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경비대, 중국배 불러들여 ‘밤의 稅關’ 노릇 [조선일보 2006-09-02 03:08]
'북·중 압록강 밀무역' 현장 르포
어둠 깔리면 불빛 신호… 거래 후 ‘뒷돈’ 챙겨
고철·골동품·개고기… “공식 교역량에 육박”
[조선일보]
지난달 30일 오후 6시, 중국 단둥(丹東)에서 30㎞쯤 떨어진 압록강 기슭. 창고 같은 건물이 하나 있고, 거룻배 3척이 정박해 있다. 폭 70~80m 강 건너편은 북한 의주(義州)땅. 북한 국경 경비초소가 보이고, 멀리 광석채굴용 철제구조물이 서있다. 1시간쯤 지나자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렸다. 해는 짧아졌고, 전기부족으로 북한땅에 전깃불을 켠 집은 하나도 없다. 그때 압록강 저편 기슭에서 불빛 하나가 깜박깜박하기 시작했다. 마치 반딧불이 같다. 아까 보았던 북한군 초소임에 틀림없다. 그러자 이쪽 강기슭의 거룻배들이 시동을 걸었다. 인기척도 조명도 없는 깜깜한 강을 거룻배들은 무언가를 싣고 ‘반딧불이’를 찾아 강을 건넜다. 이런 북·중 국경의 ‘밀무역’은 밤늦게까지 계속됐다. 한 관계자는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초저녁부터 해가 뜨는 새벽까지 계속한다”고 말했다.
후산(虎山)산성 부근의 국경지역은 밀무역이 성행하는 곳 중의 하나. 강폭이 좁고 민가가 드물어서 이런 일에 안성맞춤이란 것. 밀무역은 북한 국경경비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묵인이나 방조 수준이 아니라 아예 주도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게 현지인들의 얘기다. 단둥의 한 소식통은 “밤중에 압록강변에서 반짝거리는 불빛은 대개 북한 경비대 초소에서 중국 쪽 밀무역업자에게 보내는 신호들”이라고 했다.
북한에서 중국으로 들어오는 물건은 주로 고철과 구리 같은 비철금속, 골동품이다. 압록강에서 잡은 쏘가리와 민물장어 등 수산물도 들어온다. 한 주민은 “중국 쪽보다 북한 쪽 강변에서 고기가 더 잘 잡힌다”고 했다. 북한산 개고기도 ‘기름기가 없어’ 인기다. 한 마리에 250위안(약 3만원)에 팔린다.
북한 고철은 1㎏에 1.5위안(약 180원)에 거래되는데, 이 중 4분의 1 정도는 북한 경비대가 ‘세금’으로 떼간다고 한다. 북한 밀무역업자는 안전을 보장받고, 경비대는 뒷돈을 챙기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래인 것이다. 거룻배를 3척 정도 가진 중국 쪽 무역업자의 경우, 하루 수입이 2000위안(약 24만원) 정도라고 한다. 중국의 일반적인 대졸 직장인 한 달 월급을 하루에 버는 셈이다.
밀무역에선 현금 거래뿐 아니라 물물교환도 이루어진다. 단둥의 밀무역업자 A씨는 “창고에 쌀이나 술, 과자 같은 것을 쌓아놓고 현금 대신 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품질은 대부분 형편없는 것들이라고 한다. A씨는 “그래도 북한에서 현금 대신 초콜릿이나 과자 같은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며 “되팔아 다시 돈을 벌려는 것”이라고 했다.
현지 관계자들에 따르면, 북한 경비대가 관여하는 ‘비밀스러운 일’은 밀무역뿐만이 아니다. 단둥의 한 조선족은 “600~700위안만 있으면 대낮에도 북한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강을 건너는 데 드는 뱃삯과 국경경비대에 줄 선물 비용이다. 중국에서 정식으로 북한땅에 들어가려면 단둥 세관에서 통행증을 발급받아야 한다. 또 세관이 문을 닫는 저녁 이후엔 통행이 금지된다. 하지만 이런 공식 루트를 거치지 않는 ‘밤의 세관’이 있다. 단둥의 한 한국인은 “밤이면 사람을 태우고 압록강을 건너는 배들이 여기저기서 눈에 띄지만 잡혀서 문제가 됐다는 말은 못 들어봤다”며 “이런 배들은 북한의 보따리상이나 ‘얼음’(마약)을 파는 사람들도 이용한다”고 말했다.
더욱 놀라운 증언도 나온다. 돈 많은 북한 밀수업자들은 이따금 북한의 가족들을 데리고 나와 단둥에서 2~3일씩 놀다 들어간다는 것. 한 조선족 민박주인은 “2000위안에 민박집 전체를 빌려 며칠 놀면서 맛있는 것도 먹고, 노래방에 가기도 한다”며 “단둥에서 돈을 제일 잘 쓰는 사람은 북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단둥을 끼고 있는 중국 랴오닝성(遼寧省)의 올 상반기 대북 무역(공식집계)은 20% 이상 줄었지만, “밀무역은 갈수록 활성화되는 추세”라고 현지인들은 말했다. 공식교역량과 맞먹을 것이라는 말도 있다. 밀무역업자들은 최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방중설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국경 경비가 강화되면 돈벌이에 타격을 입기 때문. 한 관계자는 “우리는 김 위원장의 방중 소식을 제일 싫어한다”면서 “먹고사는 데 도와주는 것도 없으면서 왜 방해하느냐”고 말했다.
(단둥=이명진특파원 [ mj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