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는 數千年의 舊怨을 풀어야 한다
수천년 압박민족의 피압박민족에 대한 謝過와, 피압박민족의 용서로 解寃해야
압박자 후손의 피압박자 후손에 대한 사죄
조기숙 청와대 전 홍보수석이 동학혁명의 마지막 격전지였던 공주 우금티에서 동학유족들을 만나 자신의 증조부인 고부(古阜) 군수 조병갑의 행적을 사과하였다고 한다. 그는 "몇 달간 아침마다 108배를 하며 동학혁명 과정에서 희생된 조상들의 영혼을 위로해 왔다"며 "한이 풀릴 때까지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또한 그는 유족들이 박수로 사과를 받아 들이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며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고 또 사죄의 의미로 유족들에게 큰 절을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동학혁명유족회는 "사과의 뜻을 밝힌 데 대해 고맙게 받아 들인다"며 "화해와 용서를 통해 새출발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화답했다.(오마이뉴스 보도)
신분제와 연좌제가 인정되지 않는 현대사회에서 죄없는 후손이 과연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의문은 갈수 있지만, 세상의 일이 현대사회에서 外皮的으로 인정하는 物的인 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생각할 때 조 전수석의 행위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한반도에 인간이 살게 된 이후로 수천년 동안 이 땅에 맺힌 무수한 원한들에 대한 解寃(해원)이 과연 局地的(국지적) 처방만으로 해결될 것인가는 懷疑(회의)가 갈 수밖에 없다. 동학혁명 이외의 다른 解寃거리를 몇몇 解寃한다 하여도 역시 부분적 처방에 그친다. 결국 총체적인 解寃만이 한반도 거주민족의 미래를 밝히는 길이다.
근세에 들어와 미국의 노예해방, 아프리카 아시아 각국의 독립, 가깝게는 남아공의 인종차별철폐에 이르기까지, 같은 인간이되 다른 종족끼리의 차별은 이제 거의 소멸단계에 와 있다. 그리고 이들 지배인종은 피지배인종에게 과거의 행위를 사죄하고 가능한 것은 보상하며 적어도 과거 피지배인종의 용서는 구하는 과정을 거쳐 화합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한반도의 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
그런데 한국에 있어서는 근세의 사건들에 관한 解寃만이 집요하게 논의되고 있을 뿐 보다 근본적인 것에 관해서는 度外視(도외시)되고 있었다. 한국전쟁, 일제지배 그리고 동학혁명의 이전에는 한반도는 과연 아무런 갈등 없이 평화로운 지역이었다는 것일까.
한반도 또한 외모의 차이가 크지 않아 구분이 덜 되었을 뿐이었지 지배민족과 피지배 민족의 갈등은 계속되어 왔던 것이다. 필자는 글을 다루는 자로서 우선 문자에 따른 그들의 정체성을 따져보려 한다.
이제까지의 한반도의 지배층이 우리말과 글을 등한시하고 ‘남의 글’인 한자를 좋아했다는 것은 國語史에서의 큰 시비거리였다. 우리말을 기록할 문자가 없어서 천오백년간 한자를 빌려 썼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러나 문자를 과연 우리조상이 빌려 썼다고 봐야할까. 자신들의 문자가 없어서 문자를 빌려 썼다는 설은 일본어교재의 日本語史소개편에도 나와 있었다. 아마도 이러한 표현은 일본에서 시작된 것인가 한다. 제국주의 전파시절 자기들을 하늘에서 떨어진 별도의 우월한 민족이라고 포장하려는 입장에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유의 문자를 만들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몽골도 문자가 있으며 중국소수민족 기타 세계 곳곳에도 자기민족 나름의 문자는 많다. 설령 고대 한반도인이 문자가 없어서 그 필요성을 느꼈다고 해도 나름대로 만들면 되지 언어도 다르고 '어려운' 한자를 처음부터 빌려 썼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결국 대륙에서 온 문명족이 한자를 쓰며 반도와 섬의 미개민족을 다스렸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필자는 최근 한 오랜 친구로부터, 자기조상은 중국에서 왔다는 말을 들었다. 여태 그가 화교였던 것을 몰랐나 하고 깜짝 놀랐지만 실은 집안의 족보가 수백년전 중국에서 건너온 시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족보의 시조가 고려 혹은 조선시대에 중국 등지에서 왔다고 서술된 문중은 한 둘이 아닐 것이다. 중근대 역사시대도 그러한데 고대 및 선사시대에는 어떠할까. 더 많은 사람들의 이주는 명백한 사실이다.
