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求道的 순회 공연을 마치며...(8)
이름 : 나그네인데
2009-05-11

몇 시간 눈 붙이고 4시 반 경 일어나니 주위는 어둡고 구석에 잠든 노부부도 인기척이 없다.<?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구석에서 주무신 노부부도 안 깬 이른 시간이라 소리 내기 뭐해 그냥 정좌를 하고 앉았다.

좋아하는 마루 바닥에 조용히 눈 감고 정좌를 하니 모든 것이 고요하고 잔잔하다.

 

30여분 조용히 앉았다가 5시 좀 넘어 1층 샤워장으로 가서 볼 일을 보고

2층으로 오니 노부부가 일어나 있어서 기억을 더듬어 어제 못다한 수첩 정리를 하였다.

수첩 정리를 어느 정도 마치고 20년 된 작은 배낭을 챙겨 1층으로 내려갔다.

 

가게문이 열려 있어 문 앞에 작은 배낭을 내려 놓고 노부부, 젊은 부부와 손짖 발짖

해 가며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였다.

6시 반이 되자 시내로 떠나는 첫 쏭테우가 가게 앞으로 보였다.

 

다시 한번 잠자리와 저녁식사에 대해 고맙다는 미얀마말로 쩨주베라고 인사를 하고

언제 다시 찾아 오겠다고 얘기를 하고 쏭테우에 올랐다.

중,고등학생들 여러명을 더 태우고 이틀 전에 지나쳐 왔던 난민촌 방향으로 향했다.

 

1시간을 인적 없는 아름다운 산길을 달려 난민촌 길가에 도착해 1500원 정도의 차비를 냈다.

이곳까지 오는 길이 단 1시간에 불과 하지만 거의 집들이 안보이고 군데군데 맑은 시냇물도

흐르고 울창한 나무들이 있어 캠핑 장소로는 그만이었다.

 

난민촌 길가에 내리니 보이는건 단지 길 왼쪽에 허름한 식당겸 상점이 하나 보이고

오른쪽으로 허름한 움막촌 같은 난민촌이 전부였다.

근처엔 태국인들이 사는 아무 민가도 보이지 않았다.

불법으로 넘어 오는 미얀마인들을 일단 돌려 보내고 여러가지 이유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런 외진 난민촌에 보낸다는데 국경지대를 땨라 10여군데에 15만명이 있다고 한다.

 

이 난민촌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아담한 규모로 움막 집들이 400여채 정도 있다고 한다.

쏭테우에 내려 오른쪽 부분이 전부 난민촌인데 쏭테우에서 내린 곳에 안쪽으로 들어 가는

작은 문이 있고 앞으로 좀 더 가서 오른쪽에 군인들이 지키는 정식 문이 있다.

 

정식 문으로 가서 군인들에게 얘기하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할까 봐 쏭테우에서 내렸던 곳에

아무도 지키지 않은 작은 문으로 허름한 배낭을 매고 쓰레빠를 끌고 어리버리하게 들어갔다.

태국 정부에서는 여러가지 이유로 이런 난민촌을 외국인들에 개방을 안하고 보여주기 상당히

꺼려한다.

 

이 난민촌에 온 것은 이 곳에 오기 전에 큰 배낭을 맞겼던 숙소가 있는 도시에서 매일 저녁에

시장쪽에 내 또래의 미얀마인이 하는 허름한 식당에서 35세의 게이를 만나서 얘기 중에

이 난민촌에서 산다고 들었고 식당주인도 전에 이곳에서 살았었고 2명의 남동생들은

현재도 이 난민촌에 있다고 해서 난민촌 구경도 하고 혹시나 만날 수 있나 하고 찾아왔다.

 

전에 35세 게이와 약속만 어긋나지 않았으면 같이 오토바이를 빌려 쉽게 이 난민촌에 오는건데

아무 약속도 없이 난민촌 집 주소도 없이 무작정 찾아 와서 과연 35세 게이를 만날 수 있을지

의문이었고 3일 전 쏭테우를 타고 올 때 차 안에서 만났던 미얀마 출신의 젊은 스님도

이 난민촌에 산다고 들었는데 다시 만났 수 있을지 궁금하였다.

 

일단 길가에 있는 군인들이 지키는 정식 문이 아닌 작은 문으로 들어가니

집들이 모두 비슷한 모습으로 대나무로 기둥으로 세운 간소한 움막 같은 자연적인 집들이었다.

한국의 작은 초가집을 연상하게 하고 전에 미얀마 깊은 오지 마을에 간 듯한 분위기었다.

