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求道的 순회 공연을 마치며...(7)
이름 : 나그네인데..
2009-04-23
지난 밤 집 앞 큰나무 아래에 얇은 돗자리를 깔고 오랜만에 별을 보며 노숙을 했다. 아침에 일어나 휴대용 후라시로 반바지에 넣어둔 오래된 세이코 시계를 꺼내 보니 5시다. 옆에 같이 잤던 34세인 이 집 아들은 5시인 이시간에 벌써 일어나 염주를 돌리며 도를 닦고 있었다. 후라시를 비쳐 주변에 버려진 마른 대나무를 주어 모닥불을 피우고 나도 옆에 정좌를 하고 눈을 감고 명상을 하면서 날이 밝기를 기둘렸다. 날이 밝아 주위를 둘러보니 이 집 앞쪽에는 논들이 있고 논 앞으로는 산들이 막고 있었고. 이 마을 대부분 사람들은 쌀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 하면서 소박하게 살고 있었다. 어제 저녁에 수돗가에서 대충 빨았던 더러워진 윗도리가 덜 말라 모닥불 옆에서 불을 쬐면서 말렸다. 7시쯤 되자 어제 저녁에 나를 근처 동굴로 안내 해 준 13살인 이 집 막내 아들이 와서 갈데가 있다고 해서 20년 가까이 사용한 오래된 작은 배낭을 챙겨 따라 나섰다. 얕은 언덕을 올라가서 오른쪽으로 꺾어지니 어제 처음 도착해서 경운기에서 내린 상점이 나온다. 이곳을 지나쳐 계속해서 걸어가니 아침 일찍 하얀 전통 옷을 입고 학교로 가는 학생들이 보였다. 가는 도중에 길가에 있는 허름한 집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가족들이 불을 쬐고 있길래 사진도 찍었고 조금 더 가니 20여명 정도 머리를 기른 젊은이들이 있는 서당 비슷한 곳에 도착을 했다. 여기에 오기 전에 둥그런 큰 짐승뼈 사이에 머리 긴 도인들이 앉아 있는 모습의 사진이 이곳이다. 사진에 보이던 모습은 아마 행사때 찍은거고 현재는 큰 2개의 짐승뼈는 조그만 창고 비슷한 건물에 보관되어 있다면서 문을 열어 보여주었는데 큰 동물뼈는 꼬끼리 뼈로 추정이 된다. 서당 비슷한 이곳에 머리 긴 젊고 어린 남자들과 긴 담뱃대를 문 선생님이 나를 호기심 있게 쳐다보았다. 어제 경운기를 타고  이 마을로 오는 도중에 2번 정도 쉴 때 다른 경운기에 타고 미리 온 사람들 중에 나를 유난히 갈구고 의심스럽게 쳐다 본 사람이 있었는데 오늘 보니 이곳 서당에 훈장이었다. 카메라를 꺼내 먼저 전체 사진을 찍고 작은 삼각대를 이용해 머리 긴 이들과 어울려 사진도 찍었다. 훈장도 옆으로 불러 독사진을 찍었고 안 쪽 건물 앞에서 여러명이 하얀 옷을 입고 마당을 쓸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 가도 되냐고 물으니 들어 올 수 없는 곳이라 해서 문쪽 가까운 곳으로 다들 불러서 사진을 찍고 같이 간 13세에게 부탁해 여러 머리긴 젊은이들과 웃으며 같이 사진을 찍었다. 잠시 주변 사진 몇 장 더 찍으니 더 이상 이곳에서 보여줄 것이 없어서인지 안내를 한 13세가 그만 가자고 해 머리 긴 젊은이와 훈장과 작별을 하고 어제 하룻밤 머물렀던 집쪽으로 향했다. 돌아 갈 때는 다른 길로 가서 올 때 보지 못했던 작은 건물의 분교 같은 학교가 나왔다. 도착해서 13세가 가만이 있으면 되는데 쓸데없이 이 학교 선생님 같은 뚱뚱한 사람에게 가서 뭐라고 하니 선생이 나를 위아래로 쪼개더니 따라오라고 해서 가 보니 학교 옆에 태국 군인 10여명이 있는 막사가 있었다. 이 곳이 미얀마 카렌 반군지역과 국경지대라 군인들이 학교 바로 옆 막사에서 지내고 있었다. 대장같은 한 군인이 나에게 여권을 보여 달라고 해 바지 주머니에서 꺼내 보여주니 이 곳은 태국지역이니 괜찮다고 하면서 자기들 식사 중이니 아침을 먹고 가라는거 괜찮다고 사양을 했다. 학교에 잠시 머무르면서 귀여운 어린이들을 보고 있는데 가까운 거리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다. 