원시시절에는 대륙이 경쟁이 치열했기 때문에 강한종족이 살아남고 섬이나 반도등 외진 곳에는 경쟁이 없이 자라온 약한 종족이 살았다가 나중에 대륙출신이 점령하곤 한 것이 인류의 보편적인 역사이다. 한국인들은 반도에서 건너간 '늠름한' 침입자들이 섬에 가서 왜소한 일본원주민을 정복하고 지배했다는 말은 즐겨하지만 그보다 먼저 한국의 토종민을 대륙출신이 와서 지배했던 일에 대해서는 말하려 하지 않고 있다. 삼국시대고대국가의 체계가 성립되면서 한자를 쓰고 중국식의 왕명이 도입되었으며 근세까지 지배계급인 양반들은 한문을 공식으로 쓴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물론 이것은 당시의 토종인의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침략이며 탄압이다. 세계 곳곳의 문명은 각기 개성이 있으며 존중될 권리가 있다. 그러나 비교적 먼저 발달하여 힘을 더 가진 쪽에서 아직 힘을 덜 가진 쪽을 침략하여 그들 고유의 문명을 파괴 혹은 소멸시킨 사례는 너무도 많아왔다. 가장 크게 근세 서양문명의 세계지배를 탓할 것도 없이 고대 동양 대륙문명은 한반도의 고유문명을 유린하였던 것이다. 정복자들은 토착민들로 하여금 제대로 된 자신들의 글을 만들 기회도 천오백년간 앗아온 것이다. (반면에 미개한 토착민을 문명족이 와서 농사짓는 법 등을 가르치며 施惠(시혜)하였다고 볼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침략에 의한 가해와 그에 따라 쌓인 원한을 주제로 하는 것이므로 논외로 한다,)
만주, 몽골만이 우리와 가까운 민족일까.
근래 중국의 이른바 동북공정에 대항하고자 만주지방에서 비롯된 정권인 金(금)과 淸(청)을 한국사로 간주하자는 견해가 있었다. 현실성과는 무관하게 많은 한국인들은 정서적으로 동의할지 모른다.
만주지방은 지금은 중국당국의 뜻에 따라 동북지방으로 불린다. 근래 들어본 말에 따르면 동북지방 인구가 줄어든다고 한다. 물론 조선족동포나 일부생활권에 대해 말하는 것일 수 있지만 그것은 점차 자유화되어가는 오늘날의 중국에 있어서 충분히 타당성이 있으리라고 본다.
중국 동북지방은 일단 쌀쌀한 봄가을 날씨와 혹독히 추운 겨울이 연상된다. 넓은 땅을 이용해 농사짓는 목적이 아니라면 굳이 그런 곳에서 살고픈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이에 비해 한반도와 중국 河南(하남), 山東(산동)과 같은 ‘중원’ 들이야말로 사람을 너무 나태하지도 너무 모질게도 하지 않으면서 문화를 꽃피울 수 있는 천혜의 지방이라고 하겠다.
이렇듯 동북지방이 그다지 좋은 조건의 지방이 아닌데도 현재 충분히 많은 인구가 살게 된 것은 근세에 청, 일본 등이 이 지방을 차지하려고 인위적으로 이주를 시킨 것에 기인한다. 중세와 고대에는 그곳의 인구밀도가 현저히 낮았을 것임은 분명하다.
