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즈베키스탄 고려인입니다. 우즈베키스탄 ‘고려인과학기술인협회’ 회장입니다. 우리 협회 이름은 ‘틴보(Tinbo)’입니다. 회원은 500명이고 그 중 150명이 과학자들입니다. 협회는 1991년에 조직됐고 저는 1998년부터 회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2006년세계한민족과학기술자대회’가 열리는 서울 삼성동 COEX 아셈홀 라운지에서 만난 윤 류보프(Yun Lyubov) 재(在)우즈베키스탄 한인과학기술자협회장은 ‘고려인’임을 강조하며 약간 서툴지만 비교적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본지와의 회견에 답했다.
“저는 원래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1952년 우즈벡으로 이사를 와서 이곳 다시켄트에서 지금껏 살고 있습니다. 지금도 화학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고려인이라는 게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릅니다.”
옛 소련의 고려인이란 1937년 스탈린 소련 정부에 의해 조선족의 말살정책으로 조선족 전원이 시베리아를 비롯해 연해주 등 중앙아시아 오지로 강제 이주당한 사람들을 말한다. 카자흐스탄도 우즈벡도 그러한 지역 중 하나다. 잘 알려진 ‘카레스키야’가 그렇다. 카레스키야는 Korea의 소련식 발음으로 소련 거주 한인들을 말한다. 그들의 쓰라린 과거는 영화와 문학작품으로도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눈물겹다.
1939년생인 윤 회장은 유기화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어려운 시절 ‘고려인’ 윤 류보프는 우즈벡에서 대학을 마치고 1971년 연구소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나 1990년 대학에서 ‘큰 박사’ 학위를 받았다. 나이에 비하면 상당히 늦은 셈이다. 학문에 무슨 나이가 있겠는가. 그녀는 가냘픈 여성이 아니었다. 그녀는 강하고 끈질긴 고려인이었다.
“유기화학 박사, 배움에는 나이가 없어”
당시 여성으로서 과학의 길을 걷는 게 힘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윤 류보프 박사는 “과학을 공부하고 싶었고 또 하는 것이 내가 갈 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 속에는 결단력과 의지가 담겨 있다. 학문을 하려는 사람의 자세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쉽고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한국 방문은 이번으로 열두 번째가 됩니다. 과학기술과 관련해 한국정부가 초청을 많이 해 주었습니다. 세계한민족과학기술자대회에는 항상 왔습니다. 그리고 한국어를 꼭 배워야겠다는 생각에서 1995년 서울에 있는 한국어 아카데미에서 1년 동안 배운 적이 있습니다. 그 때가 56세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국어를 잘 못해서 미안합니다.”
윤 박사의 한국에 대한 애착은 대단하다. “소련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이 발전을 많이 해서 어디 가서 부끄러운 게 없고 긍지를 많이 느낍니다. 우즈벡 사람들도 이제 고려인이라면 다른 눈으로 바라봅니다. 너무 기분이 좋습니다.”
“제가 한국에 온 것은 1993년입니다. 초청 받아서 왔습니다.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너무 반가워서 많이 울었습니다. 우리(네) 조국이 너무 발전해서 자랑스러워 울었습니다. 그리고 올 때마다 뿌듯한 감정을 느낍니다.”
“처음 방문했을 때 많이 울어”
그녀는 남매를 두고 있다. 첫째인 아들은 윤 박사와 같이 유기화학을 전공했다. 현재 분당에 있는 한국식품연구소(KAFRI)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3년 계약으로 한국에 왔는데 지금은 휴가 중이고 9월이면 다시 연구소로 복귀한다고 한다.
윤 박사는 ‘고려인’을 위해 정말 열성적이다.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2005년 ‘우즈벡 고려인 과학자(Korean Scientists of Uzbekistan)’라는 책을 발간했다. 과학자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삶 등을 기술한 과학자 백과사전이다.
한국에 바라고 싶은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윤 박사는 “지금보다도 과학기술이 더 발전하고 잘 살아서 고려인이라는 긍지를 더 느끼고 싶다”고 답변했다. 아마 한국의 과학기술이 쓰라린 삶을 살아온 고려인의 한을 풀고 있는지 모른다. 인디안 마지막 추장 ‘검은 고라니’처럼 말이다.
해외 한인 과학자들은 많다. 노벨상 수상후보로 거명된 사람도 많다. 한국의 과학기술이 뻗어 나가고 있다. 의미가 어떻든 세계화 시대다. 그러나 고희를 바라보는 고려인 윤 박사는 민족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과학자다. “이야기(한국어)를 잘 못해서…”라며 연거푸 미안해 하는 고려인 윤 박사는 정말 그렇다. 세계한민족과학기술자대회는 바람직한 대회다. 학술교류의 장이든 아니면 한국인이라는 피의 동질감을 확인하는 장이든 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