이 곳에 근무하는 태국 군인들은 내가 어제 경운기를 타고 왔던 미얀마 카렌지역으로는 통행을 못하기 때문에 필요한 물건을 받을때나 외지로 나갈 때 주로 헬리콥터를 이용하고 있었다. 지지난 밤에 3000원을 주고 묵었던 리조트가 있던 작은 도시에서 정기적으로 이곳으로 헬기가 다니는데 확실치는 않지만 일반인도 비용을 내면 이용 할 수 있는거 같았다. 개별적으로 군인들이 태국쪽 길로만 오토바이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길도 험하고 교통이 불편해 군인들에게는 주로 편리한 헬기가 주요 운송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돌아 오는 길에 어제 경운기에서 내렸던 곳 허름한 구멍가게에 들러 바카스 같은 음료 2개를 사서 1개를 13세에게 주고 집으로 향했다. 교통이 불편해서인지 가격이 시내보다 50% 더 비쌌다. 13세 이장집(?) 아들은 내가 자기네 언어를 모르는걸 알면서도 계속 자기네 언어로 얘기를 했다. 13세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태국말도 아니고 미얀마말도 아닌 좀 투박한 카렌말 같았다. 어제 묵었던 집에 도착하니 말쑥한 차림의 여러 손님들이 와 있었다. 일단 하루 묵게 해준 이장님(?) 에게 남은 바카스 비슷한 음료수를 드리고 손님으로 온 이들과 얘기해 보니 젊은 1명이 어린시절 이곳에서 살다가 지금은 방콕에서 사는데 친구를 데리고 온 것이다. 국경마을까지 차로 와서 국경에서 현지인 2명과 아침 일찍 떠나 4시간 걸려 이곳에 도착했다고 한다. 오는 길이 너무 험하고 힘들었던지 얼굴을 구기며 연신 고개를 좌우로 절래절래 흔든다. 나야 어제 다른 길로 성능 좋은 구보다 경운기를 타고 3시간 반 만에 이 곳에 도착해서 이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걸어서 이곳까지 왔는지는 알지 못했다. 이곳에서 살았던 젊은이는 내가 이런 오지에 왔다는게 믿어지지 않은지 내 모습을 여러장 찍었다. 이 마을에서 잠시 볼 일 보고 11시에 4명이 다시 왔던 국경으로 걸어 나가니 같이 나가자고 하고 내가 원한다면 방콕까지 타고 왔던 차로 태워 줄 수 있다고 한다. 같이 걸어 나가도 나는 다시 시내쪽으로 1시간 거리인 난민촌에 들려야 해 같이 나간다고 해도 난민촌까지는 같이 갈 수 있을거 같았다. 아침에 날 안내했던 13세인 이집 아들은 방콕에서 온 2명의 젊은이를 데리고 내가 좀 전에 갔다 왔던 서당(?)이 있는 관광지로 재방송을 해주러 다시 길을 떠났다. 방콕에서 온 2명은 11시에 돌아오니 기다리라고 해 같이 왔던 현지인 2명과 같이 이집에서 기다렸다. 시간이 남아 어제 기록하지 못한 하루 일과를 수첩에 기록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순회공연을 떠나면 항상 기록하는 습관이 있어 주로 늦은 저녁에 매일 2시간 가까이 기록을 한다. 지난 과거를 기록하는 일로 매일 2시간 정도씩 걸리지만 순회공연을 가게 되면 잠자는 시간을 줄여서라도 기록을 하고 저녁에 기록을 못하면 다음 날 일찍 일어나 기록을 하곤 한다. 약속한 시간인 11시가 되어도 방콕에서 온 2명과 13세 어린 가이드는 오지 않았다. 기다리던 현지인 2명은 멀리서 시계를 나에게 보이면서 약속 시간이 지났다는 표시를 했다. 이왕 기다린거 조금 더 기다리자고 얘기해 기다리다 12시가 되자 현지인 2명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듯이 일어나면서 나에게 같이 나갈거냐고 물었다. 11시까지 오겠다고 떠난 2명이 오지 않았고 언제 올지도 몰라 조금이라도 일찍 떠나는게 여러모로 좋을거 같아 작은 베낭을 메고 쓰레빠를 끌고 현지인 2명이 나가는데 묻어서 나갔다.. 