 

조금 더 들어가니 무슬림이 운영하는 찻집이 보여 길가에 있는 낮은 목욕탕 의자 같은 의자에

앉았다. 벽에는 미얀마 현지에서는 꿈에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아웅산 수지의 대형 사진이 붙여

있고 테레비에는 소박한 옷 차림을 한 미얀마 가수들의 슬픈 노래들이 흘러 나왔다.

간단한 아침을 해결 할려고 찻집엔 허름한 차림의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미얀마에선 찻집이 단지 커피 같은 차만 파는 곳이 아니라 볶음밥, 국수등 간단한 식사도 가능한

곳이라 아침을 때울려고 먼저 150원정도인 비빔국수를 시켜 먹었으나 양이 차지 않아

150원짜리 볶음밥에 추가로 150원짜리 계란 후라이를 주문해서 먹었다.

미얀마 서민들이 먹는 볶음밥은 식용유에 단지 밥만 볶다가 간장이나 넣는 아주 소박한

음식이다.

 

노점 비슷한 찻집에서 싼 음식을 먹었으나 어렵게 살아가는 난민들과 어울리니 난민

비스무리하게 20여년간 외국으로 떠도는 준노숙자인 이 구질구질한 나그네도 동료를 만난 것

같아 마음이 편하다.

 

추가로 120원짜리 연유가 들어가 달달한 미얀마티를 시켜 마시고 비빔국수, 계란 후라이가

얻어진 볶음밥 그리고 미얀마티까지 마시고 600원 정도를 내고 나왔다.

 

미얀마 찻집에선 보기 힘든 아웅산 수지 사진도 있고 해서 사진 1장 찍으면 좋겠는데

분위기를 보니 혹시 여러 사람들이 있는데서 카메라를 꺼내면 외지인 혹은 외국인으로

알아 누군가 태국 군인들에게 신고 할지 몰라 사진을 찍질 못했다.

 

혹시 35세 게이를 만날 수 있을까 골목길을 걸어다니는데 번지 수도 모르고 찾는다는게

불가능하게 보였다. 움막 같은 집집마다 번호가 붙여 있는데 집 번호만 알고 왔어도

쉽게 찾을 수 있었는데 안타깝다.

 

계속된 길로 나가니 절벽 같은 산 아래에 넓은 축구장이 있고 젊은이들이 축구 시합을 하고

있었다. 이 난민촌에 오전 일찍 와서 오늘 안으로 숙소가 있는 도시로 나가면 되어서 시간은

널널한 편이었다.

잠시 서서 축구를 보다가 좀 쉴려고 아에 땅바닥에 주저 앉자 축구를 보았다.

 

 다시 일어나 길을 난 곳으로 다니면서 찾으러 다녔으나 골목길에 거의 비슷한 집들이 400여채라

찾는 걸 거의 포기 한 상태로 주위에 사람이 없으면 잠시 배낭에서 카메라를 꺼내 집들을 찍었다.

근 1시간을 돌아 다녔지만 소득이 없어 그냥 갈려고 쏭테우가 다니는 길가쪽으로 향했다.

 

 큰 길가에 다다르자 난민촌 나가기 직전 오른쪽에 아담한 미얀마 절이 있어 안쪽을 들여다

보았다. 마당에서는 스님이 공포 분위기 속에서 회초리를 들고 아이를 때리면서 무언가

가르치길래 며칠간 머리도 안 감은 꾀죄죄한 모습으로 안으로 들어가서 보니 아이들에게

자국의 말인 미얀마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카메라를 꺼내 수업중인 사진을 몇 장 찍고 다른 젊은 스님들과 얘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데

절 건물 안에서 그토록 찾던 35세 게이인 민민이 나오는게 아닌가.

먼 곳 까지 와서 못 만나고 그냥 가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우연히 만나니 얼마나 반가웠던지

모른다.

 

여기 젊은 스님들이 자기 친구들이고 이 곳에서 자신도 학생들에게 미국말을 가르친다고 한다.

민민이 나의 오래되고 걸레가 된 수건을 보고 새 수건을 하나 가져 와서 주는데 괜찮다고 사양을 했다.

민민에게 이틀 전에 이곳을 잠시 지나 도인마을을 갔던 얘기를 하고 난민촌 안에 구경도 하고

혹시나 너를 만날 수 있을까 하고 들렀다고 했다.

 

여기 젊은 스님들이 자기 친구들이고 이 곳에서 자신도 학생들에게 미국말을 가르친다고 한다.

민민이 나의 오래되고 걸레가 된 수건을 보고 새 수건을 하나 가져 와서 주는데 괜찮다고 사양을 했다.