육로를 통한 移入(이입)이 상대적으로 용이하긴 하지만 인구분포를 감안해볼 때, 대륙출신 한국인의 조상은, 동북지방 출신도 있겠지만 때 '중원'출신도 많았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장으로 史料를 否定하는 한국의 史學者들
그러나 우리의 사학자들은 이상하게도 외지인의 한반도 도래를 육로만을 인정하고 있다. 三國史記(삼국사기)에 의하면 삼국의 건국순서는 신라, 고구려, 백제이다. 그런데 이것을 신라는 외진 곳에 있었으니 고구려 백제보다 나라가 일찍 건국될 리가 없다며 신라를 정통으로 삼으려는 後世人의 조작임에 분명하다고 일축하고 있다. (李瑄根 著 大韓國史 1권)
물론 만주지방을 통한 문명의 도래가 바다를 통한 도래보다 이를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가 그곳의 최초국가도 아니고 이미 고조선과 부여가 건국된 이후에 이루어진 국가인데 무조건 기록을 부정하고 고구려를 우선으로 삼으려는 것은 오히려 고구려를 정통으로 삼으려는 後世人의 조작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사학자들은 조선시대 우리가 만주의 유목민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으로 ‘소중화’를 자처한 것을, ‘같은 민족’을 멸시하고 중국본토만을 짝사랑했다며 마치 크나큰 오류라도 되는 양 비난한다. 이것도 오로지 북방육로를 통한 도래만을 인정하려는 편협한 사고방식에 근거한 것이다.
조상이 중원출신이든 만주 출신이든 지금의 한국인은 그저 한국인일 뿐이다. 마치 지금 중국의 일부인 만주족과 내몽고인은 중국인일 뿐이듯이. 우랄알타이어족 언어의 체계를 가졌다고 해서 우리가 몽골, 만주족과 동족이라고 확대해석하기도 하지만, 조선시대까지 지배계층의 문자언어는 ‘중원’과 공통되었으니 그것 또한 마찬가지라고 할 것이다. 엄청난 비중의 공통어휘(한자어)를 且置(차치)하고 단지 구어체계를 가지고 한반도를 몽골, 만주와 동일시하는 것은 일본극우파의 견해와 일치한다.
한국사학자들의 편협한 史觀(사관)은 남의 나라 역사에 대해서도 나타난다. 春秋時代(춘추시대) 周(주)나라 文王(문왕)의 伯父(백부)가 동생에게 王位(당시로는 天子)를 양보하고 남방으로 가서 吳(오)나라를 세웠다는 기록에 대해 한국의 사학자는 남방은 중원과 다른 蠻族(만족)인데 그것은 거짓말이라고 단언한다.(金慶洙 역주 帝王韻紀) 물론 필자가 중국의 吳가 있었던 부근인 浙江省(절강성)의 사람과 인터넷대화로 알아본 바로는 (사료를 부정하는) 그런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한국의 사학자들은 근세의 인종평등사상을 삼천년 전에까지 끌어다 붙이고 있는 것이다.
반란에서 승리한 한반도 土種民의 征服民後裔 탄압
이와 같이 한국민족이 오늘날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오게 된 것은 근세에 우리가 서양보다 국력이 뒤진 것에 대한 책임을 오로지 조상들의 잘못으로 돌려 과거의 봉건귀족은 모두가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며 몰아치는 것에 근거한다. 그동안의 지배층에 대한 불신으로 이제는 그들을 축출하자는, 수천년 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았던 한국토종인의 반란이다. 승리한 ‘토종반란군’은 이제까지 자신들을 지배해왔던 외래종족의 후손들에게, 조상들로부터 쓰던 언어와 글자를 외국어로 간주하여 사용을 억제하라는 ‘탄압’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영국에서 침입민족인 앵글로색슨족의 문화는 배제하고 토종 켈트족의 문화로만 영국문화를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 지방도 아닌 스칸다나비아에서의 이야기인 <베오울프>를 으뜸가는 고전으로 인정한다. 한반도 토종민의 후예들은 외래인의 후예들에게 옛부터 사용되어 정서를 공감하는 자신들의 언어와 문자를 되도록 사용하지 못하도록 각종의 직간접적인 사회적 규제로 억제하고 있다.