주변의 허름하고 소박한 몇 집을 지나고 나니 한 길로만 뻗은 작은 오솔길만 보였다. 쓰레빠를 신고 카메라가 든 배낭을 매고 한 30분을 빠른 걸음으로 걸었을때 도저히 현지인 2명과 비슷한 속도를 낼 수 없었다. 같이 걷던 2명의 현지인에게 계속 쉬면서 걷자고 할 수 없어서 난 천천히 혼자 갈테니 먼저 가라고 하고 길 옆에 덮석 주저 앉아 비 오듯이 흐르는 땀을 닦았다. 30분 정도 걸어오는 동안 다른 샛길이 없고 한 길로만 난 오솔길이라 길 잃을 염려는 없을거 같았으나 초행길이고 안내인도 없고 동행하는 사람도 없고 민가도 거의 보이지 않아 한편으론 걱정도 되었다. 같이 걸어가던 2명의 현지인들의 빠른 걸음을 쫒아갈 수 없으니 찢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제 숲속 오솔길에 혼자 남았으니 될대로 대라는 식으로 흐르던 땀을 닦으며 어제 국경마을에서 산 4봉지중 마지막으로 남은 작은 봉지안의 콩을 물과 먹었는데 달달하고 고소한게 꿀맛이었다. 어제 낮에 국경지대 미얀마쪽에서 허름한 찻집에서 600원을 주고 밥과 반찬으로 닭조림을 먹을 후 어제 저녁과 오늘 아침 그리고 지금까지 제대로 된 식사를 못하고 비상식품으로 국경지대 구멍가게에서 산 작은 비닐 봉지 안에 든 콩 4봉지만으로 때웠다. 하얀콩에 찹쌀을 살짝 발라 튀겨서 성냥값만한 비닐봉지에 담아 촛불로 마무리한 아무 이름도 없는 가정표 과자로 1봉지에 150원 정도로 가게에 걸린 4봉지 전부를 사 요긴하게 비상식품으로 먹었다. 국경에 도착하면 몇 봉지 더 사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일어나 뚜벅뚜벅 국경을 향하여 걷기 시작하였다. 1시간을 넘게 오르막 내리막 길로 힘들게 걸었으나 사람들이 사는 민가는 보이지 않고 마침 맑은 시냇물이 보이길래 소금기로 범벅이 된 구겨진 얼굴을 씻고 프라스틱 물통에 마실 물을 가득 담고 정처없이 흐르는 물을 정신없이 보며 10여분간 쉬었다. 이렇게 힘든 길인줄 미리 알았으면 이장집(?)에서 6000원 정도면 오토바이로 나갈 수 있다고 하던거 같은데 그걸 타고 나가던가 아니면 아에 하루밤 더 자고 다음날 아침 일찍 6시경에 걸어 나가면 시간 여유도 있고 쉬엄쉬엄 걸어 아무리 늦어도 해 떨어지기 전에는 도착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국경에서 이곳까지 걸어서 4시간이라고 하는 건 가파른 오르막도 쉬지 않고 평지처럼 걸을때 시간이고 나처럼 쓰레빠를 끌고 쉬엄쉬엄 걷고 오르막에선 아에 퍼질러 지면 10시간도 더 걸리는 거리였다. 계속 걷다가 쉬다가 하면서 곰곰히 머리를 굴려보니 이렇게 걷다가는 오늘 해 떨어지기 전까지 도저히 국경에 도착할 수 없을 것 같아 일단 진도 나가는데 까지 쉬엄쉬엄 걷다가 해 떨어지기 전에 다행히 아무 민가라도 보이면 손짓 발짓으로 사정 얘기 해서 하룻밤 묵는 수 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제 국경에서 경운기를 얻어 타고 불법으로 위험한 미얀마 카렌 지역을 통과해 머리를 기른 도인들 마을을 가기 까지는 중간에서 20분 정도 쉬는거 포함해 3시간 반 정도 걸렸으나 비포장이지만 길이 완만하고 2차례 정도 오르막이 있어 짐칸에 같이 탄 사람과 내려서 경운기를 밀면서 도착했었다. 그러나 오늘 걸어 나가는 태국쪽 길은 경운기가 지나 갈 수 없는 좁은 오솔길이고 계속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도 나오고 쓰레빠를 끌고 배낭을 메고 걷는데 상당히 힘들어 걷는 시간 보다 쉬는 시간이 더 많이 걸렸고 오래 전에 백두산을 걸어 올라 갔을 때와 비슷하게 힘들었다. 다시 묵직한 수동 카메라가 든 베낭을 메고 30여분을 걸으니 처음으로 왼쪽 숲속으로 외딴 집 한채가 보였다. 