민민에게 이틀 전에 이곳을 잠시 지나 도인마을을 갔던 얘기를 하고 난민촌 안에 구경도 하고

혹시나 너를 만날 수 있을까 하고 들렀다고 했다.

 

이 구질구질한 나그네는 왠만하면 낮에는 술을 하지 않는데 이 친구를 우연히 만났고

내가 해줄 수 있는건 그가 좋아하는 맥주를 사주는게 최고일 것 같았다.

우연히 만난 젊은 스님에게도 상점에 같이 가자고 권했으나 술을 마시는 줄 알고 사양을 했다.

 

난민촌 길 건너에 작은 상점에 가니 주인은 태국 여자이고 일하는 여자는 난민촌에 사는

뚱뚱한 인도계 여자로 일당 1500원을 받고 일한다니 1달 내내 일해도 5만원이 안되었다.

상점에서는 태국 쌀국수도 팔고 음료수 그리고 차가운 맥주등을 팔았다.

 

병 맥주를 시키니 뚱뚱한 인도계 여자가 얼음이 가득 든 유리잔 2개를 가져다 주었다.

민민과 그 동안 밀린 여러가지 얘기도 나누고 이 곳 난민촌에 대한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난민촌 안에서는 술을 못 팔게 해 술 마실려면 유일한 상점인 이곳 상점에 온다고 한다.

 

그리고 난민촌 안에는 이발소, vcd 대여점, 절, 교회 ,무슬림 사원, 상점, 학원등등 없는게 없고

4월에는 흥겨운 물축제도 하고 이곳에서 만난 사람끼리 결혼식도 한다고 한다.

난민촌 안에는 전기가 없어 기름을 넣고 발전기를 돌려 저녁 6시부터 9시까지 3시간만 전기를

주며 1가구당 1800원씩 낸다고 한다.

 

국제기구에서 이 난민촌에 보조를 해 주고 민민말로는 1인당 100불 정도로 아는데

자기들에게 돌아오는건 10불 정도 가치 밖에 안된다고 한다.

도와 주는건 1인당 쌀 하루 150g씩 1달 15k씩 준다는데 이들이 먹는 쌀을 보니

보통 쌀 크기의 3분의 1 정도로 최하의 품질의 찌꺼기 쌀이었다.

이외에 달달이 식용유를 주고 현금은 없다고 한다.

 

고국을 떠나 이런 구질구질한 최하의 난민촌에 살아도 고국에서 살 때 보다 편하고

서구의 나라로 이주를 할 수 있어서인지 희망을 갖고 살고 있었다.

재미 있는건 이 난민촌에 오래 전에 온 사람들은 20~30년씩 된 사람들로 난민촌 안에서

얼음,음료수 등으로 장사를 해 돈을 벌어서 서구 이주를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외국 가서

고생한다고 안가고 오히려 이 난민촌 안에서 돈벌이가 잘 되고 편하다고 이곳에서 계속 산다고

한다.

 

미얀마가 중국처럼 소수민족이 많아서 이 난민촌 안에도 미얀마 각지역에서 온

소수민족들이 있는데 심지어 중국계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난민촌에서 상권은 다수의 버마족을 제치고 무슬림들이 잡고 있다고 한다.

 

난민들은 돈이 필요하면 근처 도시 즉 내가 3000원을 주고 하룻밤을 묵었던 리조트가 있는

도시에 허가를 받아 가서 일을 할 수 있는데 7일간만 일이 가능하고 그 이상 있다가 걸리면

30일간 구류에 처해 진다고 한다.

 

민민도 곧 서구로 갈 예정이라며 가서 5년만 있다가 이 난민촌으로 다시 와서

이곳 난민촌을 돕고 싶다고 한다. 형은 미리 가 있고 이 친구도 형이 있는 곳으로 곧 갈 것 같다.

맥주를 3병째 마시면서 얘기하는데 민민이 나에게 원한다면 절에서 잘 수 있다고 하고

오늘 갈거면 차 끓어지기 전에 떠나는게 좋다고 한다.

 

일찍 헤어지기 뭐해 2대 정도 더 쏭테우를 보내면서 얘기하다가 삼각대를 꺼내 같이 사진을 찍고

다음 쏭테우가 올 때 까지 기다리면서 3병 맥주값 4000원을 계산하고 타고 갈 쏭테우를

기다렸다. 11시반 경 쏭테우가 오길래 다시 못 만날 것 같은 아쉬움에 민민과 볼 키스로 작별을

하니 주위에 있던 난민촌에 사는 여자 손님들과 태국 여주인은 연인 인줄 알고 함성을 지른다.

