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톈샤오(李天笑 시사평론가)
[SOH] 왕리쥔 사건이 중공의 내홍(內訌)과 각종 흑막을 속속 드러내고 있다. 최근 며칠 왕리쥔이 미국 영사관으로 망명을 시도한 것과 왕과 보시라이가 함께 악행을 저지르다 서로 적이 되어 추문을 폭로한 것, 왕과 보가 파룬궁을 포함해 민중들을 잔혹하게 탄압한 각종 범죄행각 등이 폭로되었다.
왕리쥔에게 문제가 발생한 후 지금 가장 큰 관심사는 보시라이의 앞날이다. 보시라이가 이번에 쿤밍에서 충칭으로 돌아와 캐나다 하퍼 총리를 만난 형식은 분명 그의 앞날이 밝지 않고 이미 ‘내부에서 통제’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중대한 정보이다. 중공 고위층은 보시라이의 외부활동을 엄밀히 통제하고 있으며 팬더 서명식에도 출석하지 못했다. 또 하퍼 총리를 수행한 3개 외신과 신화사만 회의장 입장이 허용되었다. 보시라이를 떠받들던 충칭 언론들은 일률적으로 차단당했고 신화사에서 발표한 원고만을 게재할 수 있었다.
이번 충칭사건에서 가장 의미있는 것은 만약 왕리쥔의 갑작스런 ‘배반’과 보시라이가 신속하게 통제당한 전후 사정과 과정을 통해 볼 때 여러 방면에서 중공 내부투쟁 중의 일반적인 상황을 뛰어넘은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시라이와 왕리쥔은 불과 8개월 만에 전임자의 지지하에 형성된 폭력조직들을 철저히 타파하고 자기 세력을 심을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보시라이는 의도적으로 후진타오-원자바오에 저항해 허궈창, 왕양 등 현직 고위관리들을 공격했을 뿐만 아니라 베이징 변호사 사무실에 근무하는 펑전(彭真)의 아들 등 태자당을 건드렸다. 각 파벌의 보-왕에 대한 반격 역시 마찬가지로 정에 얽매이지 않고 신속히 이뤄졌다. 그 중 중앙기율검사위원회가 왕리쥔과 담판을 벌여 보시라이를 내부에서 통제하는데는 불과 반달도 걸리지 않았다.
또 예를 들어 보시라이는 후-원에 대해 여러 차례 쿠데타의 뜻이 내포된 도발을 감행했고, 왕양 등과는 관영언론에서 공개 설전을 벌였다. 그러다 왕리쥔과 보시라이의 주종관계가 하룻밤 사이에 너 죽고 나 살기 식의 적대관계로 돌변했다. 왕리쥔은 또 중공 역사상 부성장급 관원이 외국 영사관에 망명을 신청하는 초유의 짓을 저질러 중공 내부투쟁의 잠재규칙들을 모두 위반했다.
더욱이 중공 통제하의 인터넷에서 왕리쥔에 관련된 각종 소식이 전파되었음에도 삭제되지 않았다. 왕리쥔이 ‘공개서신’ 형식으로 인터넷에 보시라이를 성토한 것 등은 전례가 없는 것으로 불가사의하기까지 하다. 이외에도 9명의 상무위원들 중 6명이 일찍이 충칭을 방문했음에도 이번에 보시라이의 ‘홍가(紅歌 공산당 찬양노래) 부르기 대회’는 베이징 9명 상무위원들의 냉대를 받았다. 이는 겉으로는 부드러워 보이지만 속으로는 아주 잔혹한 중공 내부투쟁의 복잡성과 무서움을 보여준다. 충칭사건의 영향은 이제 막 시작에 불과하며 큰 연극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이번 사건이 설명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선 종합적으로 볼 때 충칭사건은 중공 내부투쟁이 정상적인 범위를 벗어나 백일하에 공개된 것으로 그 참혹성과 갑작스러움 및 연쇄반응은 모두 전면적으로 통제를 상실하고 붕괴로 나아가는 중공의 현 상황을 반영한다.
내부투쟁이 각 파벌의 생존과 권력이익의 새로운 조합 중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면 사분오열되거나 혹은 공멸하는 붕괴의 국면이 나타날 수 있다. 현 상황으로부터 본다면 당초 장쩌민이 뤄간과 저우융캉을 상무위원회에 끌어들이고 지금 저우융캉이 보시라이를 18대 상무위원회에 진입시켜 자신의 역할을 대신 맡기려 하는 목적은 바로 6•4 천안문이나 파룬궁 탄압 등 중공이 저지른 각종 피의 부채가 청산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다시 말해 박해정책을 계속 유지하고 박해 흉수들이 징벌을 피하게 하려는 것이다. 저우융캉 등이 보시라이의 상무위원회 진입이 불가능하고 자신들이 청산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이런 생존위협은 각 파벌을 ‘너 죽고 나 살기’ 식 투쟁으로 이끌어 중공의 해체를 촉발할 것이다.
서방국가에 대해 말하자면 그들은 충칭사건을 통해 중공정권이 그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강력하지 않다는 것을 보았다. 또 중공의 내부투쟁은 가령 18대 권력조합과 서열배분처럼 단지 표면적인 권력교체현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 중공의 쇠퇴 역시 꼭 물가상승이나 GDP 성장률 등 경제적인 요소와 관련된 것만도 아니다.
충칭사건과 그것의 연쇄반응이 설명하는 것은 중공 정권이 극복할 수 없는 내재적인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것이 아주 허약하다는 것, 그것의 붕괴가능성이 내부투쟁 등 돌발적인 사건에 의해 촉발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충칭사건은 바로 중공이 해체로 나아가는 과정 중에서 한 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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