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2005.10.09 17:51:18]
살다 보면 회귀할 곳이 있다는 것만큼 든든한 것은 없다. 소설가 출신 정치인 김홍신(58).
8년간 ‘여의도의 장총찬’으로 정계를 휘젓던 그가 작년 총선에서 고배를 든 후 ‘뉴스에서 사라졌다’. 그새 김홍신은 그의 정신적 고향인 문학으로 회귀하고 있었다. 일부에선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고 했지만 “미련없다”며 훌훌 털 수 있었던 것도 회귀할 곳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최근의 김홍신은 발해에 빠져 있었다.
- “총선 실패후 더 바쁘다” -
20년 넘게 살고 있는 서울 서초동 단독주택에서 만난 김홍신은 여전히 분주해 보였다. 작업실로 쓰고 있는 2층 큰방은 3면이 책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이어진 책장이 각각의 벽면을 이루고 있었다. “책이 엄청 많은데요” 하고 말문을 여니 “2층에 있는 것만 1만여권 될 겁니다”라고 했다. 역시 그는 정치인이라기보다 소설가였다. ‘정치인 김홍신’은 작년 4월 총선에서 떨어지자 미련없이 ‘소설가 김홍신’으로 돌아왔다.
보통 국회의원들이 선거에서 떨어지면 할 일이 없다고 하지만 김홍신은 곧장 두문불출하며 글을 쓰겠다고 했다.
바로 발해 역사소설이다. 요즘 김홍신은 발해를 꿈꾸며 산다. 매일매일 파편처럼 흩어진 발해의 역사를 재건하고, 발해의 영토를 찾아나서고 ‘발해인’과 이야기를 나눈다. 책장 곳곳엔 ‘발해의 조직도’ ‘발해 지도’ 등이 붙어 있었다. 그중엔 ‘발해의 관직제도’란 것도 있었는데 그 자료는 그가 각종 자료에 흩어져 있는 것을 집약해 처음으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 “중국에서는 발해를 자기네 속국으로 여기고 있지만 발해는 엄청난 국토를 지닌 황제국가였어요. 최고지도자의 명칭이 왕, 대왕, 황상, 성민(聖民) 등으로 불렸으니 조공을 바치는 속국이 아니라 당당한 하나의 국가였지요.” 그의 책상 위에 놓인 우리말 큰사전 3권과 옥편 1권, 그리고 발해사 연구서가 여럿 눈에 띄었다. 북한에서 가져온 자료집을 비롯, 각종 역사 자료집을 두고 글을 쓰다 막히면 꺼내보고 또 확인하고 쓰는 작업을 반복하고 있었다. 발해에 푹 빠져 있는 그를 보니 ‘왜 그렇게 발해에 집착하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를 하다보니 국가와 민족이라는 걸 많이 떠올리게 돼요. 최근 몇년 전부터 중국은 소위 ‘동북공정’이라는, 중국 영토에 있는 과거 역사는 모두 중국의 것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을 보였잖아요. 그래서 고구려의 역사도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고… 이런 상황 속에서 만에 하나 북한이 붕괴된다면 중국화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들었어요. 게다가 발해는 자체 기록도 단 2건밖에 없어 중국이 역사를 편입하기 좋거든요. 이런 상황이니 우리 역사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 거지요.” 발해의 기록이라곤 3대문왕의 둘째 정혜공주와 넷째 정효공주의 무덤에서 발굴된 비문밖에 없다며 안타까워하는 그의 모습은 소설가라기보다 역사학자의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김홍신이 ‘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91년 경실련 상임 집행위원으로 활동할 당시 중국역사기행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그러다가 7~8년전 한창 정치 잘한다 소리를 들을 무렵 그의 정신적 스승인 법륜스님이 “발해 역사를 정리하는 것이 민족사에 남는 일이며 정치하는 것보다 낫다”며 역사소설을 쓸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그는 천주교 신자이지만 불교 공부도 해 가끔 법륜스님을 찾아뵙는다고 했다). 말하자면 여의도를 지키는 일보다 역사를 지키는 것이 훨씬 의미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아직도 컴퓨터보다 필사가 더 편하다는 그는 대학노트에 만년필로 빽빽하게 써나간 소설을 보여주며 대략 4권 분량은 썼다고 했다.
