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락없이 퍼왔는데 문제가 되면 자삭하겠읍니다.
중국 이웃들의 이야기
중국 최대 자선사이트 운영자의 감동스토리
2008/11/26 오후 12:51 | 중국 이웃들의 이야기
장런제. 노숙자, 넝마주이, 벽돌공장 막노동 등 밑바닥 생활 경험 후 중국 최대 자선 사이트 ‘감은중국(感恩中國)’을 설립. 이 사이트를 통해 현재까지 1150명의 노숙자, 장애인, 투병중인 어린이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넴. 40세 시한부 인생을 판정 받았으나, 앞으로 17년이나 더 불우이웃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다고 함. 이것이 ‘감은중국’ 설립자 장런제의 이야기이다.
베이징 북서쪽의 한 쓰레기장 같은 공터와 다리를 지나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면, 낡고 허름한 2층 벽돌건물이 하나 나온다. 이곳이 장씨가 운영하는 감은중국 사이트의 사무실이다.
중국 최대 민영 자선사이트의 사무실 치고는 허름하다
인터뷰 당일, 장씨는 몸이 안 좋았고, 쉬고 싶다는 말을 했으나 베이징대부속 제3병원에서 막 수술을 마친 두 어린이의 문병을 미루진 않았다.
그는 2005년 베이징에 와 헬스클럽 트레이너라는 비교적 괜찮은 직장을 얻었다.
그 후 그는 디지털 카메라를 구입하고, 베이징 거리 곳곳에 나앉은 노숙자와 걸인들을 찍고 다니기 시작했다.
장씨는 그들에게 몇 푼이라도 쥐어주고, 그들을 위해 옷을 마련했다. 그에게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자, 장씨는 휴가를 써가며 노숙자들을 도왔다.
그러나 직장에서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상사로부터 일에 전념하지 않을 거면 나가라는 말을 들었다.
장씨는 정말로 직장을 그만두고 홈페이지를 개설, ‘감은중국’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이 사이트에 불우이웃들의 사진을 올리고 그들의 사정을 상세히 알렸다. “인터넷은 미디어입니다.
수많은 소식을 인터넷에서 전할 수 있으니까요. 인터넷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사정을 알고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 제 바람이었습니다.”
사이트를 운영하며 그는 1인 다역을 수행했다. 혼자서 기자, 포토그래퍼, 에디터의 역할을 모두 수행하며 ‘감은중국’을 운영했다. 지금 그의 사이트는 중국 최대 규모의 자선 사이트가 되었다.
그는 돈을 아끼기 위해 자전거만을 이용한다. 베이징 시내라면 아무리 먼 거리라도 자전거만 탄다. 쉬지 않고 달린 탓에 자전거 수명이 남아나지 않아 지금 그가 타는 자전거가 벌써 5번째다.
그는 이 자전거와 ‘감은중국’이라 쓰여진 가방, 그리고 그 안의 오래된 디카를 가지고 베이징의 방방곡곡을 누빈다.
대부분의 시간을 자선에 쓰는 그는 생계를 위해 주말에만 일을 한다. 얼마 못 버는 만큼 최대한 아껴 쓴다.
사무실 임대료와 통신비가 100위안이고 인터넷은 다른 사람 인터넷선을 빌려 해결한다.
밥은 길에서 대충 때우거나 국수 따위로 해결한다. 식사를 제대로 하는 때는 친구나 인터뷰 하러 방문한 기자가 대접하는 때뿐이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그가 한 달 지출하는 비용은 겨우 300위안.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께는 방 세 칸짜리 넓은 아파트에 산다고 말해두었다고 한다.
그는 도움을 준 이들에게도 자신의 진짜 생활을 숨기고 있었다. 허름한 사무실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고맙다고 찾아오겠다는 사람도 절대 사무실에 오지 못하게 한다.
“제가 이런 허름한 곳에서 입을 옷도 먹을 것도 변변치 않은 걸 보면 그 사람들이 제 도움을 받으려 하겠습니까? 안되지요.”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겨울에 나름 따뜻하고 편하단다. 그러면서도 그는 집도 없이 거리에서 겨울을 나게 될 노숙자와 걸인들을 걱정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그는 밤 열한 시가 넘으면 옷을 한 짐 실은 자전거로 거리 구석구석을 누비며 노숙하는 노인들을 찾아 다닌다. 노숙자들이 얼어 죽지 않도록 밤마다 찾아 다니며 옷을 나눠준다.
새벽 서너 시 귀가한 후엔 인터넷에 접속해 ‘감은중국’ 사이트를 업데이트하는 것이 그의 일상이다.