집을 본 순간 반가웠으나 밝은 낮이라 지나치고 계속 국경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걸어 나가다 경치가 좋으면 배낭에서 카메라를 꺼내 인적 없는 아름다운 산촌 풍경을 담았다. 눈 앞에 가파른 산이 보여 여러차례 퍼질러 쉬면서 올라가니 7,8명 정도의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언덕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얼굴이 상당히 지치고 찌그러진 상태였으나 도착이 얼마 안 남아선지 일부는 거의 다 왔다는 밝은 표정을 지었다. 언덕을 내려 갈 때는 힘든줄 모르나 오르막만 나오면 힘들어 쉬는 시간이 많아 진도가 무척 더디었다. 얼굴엔 비오듯 땀이 흐르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아 계속 쉬지 않고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다시 한참을 완만한 평지를 걷고 있을 때 뒷쪽 멀리에서 반가운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걸어 가던 길을 멈추고 오토바이를 기다려 태워 달라고 손을 들었지만 야속하게도 그냥 지나갔다. 입에서 욕 나오는걸 꾹 참고 좀 더 걸어가니 멀리 움막 같은 외딴집이 보였다. 어두워 질 때 움막을 보았으면 오아시스 보듯 반갑겠지만 밝은 이 시간에는 하나도 반갑지도 않았다. 좀 전에 지나간 오토바이를 어떻해서라도 잡아 탔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계속 걸어가니 눈 앞에 다시 반갑지 않은 한숨만 나는 경사가 가파른 오르막이 기둘리고 있었다. 이제는 경사가 가파른 오르막만 보이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조금 몇 걸음 오르다 숨이 차고 힘들면 보통 5분,10분씩 주저앉아 쉬니 진도가 거의 나가지 않았다. 이장집(?)을 떠나서 콩알만 씹어 먹고 쫒빠지게 쓰레빠를 끌고 2시간 좀 더 걸었을 때 뒤에서 반가운 오토바이가 또 오고 있었다. 이 오토바이를 그냥 보내면 오늘은 꼼짝없이 산중 어느 움막집에 가서 하룻밤을 부탁해야 할 처량한 처지라 이 오토바이님을 그냥 보낼 드릴 수가 없었다. 오토바이님이 내 앞으로 올 때 손을 들고 더 이상 걸을 수 없으니 태워 달라고 부탁을 했다. 머리가 짧은거 보아서 아마 근무하는 군인이 사복을 입고 국경으로 나가는 길인거 같았다. 잠시 오토바이님 주인분께서 나를 위 아래로 찬찬히 관찰하시더니 다행히 뒤에 타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터질듯한 가쁜 숨을 쉬며 쫒빠지게 뚜벅뚜벅 걷다가 오토바이님 뒤에 타고 가니 날아갈 것만 같다. 한 30분을 신나게 달렸을때 처음 같이 떠났던 현지인 2명이 길가에서 얼굴을 구긴채 잠시 쉬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 중 한명은 나를 부러운듯 쳐다보고 있었고 선두가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신나게 달리다 경사가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오면 내가 탄 상태로는 올라 갈 수가 없어서 배낭만 오토바이에 태워 미리 보내고 나만 천천히 걸어서 언덕으로 올라 갈 때도 여러 번 있었다. 한 번은 경사 급한 오르막이 나와서 카메라가 든 배낭만 오토바이에 태워 오토바이만 미리 보냈는데 언덕위에서 당연히 지달려할 오토바이가 보이지 않아 혹시 배낭을 가지고 튀었나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어 미국말 큰소리로 할로 할로 라고 부르니 다행히 지달린다는 응답이 왔다. 