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둔한 군주가 제위에 오를 때마다 믿는 구석이 있어 두려움을 모르던 황제의 친척과 외척들은 항상 위를 기만하고 아래를 능멸하며 나쁜 짓을 일삼았다. 그 결과 왕조에게 끊임없는 분란과 화를 가져왔고, 심지어 제왕 본인에게도 커다란 비극을 초래하였다. 또한 황제와 결탁한 환관들은 정직한 관리들을 제거하고 공개적으로 매관매직을 자행했다. 심지어 관직이 외상 매매도 가능하였는데, 임명된 후에는 배로 변제해야만 했기에 그들의 수탈이 얼마나 심했을지는 가히 짐작할 만하다. 여기에 더 많은 돈을 끌어 모으기 위해 각 지방의 관리들을 수시로 교체하는 방법까지 사용했다고 하니 계속해서 뇌물을 바칠 수 없는 관리들은 그만두어야 했다.
‘절약은 위대한 실천이 될 수 있고, 사치는 망국의 지름길이다. 황제가 만일 천명(天命)만을 의지해 왕조 창건의 고난과 검약을 소홀히 한 채 궐 담에 조각을 새겨 넣는 등 사치스러운 풍조를 따르고 그 족함을 모르게 되면 백성들은 임금의 덕은 보지 못한 채 노역의 소식만 듣게 된다. 이런 일이 계속 되면 필시 재난이 생기고, 재난이 생기면 환란이 발생하니, 환란의 와중에서 황제의 일신이 무사한 경우는 드문 법이다.《정관정요貞觀政要》’라는 이세민의 생각을 실천한 사람은 그 수많은 황제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였다.
《송사宋史》의 편찬인은 북송 멸망의 원인을 대하여 “휘종이 나라를 잃은 연유를 고찰해 보면 진나라의 사마충(司馬衷)처럼 우둔해서도 아니고, 오나라의 손호(孫皓)처럼 폭군이기 때문도 아니며, 또한 사마(司馬)씨가 위조(魏曹)의 왕위를 찬탈한 것처럼 자신의 잔꾀와 얕은 총명함만 믿고 충신을 배척하고 간신과 아첨꾼들만 가까이 했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신하 채경(蔡京)의 알량한 아첨에 현혹되어 사치스럽고 황음무도한 욕망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예부터 임금이 즐거움에 빠져 그 뜻을 잃고 욕망만 추구하면 망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진단했으니 실로 가슴에 와 닿는 지적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