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왕서방들, 국경지대서 나가"-중국 동북공정 경계
중국 보따리상 겨냥한 '소매시장 업무조직법' 공포… 중국 상인에 사실상 추방령
6자회담서 목소리 키우며 동북아 영향력 확대 모색하며 중국 동북공정도 '경계'
[주간한국]새해 들어 동북아에서 러시아의 발걸음 소리가 둔중해지고 있다.
러시아 연방정부는 물이 스며들 듯 시베리아로 넘어와 국경지대의 상권을 장악하기에 이른 중국인들에게 사실상의 추방령을 내렸다. 그런가 하면 6자회담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시베리아 지역의 중국인 보따리상들은 지난달부터 대규모 엑소더스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이는 지난해 11월 러시아 정부가 정부령 683호로 공포, 발효시킨 ‘소매시장 업무조직법’ 때문이다. 신화통신이 ‘외국인 근로자 고용제한 조치’로 표현하는 정부령은 2007년 1월 15일부터 4월 15일까지 노천시장과 가판대의 외국인 점포 비율을 40%로 줄이고 2008년까지는 아예 없애겠다는 내용이다. 또 2007년 1월부터 주류와 의약품 부문에서 외국인이 종사할 수 없도록 했다. 이번 조치는 명백히 중국인들을 겨냥한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시베리아 극동지역을 포함한 중·러 국경지대에는 소매상 100만 명이 종사하고 있으며 이 중 90% 이상이 중국인이다. 우선, 정식 상용비자나 노동허가를 받지 않은 불법입국자들이 보따리를 쌌지만 나머지 중국인 소매상들도 그 뒤를 따라야 할 상황이다.
금번 조치가 발효되기 직전까지만 해도 이 지역은 중국인들로 흥청댔다. 지난해 12월 15일 극동 러시아 최대 규모라는 연해주의 우스리스크시 재래시장을 방문한 한국 기자에게 한 고려인은 “시장 내 2,000여 점포 모두가 중국인 또는 중국인의 위임을 받아 운영되고 있다”며 “중국인들이 먹여 살려주고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시 외곽의 돼지농장도 상당수가 중국인 차지였으며 목재시장의 ‘큰손’ 역시 중국인이었다.
일부 국경서 상권 공동화 현상
하지만 정부령 반포 이후 상황은 일변했다. 중국 상인들이 한꺼번에 상점들을 내놓는 바람에 블라디보스토크의 상점 가격은 폭락에 폭락을 거듭했고 국경지대의 노천시장 115곳이 폐쇄됐다.
소매업에 종사하는 합법, 비합법 이주자들을 포함해 시베리아 지역에는 최대 250만 명의 중국인들이 들어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지역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은 분명하다. 러시아 정부는 중국의 동북3성과 국경 자유무역지대를 설립하여 불법적인 인구 유입은 통제하면서 경제 침체를 최대한 막아보자는 대안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이는 둑을 터드려 놓고 물이 남아 있기를 바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러시아의 이번 조치는 2차대전 이후 연합국이 축소된 독일 영토로 독일민족을 몰아넣었던 것을 연상시킨다. 2차대전 발발 원인이 체코의 주데텐란트, 폴란드의 단치히 자유시 등 독일 영토 밖 독일인 거주지 때문이라는 판단 아래 이런 조치를 취했다. 당시 언론들은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이래 최대의 민족이동이 단기간에 단행되었다고 표현했다. 게르만 민족 대이동은 로마를 멸망시키고 혼란을 가져왔지만 2차대전 이후의 민족 대이동은 유럽 내 추가 분쟁을 막은 것은 사실이다.
러시아 정부도 미래 분쟁의 예방차원에서 이런 조치를 취한 것으로 판단된다. 시베리아는 자원의 20%만 개발되었으며 나머지 80%는 아직 손조차 대지 않은 무진장한 자원 보고이다. 이 지역의 인구는 극히 적다. 러시아 연방 전 국토 가운데 3분의 1을 차지하는 시베리아에 거주하는 러시아인은 700만 명이다.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인 우랄산맥의 이동(印)쪽으로 범위를 넓혀도 전체 인구 중 7분의 1에 불과한 2,000만 명만 살고 있다. 옛 소련 시절에는 시베리아 지역의 인구 감소를 막기 위해 거주 이전에 제한을 두었으나 소련 붕괴 후 더 이상 강제조치를 취할 수 없어 지역의 인구는 날로 줄어들어 갔다.