한국이 '토종반란군'의 뜻대로 한자를 안 쓰고 '순우리말찾기' 운동을 벌이면서 문화퇴보와 愚民化를 계속해나간다면 다시 경쟁력강한 '대륙출신'에 의한 점령의 역사가 되풀이 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정작 토종민 후예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경고도 그다지 두려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래도 좋다 차라리 수천년간 우리를 괴롭힌 너희들을 몰아내고 미국 혹은 현재의 중국인의 지배에 들어간다 해도 과거의 너희지배사회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傲氣(오기)에 찬 결의가 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가해당사자에 대한 증오가 있을 때 비록 자신은 나아질 것이 없다 하더라도 더 이상가해자에게 덕이 되는 일은 해주지 않으려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만약에 정복민과 토착민의 외모가 크게 달랐다면 외래족의 후예들에게 古來로부터 使用되어온 자신들의 언어와 문자를 쓰(用)지 못하도록 각종의 직간접적인 사회적 규제로 탄압하는 현실에 對하여, 인종차별 및 기본권침해의 문제로서 국가인권위원회에 陳情(진정)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일 것이다.
너무도 큰 정복민의 罪過
그러나 토착민의 쌓인 원한은 눈에 볼 수 없는 것이면서도 상당히 큰 것일 수 있다.
단적인 예로 환웅이 처음 삼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한반도를 지배하려 왔을 때 정복자들은 토착민들을 저들의 취향에 맞추려고, 마늘이 뭔지도 모르며 원시 채집생활만 하던 미개민족들에게 마늘이 건강에 좋다며 억지로 먹기를 강권하면서 熊족과 虎족중에 마늘을 잘 먹는 처녀를 첩으로 삼겠다며 충성경쟁을 시켰을 것이다. 그래서 두 종족의 가장 아름다운 처녀가 바쳐졌는데 점령군은 둘 중에 하나만을 간택하기로 했다. 토굴에서 마늘 먹기를 시험받으며 모진 고생 끝에 합격한 웅족 처녀는 그래도 왕에게 몸을 바쳐 사람으로 인정되어 자기종족을 구했겠지만 아마도 호족은 노예신분으로 격하되거나 몰살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원한 때문에 토종민족의 후예는 지금 반란에서 승리하여 이주정복민의 후예로 하여금 그들의 글자도 제대로 못쓰게 하는 언어정책으로 복수하고 있는 것이다.
오죽원한이 깊었으면 그랬을까. 지금에 이르러 필자는 한글전용의 수준낮은 문학으로 고급 예술인의 지위를 누리는 자들을 더 이상 증오하지 않는다. 수천년간 그들의 조상이 받은 멸시와 고초에 비한다면 오늘날의 보상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수천년 전에 침략자들에게 유린당했던 조상들의 문화를 오늘날 복원시키겠다는 그들의 의도는 때로는 嘉尙(가상)하기까지 하다. 다만 정복민의 조상이 썼던 문자도 문학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인데 그 길은 그들에게 용서를 비는 수밖에 없다.
화해와 용서만이 해원의 길이다.
우리는 복합적인 문화 속에 놓인 형편을 비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이 다양한 혼합으로 인한 시너지를 창출하는 기회가 될 수 있었다. 대륙에서 건너온 민족이 원주민을 정복하여 세워진 국가인 영국과 미국은 유럽대륙보다 더한 번영을 누리고 있다.
수천년 동안 토종민을 핍박한 과거의 업보를 앞으로도 계속 갚아나가야 한다면 실로 암담하기 그지없다. 결국 용서와 화해만이 있을 뿐이다. 그 칼자루는 과거의 피해자였던 토종민이 가지고 있다. 정복민의 후예는 진심으로 그들에게 사죄를 하고 용서를 빌어 화해를 하도록 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