카메라가 든 배낭을 보러 빨리 가야하는데 오토바이도 겨우 올라가는 너무 가파른 언덕길이라 쓰레빠를 끌고 한 번에 못 올라가고 몇 발자국 올라가다 쉬고를 여러차례 한 끝에 언덕 너머에서 기둘리는 오토바이를 다시 탈 수 있었다. 다시 30분 정도 산길을 달리니 좀 괜찮은 길이 나오고 여러이 모여있는 집들이 보였다. 거의 국경에 도착했을때 작은 구멍가게가 보이길래 오토바이를 멈추게 하고 바카스 비슷한 걸 2개를 사 하나씩 마시고 조금 더 달리니 반가운 국경 마을의 큰길에 도착을 했다. 갈증이 많이나 같이 상점으로 가 다른 음료수를 더 사 줄려고 하는데 괜찮다고 사양을 한다. 태워줘서 고맙다고 여러 번 인사를 하고 친절한 이름 모르는 젊은이와 작별을 했다. 상점에서 150원 정도 하는 과일 음료수를 2개를 마시면서 시계를 보니 3시를 가르킨다. 나이든 주인과 손짓발짓 하면서 얘기해보니 나가는 막차가 3시 30분에 있다고 한다. 음료 값을 치르고 어제 콩을 샀던 상점이 있는 국경 건물 있는 쪽으로 걸어가는데 무척 더웠다. 국경 있는 곳 허름한 상점에서 비상용으로 한봉지에 150원정도 하는 콩을 다시 4봉지를 사서 배낭에 넣고 그 동안 건너띤 식사를 할려고 옆집을 두리번 거렸다. 양배추를 넣은 비빔국수가 150원 정도라 한 그릇 때리고 더워서 얼음을 갈아 만든 빙수도 150원이라 이것도 시원하게 먹었는데 양이 차지 않아 옆집으로 눈을 돌려 보니 튀긴 작은 닭다리가 보이길래 얼마냐고 물어보니 1개에 150원이라 닭다리 한개 먹으니 이제야 살거 같았다. 앞에 기다리는 쏭테우에 가서 몇 시에 나가냐고 물어보니 3시 30분에 나가는데 지지난 밤에 묵었던 곳까지는 안 가고 1시간 거리인 난민촌까지만 간다고 한다. 이 쏭테우를 타고 난민촌에 가도 오늘 잠자리가 이 국경지대 보다 더 문제라 아에 이 국경마을에서 하룻밤 보내는게 나을 것 같았다. 쏭태우를 보내고 닭다리를 사 먹었던 곳에 가서 이 근처에 절이나 빈집이 있냐고 잠자는 흉내를 내니 좀 있으면 자기 가게 문닫으니 데려다 준다고 하는 것 같았다. 30여분을 기다려 문을 닫고 남편의 근사한 이스즈 픽업차를 타고 3분을 달려 그의 또다른 상점이 있는 집에 도착했다. 나는 어디 빈집이나 절로 데려다 주는 줄 알았는데 자기네 집에서 하룻밤 자라는 것이었다. 도착한 집은 1층엔 과자나 식품등을 파는 상점이고 2층으로 된 목조집인데 70이 넘은 여자의 부모님들과 어린아이 해서 5식구가 살고 있었다. 1층 구석에 있는 화장실이 있는 욕실에 가 미리 담아 놓은 물로 구석구석 씻고 상점 앞 의자에 앉아 이 집 70 넘은분과 손짓 발짓 해 가며 이야기를 하였다. 길 건너 이 집과 비슷한 크기의 목조 빈집이 있었는데 이분 말로 300만밧 정도 한다고 한다. 비록 집 옆으로 터가 좀 있었지만 300만밧이면 한국돈으로 1억으로 현재로는 싼 가격이 아니지만 장래에 이곳 국경이 정식 국경으로 되고 개발이 된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으리라 본다. 30세 정도인 이집 여주인이 좀 전에 나에게 미얀마 음식중에 뭘 좋아하냐고 물어 보길래 얼떨결에 어제 낮에 먹었던 닭조림이라고 얘기했더니 나갔다 오면서 손에는 닭 1마리가 들려 있었다. 날이 어두워 지기 시작해 가족들 사진이나 찍어 줄려고 다들 불러서 길가에서 사진을 찍었다. 저녁상이 차려졌다고 30세 정도의 여주인이 구질구질한 나그네를 불렀다. 집안으로 들어가 보니 구석 식탁에 나 혼자 먹으라고 새로 지은 밥과 닭조림등 여러 반찬이 준비 되었다. 비 가릴 잠자리만 생각했지 저녁까지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그것도 같이 먹는게 아니라 나 혼자를 위해 밥상을 차려줘서 혼자 먹기 미안해 같이 먹자고 하니 자기들은 나중에 먹는다고 해 그럼 73세 분과 같이 먹자고 여러번 청해 같이 미얀마 음식으로 저녁을 했다. 