‘해동성국 발해’란 가제로 쓰고 있는 그의 작품은 내년 여름쯤 10권으로 발간할 예정이다. - 어머니에 배운 ‘소신’ - 고교때(공주고 1년을 다니고 논산 대건고교로 전학을 했다) 신학반에 들어가 한때 신부를 꿈꾸기도 했던 김홍신은 교내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는 등 문학청년으로 성장했다. 덕분에 신부도 되지 못했고 집에서 바라던 의사도 되지 못했다. 대학에 진학해서도 교내 문학상을 휩쓰는 등 ‘유명인사’로 떴지만 현실은 순탄하지 않았다. 대학 2학년때는 집안이 망해 휴학을 했다. 어머니가 계주를 했는데 계가 잘못돼 집 팔고 세간 팔고 해서 남의 돈을 메워줘야 했다. 그래도 그의 어머니는 언제나 당당하게 살아라고 했다. 어머니의 교육 탓인지 어디서나 기 죽지 않았다. 소위 할말은 하고 살아야 했다. 김홍신이 국회에 가서도 타협하지 않았던 것은 이런 성장 배경과 무관치 않다.
게다가 베스트셀러 작가로 ‘김홍신’이란 이름을 세상에 알린 ‘인간시장’은 가족사에 큰 상처를 남기며 정치적으로는 그를 단련시킨 계기가 되었다. “인간시장으로 부와 인기는 얻었지만 가족들은 공포에 떨었습니다. 거의 24시간 ‘정체 모를 곳’으로부터 오는 협박전화에 시달렸으니까요.” 79년 계엄때 콩트집 ‘도둑놈과 도둑님’이 군 모독죄로 걸려 기관에 불려다닌 이력이 있었던 김홍신은 그렇다치더라도 가족들의 충격은 엄청났다. “아내가 심장병을 얻은 것도 결국 밤낮없는 협박전화 때문이었지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한데다 천식까지 심한 사람을….” 그는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작년 4월 총선을 앞두고 한창 선거운동 중이던 3월 하순께 아내를 지병으로 잃은 아픔이 되살아나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김홍신은 이런 아픔이 있었기에 정치인으로 더 강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는지 모른다. ‘소신발언’은 정치인으로서 그의 브랜드였다. 그 당당함의 근원은 무엇일까. “처음 정계에 발을 디뎠을 때 딱 한번만 하자고 생각했어요. 오래 할 것 없다고 생각하니 원칙을 고수하게 되고 그게 의정활동의 밑거름이 된 거지요.” - “소설가는 내 운명” - 그 결과 국회의원 8년동안 의정활동 1위를 기록했다. 화려한 경력이다. 옛 무용담을 건드리며 슬쩍 물어보았다. “정치인의 길과 문인의 길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김홍신은 서슴없이 “소설가의 길이 나의 길”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정치는 짧게 하려고 했기 때문에 오히려 잘 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고 했다. 미련이 있었더라면 타협을 하게 되고 타협을 하게 되면 소위 말하는 ‘정치꾼’으로 전락했을 것이라고 했다. 2001년 한나라당 조사에서 서울시장 후보조사에서 인지도 1위, 인기도 3위에 오른 걸 언급하며 “차기 서울시장에 나설 생각은 없냐”고 또 물어보았다. 그는 지금은 오로지 발해만 생각할 뿐이라고 했다. “정당이나 시민단체 등에서 나서라고 적극적으로 권하면 어쩔 거냐”고 짓궂게 묻자 “분위기가 되면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 다만 내가 안달이 나서 적극적으로 나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히려 앞으로 글쓸 게 많다고 했다.
발해역사소설을 마치면 정치권 이야기를 다룬 ‘신인간시장’도 쓸 계획이며 이를 마치면 붓다(부처)에 대한 글도 쓰고 싶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자 그는 문밖까지 기자를 배웅했다. 조그마한 마당에 나무가 잘 가꿔져 있었다. “모두 직접 전지작업을 한 것이에요. 담벼락 나무 밑에 있는 건 취나물이고 봄에는 봄나물도 심어요. 고추는 화분에 심어도 잘 자라요.” 마당이 좋아 아파트로 이사하지 못한다는 김홍신은 그 순간 풀잎처럼 여려보였다. 〈인터뷰 이동형 매거진X부장〉〈사진 김정근기자 spark@kyunghyang.com〉 인터넷경향신문 (주)미디어칸(www.kh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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