 

길가에 멈춰 나를 기다린 쏭테우에 뛰어 가서 타고 손을 흔들며 민민과 멀어졌다.

작은 쏭테우 안에는 옆에 소수민족 복장을 한 할머니도 있고 머리긴 도인 마을에서 사는

남자도 타고 있었다.

옆에 할머니가 전에 내가 맛있게 먹었던 콩을 먹고 있어 전 날 비상식량으로 몇 봉지 사둔

콩 1봉지를 할머니에게 주니 웃으면서 받는다.

 

나도 콩 1봉지를 뜯어서 먹는데 도인 마을에서 먹었던 그 맛이 아니다.

모양은 같은데 콩 겉에 찹쌀이 많이 묻혀 있어서 아마 다른 집에서 만든 것 같다.

자세히 보고 살 걸 같은 것인 줄 알고 샀는데 맛이 영 달랐다.

 

인적이 없고 나무가 우거진 산길을 달려 가다 소수민족 할머니네 일행이 내린다.

아마 이 근처에서 밭 농사 일을 하러 가는지 농사에 필요한 여러 연장도 같이 내렸다.

멀어져 가는 할머니를 보고 손을 흔드니 할머니도 손을 들어 따라 흔든다.

 

2시간 가까이 달려 그저께 3000원을 주고 잔 리조트가 있는 작은 터미널에 도착을 했다.

이곳에는 정기 버스는 없고 외진곳이라 쏭테우들이 전부인데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쏭테우

기사들은 작은 터미널에서 쏭테우 차안이나 야외에서 잠을 자고 아침 일찍 떠나곤 한다.

 

내려서 작은 터미널에 딸린 노점 비슷한 식당에서 점심으로 750원을 주고 고기,채소 계란을

넣은 볶음밥을 먹었다, 원래는 고기,채소를 볶고 계란 후라이를 해 맨밥 위에 올려 달라고

했으나 의사소통 문제로 볶음밥으로 나왔다.

간장에 잠긴 작고 매운 썰은 고추를 밥 위에 뿌리면서 아침에 이어 점심도 든든히 먹었다.

 

원래는 이곳에서 이틀 전에 3000원을 주고 묵었던 리조트에 다시 가서 하룻밤 더 자고

내일 떠나려 했으나 점심을 먹고 나니 쏭테우가 5분 뒤에 큰 배낭을 맞겼던 도시로 떠난다고

하고 무엇보다 이곳은 산속에 둘러싸여 경치등은 좋았으나 오르막 길도 많고 시장도 눈에

안 보이는등 다른면에서 부실해 그냥 앞에 보이는 쏭테우 짐을 싣는 지붕 위에 올라탔다.

 

쏭테우 안에는 나 이외에 50대인 미국 메인주에서 온 남자와 4명의 덴마크 젊은 여자

그리고 20살 정도의 노르웨이에서 온 키 큰 젊은이가 내가 있는 쏭테우 지붕 위로 올라왔다.

50대 미국인은 잠시 눈치로 얘기해 보니 큰 배낭을 맞긴 같은 숙소에 묵고 있어

자기는 조금 더 가서 내리니 나보고 미리 가면 숙소 주인에게 자기가 오늘 도착 할 것라고

전해 달란다.

 

쏭테우가 떠나기 전 올 때 중간 지점에 거대한 난민촌을 본 적이 있어 그곳에 서면

사진 좀 찍게 시간 좀 달라고 운전사에게 미리 부탁을 했다.

5분쯤 가서 큰 거리가 나오자 미국 메인주에서 온 50대는 차를 두두려 세우고 내렸다.

이곳에서 시내로 가는 같은 방향으로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고 올 모양이다.

 

토요타 픽업차는 속도를 무지 내면서 산길을 휘감아 돌면서 전 속력으로 달렸다.

쏭테우 위에 앉은 나와 노르웨이 젊은이는 차가 너무 빠르게 달려 머리를 바닥에 박기도 하고

머리를 들면 머리까락이 다 아플 정도로 위험하고 짜릿한 속력으로 달렸다.

 

토요타 픽업차는 속도를 무지 내면서 산길을 휘감아 돌면서 전 속력으로 달렸다.

쏭테우 위에 앉은 나와 노르웨이 젊은이는 차가 너무 빠르게 달려 머리를 바닥에 박기도 하고

머리를 들면 머리까락이 다 아플 정도로 위험하고 짜릿한 속력으로 달렸다.

 

검문을 위해 잠시 도요타 차의 쏭테우가 멈추자 태국 군인에게 여권을 보여주고

배낭에서 카메라를 꺼내 산 아래 거대한 난민촌 사진들을 찍었다.