러시아는 극동지역의 경제발전과 자원개발을 겨냥해 시베리아에 대한 중국인들의 유입을 눈감았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인해전술에 러시아는 경악했고 결국 심각한 후유증을 각오하고 비상조치를 단행한 것이다. 러시아 정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지난 10년간의 중국인 유입 추세가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2025년에 이르러서는 중국인들이 시베리아의 다수민족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때가 되면 자원의 보고 시베리아는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의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중국의 ‘동북공정’도 러시아의 위기의식을 가중시켰다. 중국은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규정, 한반도 북부에 대한 역사적 연고권을 주장하고 있다. 북한의 비상상황을 염두에 두고 1,300년 전까지 거슬러 간 중국을 보고 러시아는 등골이 서늘했을 것이다. 연해주는 150여 년까지만 해도 엄연한 청의 관할 하에 있던 중국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6자회담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도 중국인 추방조치와 연계시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러시아는 이번 2월 6자회담을 앞두고 수석대표를 알렉산데르 로슈코프 외무차관으로 교체했다. 로슈코프는 6자회담 초기 러시아 수석대표였으며 주일대사를 지낸 아시아통이다. 더군다나 그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특사로 2003년 1월 20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6시간 독대한 인물이다. 북핵과 관련한 김 위원장의 계산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인물이다. 확실히 그가 등장하면서 러시아의 목소리는 달라졌다.
전임 러시아 수석대표는 6자회담 취재진에게서 ‘대변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는 러시아가 방관자적 자세를 취했다는 방증이다. 그렇지만 로슈코프의 6자 테이블 복귀와 함께 러시아는 표변했다. 우선 북한이 핵포기를 한다면 80억 달러의 채무를 탕감하겠다고 밝혔다. ‘당근’만 제시하지 않았다. 로슈코프는 지난달 31일 북한이 핵실험을 반복할 경우 국제사회는 엄격한 제재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한반도의 어느 국가가 핵 보유국이 된다는 것은 러시아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이는 분명 '채찍‘이다.
북한 김계관 외무성 부상과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 간의 베를린 접촉 이후 6자회담은 해결 쪽으로 급물살을 타고 있다. 중국이 이번 6자회담에서 남북한과 미국과 중국 등 4자가 참여하는 ‘한반도 평화체제 실무그룹’ 설치를 제의한 것이나 미국과 남북한 정상 간의 회담이 있을 것이라는 보도는 중국과 미국이 핵문제 타결 이후를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는 시사다. 러시아가 목청을 높이는 것은 새로운 한반도 질서 형성과정에서 결코 소외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해석해야 한다.
푸틴 대통령이 2002년 8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김정일과 회담하면서 부산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모스크바, 유럽으로 이어지는 철로망 건설을 제안했다.
북한은 통행료 수입을, 한국은 에너지 안정적 공급을, 그리고 러시아는 태평양으로의 진출구를 확보함과 동시에 시베리아 개발을 위한 한국의 기술인력 및 투자를 확보할 수 있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이후 사태는 푸틴의 구상을 겨울잠에 빠뜨렸다. 북한이 ‘코르크 마개’ 역할을 하는 동안 중국인들의 소리 없는 인해전술이 개시되었다. 또한 후진타오 주석-원자바오 총리 체제가 역점을 두는 동북3성 진흥계획은 시베리아와 북한을 중국 동북 3성의 경제영향권에 포함시키려는 의도임이 명확해졌다.
상황이 이렇게 진행되자 푸틴은 동북아 신질서 형성의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 표현이 바로 중국인 추방과 6자회담의 발언권 확대로 나타났다.
공산중국의 대륙 석권에 충격을 받은 스탈린은 한반도에 친소 통일국가를 세워 중국을 견제하려는 계산 아래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했다. 물론 스탈린의 이 구상은 실패했다. 다만 중국을 미국과 적대화시켜 중국을 견제하려는 원래의 목표는 달성했다. 스탈린의 중국 견제 주술에서 중국이 풀려난 것은 한국전쟁 종결 20년을 한 해 앞둔 1972년이었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중국인은 번다‘라는 속담은 1950년대 한반도 질서형성과정과 놓고 볼 때는 ’중국인이 피 흘리고 이득은 곰이 챙겼다‘라는 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또다시 그것이 재연될까. 이제 중국과 미국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행보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재준 객원기자 중국문제 전문가 webmaster@chinawatch.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