우리가 먹자 30세의 여주인과 남편과 그리고 어린아이가 테레비 앞 마루 바닥에 둘러앉아 수저도 없이 미얀마식으로 손으로 밥을 먹었다. 이러다 내일 아침 늦게 떠나면 아침까지 신세질 것 같아 내일 아침 난민촌으로 가는 첫 쏭테우가 몇 시에 있냐고 물으니 6시 30경에 있다고 한다. 저녁 시간에 겉에 나무문을 닫고 모두 1층 실내에서 테레비를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30세 정도의 남자 주인이 자기 가게 선반에 있는 캔맥주 1개를 들고와 마시라고 해 사양을 했다. 9시경이 되자 73세분이 2층에 잠자리를 마련했다고 해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 올라가니 내가 좋아하는 마루바닥에 한쪽 구석엔 노부부가 잘려고 마루바닥 위에 침대 메트레스만 있고 위에는 모기장이 처져있고 반대쪽엔 마루바닥 위에 비닐장판이 있고 이불이 깔려 있길래 이불 없이 그냥 바닥에서 자는게 편하다고 얘기를 했다. 밤이 깊어지자 집에 전기를 끄고 초와 후라시를 사용하라고 주길래 촛불만 키고 후라시는 내것을 사용한다고 하고 돌려주었다. 넓은 2층 마루방에 촛불을 사용하니 아늑하고 분위기 있어 좋았다. 내일 아침 6시 30분경에 있는 첫 차를 타고 난민촌으로 갈려면 일찍 자야 하는데 남의 집이고 옆에 사람들이 있어서 쉽게 눈이 감기지 않았다. 마루바닥에 베개를 베고 옆으로 누워 살아있는 불인 촛불이 타들어 가는 걸 보고 눈을 감았다. 30분 정도 흘렀을때 조용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73세분이 내가 자는지 안자는지 확인할려고 내 얼국에 후라시를 비추는게 느껴졌다. 잠이 안와 눈만 감고 있었는데 이럴때 괜히 눈을 떠 놀라게 할 것 같아 쥐 죽은듯이 가만히 있었다. 20여년을 구질구질한 모습으로 돌아다녔어도 이렇게 모르는 개인집에서 자 보기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어제 도인 마을에서도 집 안에서 자라는거 피해를 주는것 같고 오히려 노숙이 편할 것 같아 별을 보며 자는 노숙을 택했었다. 주로 1일 순회공연비를 10불을 잡고 동남아나 중국 그리고 중미로 다녀도 1일 평균 3불짜리나 비싸도 5불 이하 방에서 묵어서 지금까지 구지 남의 집에서 잘 일이 없었다. 주로 혼자 지내는 구질구질한 3불짜리 싱구루 방이 몸에 베어서 그런지 깨끗한 비싼방이나 낯선 이들과 여러이 자는 도미토리에선 오히려 내가 있을 곳이 아니어서인지 불편하다. 몇 년 전의 일이다. 태국에서 구질구질하게 순회공연을 하다가 공연이 길어져 공연비를 좀 보탤려고 일본으로 가는 왕복 400불정도 하는 가장 싼 인도 비행기를 타고 도쿄 근방에서 18일간 노동을 한 적이 있다. 지금까지 평생 노동이라고는 2달 정도 아르바이트 한 것이 전부이고 돈을 벌어 물질적으로 잘 살기보다는 자유롭고 구질구질한 청빈한 생활을 택한 구질구질한 나그네에게 일본에서 노동은 장난이 아니었다. 3일 일하니 중요한 허리가 나갈 것 같아 사장에게 더 이상 힘들어 못하고 방콕으로 가 하던 문화사업인 순회공연이나 계속 할거라고 얘기하니 쉬엄쉬엄 일하라고 해 겨우 18일을 채우고 온 적이 있다. 시간당 1000엔이라 일이 많을 때에는 17시간도 노동을 해서 18일을 일하고 2200불 정도 받은걸로 기억이 난다. 일이 쎄서인지 미친듯이 몇 인분의 밥을 먹었고 화장실 가는것도 눈치 보여 미안해 할 정도의 분위기였다. 18일 기간의 일이라 하루하루 빨리 18일이 되기를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모른다. 일이 끝난 다음날 전철을 타고 나리타 공항에 가서 방콕으로 가는 인도 항공 카운터에 가서 지달리는데 방콕을 경유해 봄베이(뭄바이) 까지 가는 비행기가 봄베이 일기가 안 좋은 관계로 오늘 못떠난다고 한다. 