쏭테우 운전사도 시간을 넉넉히 줄테니 천천히 찍으라고 해 나를 비롯한 다른 외국인들도

난민촌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오늘 오전에 갔던 난민촌은 외져서 외국인들이 안 오고 해서인지 그냥 들어가서

한바퀴 둘러볼 수 있었지만 이 곳은 2분 더 가면 휴게소도 있고 차량도 꽤 다니는 지역이고

거대한 난민촌이라 무장한 군인들과 군용차 같은 것도 보이고 경비가 삼엄해

밖에서 사진은 찍을 수 있지만 철조망 안으로 들어가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사진을 몇 장 더 찍고 다시 쏭테우를 타고 2분 정도 더 가니 휴게소가 나와 15여분 쉬었다.

차에서 기어 내려와 쉬고 있는데 쏭테우가 처음 출발할 때 보았던 미국 메인주에서 온

Bob이 트럭 하나 얻어 타고 온 모습이 보였다.

 

다시 쏭테우 지붕에 올라 타고 무슨 자동차 경주하듯 전속력으로 달리다 2번 정도 더

군인들의 검문이 있었고 2시간 정도 더 달려 종점인 숙소에서 가까운 터미널에 도착해

차비 3600원 정도를 내고 바로 옆인 숙소로 갔다.

 

학교 선생인 곱상한 중년의 여주인에게 미국인 Bob이 오늘 올 예정이라고 전해주고

오늘 싱구루 방값 120밧 (3600원) 을 내고 간소한 화장실이 딸린 깨끗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입었던 더러워진 윗도리와 반바지를 하이타이에 담궈 헹구고 모기가 많은 숙소 마당으로 나왔다.

 

마당에서 약간 통통하고 피부색이 좀 거무스름하고 트림을 자주 하는 40세 정도의 한 남자를

만났다. 내가 오늘 난민촌에서 오는 길이라고 하니 자신도 모레 이곳에서 북쪽으로 60km 떨어진

가장 큰 난민촌에 갈 예정이라고 해서 모레 아침에 같이 가기로 약속을 했다.

 

이 친구는 나이가 41세로 2000여명이 죽었다는 미얀마의 1988년에 있은 민주화 운동에

학생으로 가담했다가 체포될 것이 두려워 태국으로 탈출을 했다고 한다.

 

태국에서 7년을 홀로 불법으로 보내다가 캐나다와 관련된 곳에서 시험을 치러

극소수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캐다다 토론토로 이주를 했다고 한다.

 

10년을 넘게 캐나다에서 살면서 캐나다인이 되었고 미얀마에 있는 어머니와 형제들과는

그 동안 연락만 했지 캐나다 시민권이 있어도 정식으로 비행기를 타고 양곤으로 갔다가

체포될 것 같아 19년 동안 가족과 만나지를 못했다고 한다.

 

홀로 사는 80세의 어머니가 미얀마로 오면 체포되어 위험하다고 오지 말라고 말렸는데

더 늦으면 영영 보지 못할 것 같아 잡혀 죽는 한이 있어도 들어 간다고 하고

태국 이 곳을 거쳐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 가서 19년 만에 어머니를 만나고 20일 지내다

나왔다는 영화같은 파란만장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친구의 마지막 바램은 미얀마 남부에 있는 80세의 어머니와 가족등 10여명을 일단

태국, 인도, 말레이시아, 싱가폴 등으로 나오게 해서 캐나다로 데리고 가 같이 사는 것이라는데

비용이 2만불 정도 든다고 한다.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해 화학 관련쪽에 일할 때에는 1500불 정도 받고 2년 일하다가

건강상 이유로 더 이상 일을 못해 국가에서 주는 1000불 정도를 받아서 일 부분을 미얀마

가족들에게 보내면서 친구네 집에서 생활을 한다고 한다.

 

10여년을 캐나다에 살면서도 2만불을 없어 미얀마에 있는 가족들을 캐나다로 데려가는

시도를 못하는 것을 보니 안타까웠으나 조만간 다시 이 곳을 찾아 여러가지 방법으로

시도 할 예정인 것 같다.

 

10여명의 가족들을 일단 이웃 나라로 나오게 해서 비자등 여러가지 어려움을 언론사에 알려

캐다나의 신문사나 방송사에 도움을 요청 할 예정이라 한다.

 

 

 

처음 본 이 구질구질한 나그네에게 순회 공연중에 혹시 토론토에 들르면

 

직접 미얀마 음식을 요리해 대접하겠다는 이 친구의 소원이 하루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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