장런제는 안후이의 작은 농촌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가 여덟 살 때 어머니가 길에서 주워온 포대기 속 신생아가 그의 여동생이 되었다. 장런제의 부모는 병을 앓고 있었던 아기를 고치기 위해 집안의 하나뿐인 소를 팔았다.
그러나 여동생은 세 살을 못 넘기고 세상을 떠났다. 아기가 죽고 3일 후, 작은 날벌레 한 마리가 어머니의 팔에 앉았는데, 어머니는 ‘우리 새끼 엄마 보러 왔구나’라며 우시더란다.
집안의 하나뿐인 재산을 팔아버린 부모님은 피를 팔아 장런제의 학비를 댔다.
어린 장씨는 벽돌공장에서 일하고 쓰레기를 주우러 다니며 푼돈을 모았다.
그러다 우한의 한 노인이 장런제를 후원해줘 그를 무술학교에 보내준다.
장런제는 노인 덕분에 그곳에서 싼다(중국의 무술격투기)를 배울 수 있었다. “제 평생의 한은 이름도 몰랐던 그분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아마도 이러한 기억들이 그가 자선활동에 그토록 열정을 바치는 이유일 것이다.
그가 자선사이트 운영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사지에 장애를 가진 어린 앵벌이 소녀였다.
시장통에서 소녀를 본 장런제는 언론의 관심을 요청하지만 아무런 주목도 받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직접 ‘감은중국’ 사이트를 만들어 이 소녀의 사진과 사연을 소개했다.
그러자 기적처럼 한 달 만에 자선단체의 후원을 받게 되고 수많은 네티즌의 기부행렬이 이어졌다.
이 소녀는 2005년 수술을 받아 이듬해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두 발로 걷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지난 2년 간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일화도 얘기해주었다. 2005년 12월 5일, 베이징의 수은주가 영하 9도를 가리키던 때이다.
한밤중 그는 길거리에 엎어져있는 할머니를 발견했는데 신발도 없어 비닐봉지로 발을 칭칭 감고 있었고, 발은 몇 번 동상에 걸렸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곪아 있었다.
그는 당장 할머니를 근처의 여관에 모셨다. 할머니는 도대체 며칠이나 물을 못 마신 건지 자신이 떠온 그 뜨거운 물을 정신 없이 벌컥벌컥 마셔대더란다.
이 뜨거운 물 한 잔으로 저 분의 차디찬 몸을 녹일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여관주인에게 빨리 국수 한 그릇만 삶아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후 할머니는 보호시설에 보내졌는데, 정신이 온전치 않았던 할머니는 장런제가 찾아갈 때마다 외손자라고 부르며 고향에 가자고 했다.
결국 각계의 도움으로 할머니의 고향과 주소를 알아내고, 할머니는 2006년 5월 드디어 고향에 돌아가 36세의 외아들과 상봉할 수 있었다. 4년 만에 실종되었던 어머니를 만난 아들은 평생 뵙지 못하는 줄 알았다며 무릎을 꿇고 통곡했다.
물론 그가 돕지 못한 안타까운 사연도 있다. 장런제는 2005년 길에서 구걸을 하는 모녀를 알게 되었고, 엄마와 함께 있던 7살 소녀가 심장병 말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이의 집안은 수술할 돈이 전혀 없기 때문에 하릴없이 도시로 와 구걸이라도 하며 수술비용을 마련하려 했던 것이다.
장런제는 수술비용 2만 위안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그러는 동안에도 소녀의 병은 하루하루 악화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유명 자선사업가가 강연차 베이징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장런제는, 기회다 싶어 그를 찾아가 울면서 도움을 구했다. 눈물의 호소 끝에 그는 강연자로부터 자선단체의 책임자 연락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수 차례 전화를 걸어 소녀의 위급함을 호소한 장런제는 ‘미친놈’ 소리를 들으며 수화기를 내려놓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병원에 찾아가 돈은 나중에 갚을 테니 먼저 수술을 해달라고 사정했지만, 비웃음만 산 채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던 그는 결국 한 자선단체의 후원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2006년 12월, 그는 다급하게 소녀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돈이 마련되었으니 베이징으로 와 수술을 받게 하자고 말한다.
그러나 맞은편에서 들려온 대답에 장런제는 한참을 멍하게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소녀는 바로 전날 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소녀는 죽기 전날까지도 ‘아저씨가 수술을 받게 해줄 것’이라며 그를 기다렸다고 한다.
장런제는 지금도 여전히 낡고 허름한 집에서 변변한 돈도 없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젊음이란 재산이 있다면 충분한 것 아니냐며 웃고는 다시 일에 열중했다.
출처 http://tieba.baidu.com/f?kz=276965233
감은중국 홈페이지 www.owec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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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r.blog.yahoo.com/jhkey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