이 무슨 귀신 해바라기씨 까 먹는 소리인가. 하루 빨리 이곳 일본을 벗어나 방콕으로 가 싼 가격으로 여러가지 영양보충도 해야 하는데 낭패였다. 사실 이 구질구질한 나그네에게 가진것이라곤 널널한 시간 밖에 없는 사람이라 오늘 떠나나 내일 떠나나 아무 상관이 없었다. 오늘 무료로 묵을 수 있는 곳으로 버스를 타고 가니 공항 근처의 10여층 규모의 근사한 도큐호텔이었다. 호텔 카운터에 가서 나눠준 종이를 들고 쇼파에 가서 작성을 하고 도큐호텔 로고가 있는 볼펜 몇 자루를 기념으로 주머니에 넣고 카운터에 가니 싱글루방 열쇠를 주면서 무료 저녁 부페는 1층에 있고 내일 아침 무료 식사는 꼭대기층 레스트랑에서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열쇠를 받고 카운터에 호텔 가격표가 나온 종이를 보니 싱구루방 1박에 150불 정도였다. 오늘 방콕에 못간 것이 용서가 되는 순간이었다. 일단 방에 가서 구질구질한 짐보따리를 풀고 깨끗한 욕실에서 욕조에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우고 18일동안 고생한 허리를 지졌다. 머리도 샴푸로 2번 감고 드라이 기계로 머리를 빠삭하게 말리고 1층 부페 식당으로 갔다. 구석을 좋아하는 구질구질한 나그네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 여러 음식을 담아왔다. 음식을 먹는 중에 주위를 보니 이 구질구질한 나그네와 옷차림등이 다르고 주변이 너무 깨끗하고 많은 음식 있는 곳에 일하는 사람도 양복을 입고 서 있었다. 1접시를 먹고 양이 안차 다시 가서 1접시 수북히 담아 제자리로 오니 구석진 내 자리에 있어야 할 포크와 숟가락이 흔적없이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잠시 얼굴을 구기고 사라를 들고 구질구질하게 서 있으니 입구쪽에 양복 입고 일하는 중년 남자가 잽싸게 와서 식사가 끝난 줄 알고 치웠다고 사과를 하면서 포크와 수저를 다시 갖다 주었다. 식사 도중에 가끔 나를 쳐다 보는등 이런 불편한 레스트랑은 다시 올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접시를 들고 나가서 과일, 살라드, 아이스크림을 담아서 왔으나 이번에는 포크와 수저를 안치웠다. 이번에 다시 포크와 수저를 치웠으면 디집어질텐데 다행히 사용중인 연장들은 제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150불짜리 호텔이면 그만큼 편해야 하는데 이 구질구질한 나그네에겐 오히려 더 불편하였다. 이런데서 고상하게 식사를 하느니 이 구질구질한 나그네에게는 아에 노점 구루마에서 서서 먹던가 여고생이랑 같이 앉아 떡복기를 먹는 분식점이나 동네 구질구질한 짜장면집이 더 편하다. 이빠이 3접시를 먹고 방으로 와서 방안을 둘러 보니 동남아에서 주로 묵던 3불짜리랑 시설이 달랐다. 테레비 채널을 하나하나 돌려가며 혹시 뽀뽀하는게 나오는가 유심히 봤더니 유감스럽게 안나왔다. 3000엔(30000만원) 정도 하는 켑슐호텔에서도 뽀뽀하는 동물의 왕국이 잘도 나오던데 이 150불짜리 숙소는 이 구질구질한 나그네를 상당히 실망시켰다. 바지 주머니에 딸기잼을 좋아했었던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 얼굴이 있는 1000엔짜리 지폐와 100엔짜리 동전 몇 개가 있어 동전을 사용할려고 방문을 나가니 복도에 자판기가 보였다. 