차와 그 역사를 살펴보면 역사책을 통해서는 미처 알 수 없는 중국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할 수 있다.


옛날 중국인들이 한자로 ‘낙노(酪奴)’, 즉 우유나 요구르트의 몸종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던 음료가 있다. 어떤 음료이기에 이렇게 천대를 받았을까 싶은데 뜻밖에도 차의 별칭이다.


남북조 시대 북위에서는 차를 이렇게 불렀다. 북방 유목민이 중국의 절반 이상을 지배했던 시절, 앞서 언급한 남제 출신 장군으로 북위에 투항한 왕숙이 유목민의 음식인 양고기와 양젖에 익숙해지면서 낙농 제품에 비하면 차는 노비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하한 것에서 비롯된 말이다.


고대 중국에서부터 당나라 이전의 남북조 시대까지, 차는 소수 계층이라면 모를까 일반적으로 그리 큰 대접을 받지 못했다. 당나라 이전은 북방이 남방에 비해 문화적으로 월등하게 발전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차보다는 상대적으로 낙농 제품이 훨씬 더 사랑받았다.


차나무는 따뜻한 지방에서만 자라는 식물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 중국에서는 주로 쓰촨, 구이저우, 윈난 지역에서 재배했다.


그렇기 때문에 황허강 유역에서 발전한 중원의 한족은 물론 남북조 시대에 북방을 지배했던 유목민에게는 그다지 익숙한 음료가 아니었다.


특히 남북조 시대에는 남북이 분리돼 발전했고 유목민과 한족이 대립했던 시기였기에, 북방을 지배했던 통치자의 시각에서 남방으로 밀려난 한족이 마시는 차는 천박한 음료에 지나지 않았다.


낙양에 수도를 둔 북위를 비롯해 북방 유목민이 세운 북조의 여러 나라에서 연회를 열 때는 우유나 양젖을 비롯한 낙농 음료와 함께 차도 나오긴 했다.


하지만 이때 마련된 차는 북조에 항복한 남조의 장군과 귀족들이 유목민의 음식인 우유를 마시지 못하니까 이들을 위해 차린 음료였다.


항복한 패장들이 마시는 음료였으니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고 그들이 마시는 차 역시 같은 취급을 당했다. 이것이 바로 차가 우유의 몸종이라는 별명이 생겨난 배경이다.


반면 당나라 중기인 8세기 이후부터는 차의 위상이 180도 달라졌다. 차는 선비들이 마시는 품격있는 음료가 됐고 귀족들이 즐기는 기호품이 됐다.


차의 역사에서부터 차의 종류, 마시는 법과 도구를 기록한 책도 나왔는데, 경전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이름도 ‘차경(茶經)’이다. 당나라를 전후로 천지개벽, 상전벽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차의 위상은 달라졌다.


당나라 때부터 최고의 음료가 되다


중국에서는 전설 시대부터 이미 차를 마셨다고 한다. 사람들에게 농사짓는 법과 약 짓는 법을 알려준 신농씨가 100가지 풀을 일일이 맛보는 과정에서 72가지 독초에 중독됐는데 찻잎을 넉고는 해독이 됐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차의 기원이 신농씨에서 시작됐다고 하는데, 이러한 전설을 그대로 믿기는 좀 어렵다. 다만 전설이 전하는 상징적 의미에서 고대 중국에서 차는 음료라기보다는 약용으로 마시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차는 쓰촨, 구이저우, 윈난 지역 특산물이었는데, 한나라 말기와 삼국 시대에만 해도 구이저우와 윈난은 제갈공명이 남방 정벌에 나섰던 남쪽의 먼 오랑캐 땅이었고, 쓰촨은 먼 시골인 파촉(巴蜀)지방이었으니 공간적으로도 그렇고 기술적으로도 찻잎이 널리 퍼질 수 있는 여건이 아니았다.


삼국 시대 이후 진나라가 북방 유목민에 쫓겨 남쪽으로 천도한 동진 시대에도 사대부들 사이에서 차는 그다지 인기 있는 음료가 아니었다.


그러다가 당나라 때부터 확연하게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나라 때의 풍속을 기록한 ‘봉씨견문기’를 보면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당 현종 때인 개원 연간(713~741)에는 지금의 허난성과 허베이성에서부터 수도인 산시성 시안에 이르기까지 도시마다 곳곳에 찻집이 문을 열고, 차를 끓여 파는데, 너도나도 돈을 아끼지 않고 차를 사 마셨다. 이에 따른 차 소비량도 만만치 않았다.


당나라 때 차가 이렇게 빠른 속도로 광범위하게 퍼진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있다. 먼저 강남의 발전이다. 위진남북조 시대 이후 수 백년 동안 북방에서는 끊임없이 전란이 이어졌다. 그로 인해 인구가 대거 남쪽으로 이동했고 덕분에 양쯔강 유역을 따라 강남이 집중적으로 개발됐다.


당나라 때 차가 발전한 또 다른 이유는 무인 중심의 북방 호족 문화의 쇠퇴와 문인 중심의 남방 귀족 문화의 발전이다.


강남 경제권의 발달과도 맞물려 있지만 남북조 시대는 전쟁의 시대였다.


그렇기에 무인의 호방함과 용기가 대우받고 그 상징으로 음주 문화가 만연했지만 당나라는 문인이 대접받는 세상이었다. 과거 제도의 정착을 통해 사대부가 득세했고 불교가 번성했다. 이런 분위기에 맞게 술보다는 정신을 맑게 해주는 차가 대우받았다.


차 문화가 널리 퍼지면서 문화생활뿐만 아니라 중국 경제와 사회에도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다도의 풍속이 생기고 사람들이 밤낮으로 앞다투어 차를 마시니 차 산업은 자연스레 번창했다.



디지털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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