얼음은 무료로 담아 갈 수 있고 삿포로 캔맥주 1개에 500엔(5000원) 이나 하였다. 5000원이면 내일 가는 태국에선 캔맥주 10개를 살 수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안이 너무 깨끗해서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아 소파에 앉아 재미없는 테레비를 보면서 태국에서와 같이 컵에 얼음과 맥주를 넣고 그 흔한 안주도 없이 마셨다. 다음날 아침 일찍 호텔 꼭데기 층에 가서 전망이 좋은 창가에 앉아 일식으로 아침을 찌끄리고 대기중인 버스를 타고 다시 근방의 나리타 공항으로 갔다. 방콕으로 향하는 인도 뱅기를 타고 가는데 싸구려 뱅기라 그런지 식사도 부실하고 앉은 좌석이 버스 의자 흔들리듯이 고정도 안돼 불편했어도 어제 150불짜리 싱구루 방을 제공한 걸 생각하니 모든게 용서가 되었다. 20여년을 구질구질하게 순회공연을 다니다 보니 일본에서와 같이 기상관계로 평생 처음으로 150불짜리 호텔에 잔 경우도 있었고 중국에서는 장춘에서 비행기를 타고 연길로 가다가 일기 관계로 할빈공항에 가서 3원 가치의 곽밥 1개씩 주면서 쑈를 한 경우도 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깨끗한 150불짜리 호텔에 묵고 갖은 음식이 많은 호텔 부페 레스트랑이 그리 편하게 느끼지 못했던건 평생 구질구질한 3불짜리 숙소에 자고 노점이나 싸구려 식당의 이용이 몸에 베어서 일 것이다. 도인들이 산다는 마을에서 하룻밤 노숙을 허락하고 이불을 제공해준 이장집(?)과 2명의 아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아울러 어제 국경마을에서 처음 보는 구질구질한 나그네를 집으로 초대해 저녁식사와 잠자리를 마련해 준 이 집 가족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머리를 길게 하고 사는 도인 마을은 훗날 태국에 가서 시간이 많이 나면 다시 갈 것 같다. 도인 마을에서 찍은 사진과 국경마을에서 하룻밤 재워준 가족 사진을 전해줄겸 다시 가고 싶다. 이번 도인마을 공연은 불시에 가서 시간과 정보가 부족했고 전날 저녁에 도착해서 다음날 낮에 나와 거의 맛만 보고 나왔다. 다시 가게 되면 1인용 텐트를 준비해 오토바이를 타고 가서 동굴 앞 숲속 빈 집 마당에 텐트를 치고 나무가지를 주어 모닥불을 피어 밥도 해 먹고 선선한 동굴안에서 촛불을 키고 명상도 하고 낮에는 머리를 길게 하고 사는 도인집들을 일일이 찾아가 구질구질한 얼굴을 드리밀고 싶다. P.S  요즘은 2평 정도의 반 지하방이 편해서인지 도끼자루 썩는줄도 모르면서 시간이 지나간다.      12월 초에 와서 그 동안 한거라곤 3주 전에 싸구려 미용실에서 4개월만에 머리를 깍은 일,      반 지하방 안에서 미소국을 끓일 때 사용하는 부탄가스 사러 간 일, 1월달에 입기 시작한      분홍색 윗도리 내복 몇 일전에 빨은 일 등을 했을 뿐이다.      이 번달에는 12월 초에 반 지하 방에 와서 한 번도 안 한 2평 정도인 방 청소나 해야겠다.      위에 사진은 도인마을 서당(?)에서 찍은 사진으로      가운데 있는 담뱃대 물고 삐딱하게 앉아 있는 사람이 전 날 이 구질구질한 나그네를      유난히 갈구고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던 훈장이다.           아래 사진은 도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간소하고 소박한 집이다.      서당(?) 갈 때 길가 소박한 집의 가족들이 반갑게 환영해 주는데 시간이 없어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손만 흔들고 지나쳤다. 다음에 가면 사진도 전해주고 아이들에게 과자라도 나눠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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