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색 달라도…“쟤는 듬직한 우리 마을 식구”
[한겨레] 필리핀서 한국 온 지 16년
공장일 하던 고국 처녀와 딸 낳고 살다 지금은 생이별…
양지마을 제가 사는 집에서 100m 가량 떨어진 곳에 반지하의 자수공장이 있습니다. 한길로 난 작은 미닫이문을 열고 층계를 내려가면 자동식 자수기계에 달린 바늘 스무 개가 요란한 소리를 냅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초롱초롱 눈을 빛내면서 인사하는 이가 있습니다. 버나드 로카(가명·41). 필리핀 루손섬 동쪽 이사벨라 지역 출신입니다. 어쩌다가 로카는 머나먼 한국에, 그것도 이곳 가난한 양지마을까지 왔을까요? 21일 오후 그와 맥주잔을 기울였습니다.
로카는 1991년 11월, 26살 때 관광비자로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필리핀인 브로커에게 3만7000페소를 냈습니다. 우리 돈으로 얼추 70만원인데, 당시 물가로 치면 필리핀에서 사무직 노동자의 석 달치 월급입니다.
첫 직장인 인천의 한 바닥재공장에서 월급 30만원을 받으며 일했습니다. 여덟달째 일하던 어느날 필리핀 동료 한 명의 팔이 기계에 말려들어가 부러졌습니다. 사장은 병원에 데리고 가 치료를 해줬지만, 불법 이주노동자를 쓰는 게 드러날까봐 겁이 났던 그는 로카와 다른 필리핀 사람들을 모두 내보냈습니다. 로카도 겁이 나 ‘도망’쳤습니다.
그 뒤 서울 군자동 가죽점퍼공장에서 2년을 일했는데, 사장이 넉 달치 월급을 안 주기에 떠났습니다. 94년부터는 5년 동안 서울 용두동의 수첩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이곳에서 다섯 살 아래 마리를 만났습니다. 필리핀 민다나오섬 출신입니다. 같이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공장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 뒤로 경기 마석과 서울 종암동 등지를 떠돌며 잠깐씩 일을 하다가 98년 지금의 공장에 자리잡았습니다. 같은 해 10월 첫딸 체릴이 태어났습니다.
로카는 “다른 필리핀 친구들로부터 너무 멀어져” 이 동네가 싫었지만, 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꼬박 6년을 이곳 20평 공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같이 일하던 마리는 2003년 12월 둘째아이를 밴 채 필리핀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석 달 뒤 둘째딸 첼시를 낳았습니다.
로카는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하루 12시간을 혼자 일합니다. 무척 심심하다고 합니다. 일이 끝나도 공장에 딸린 3평짜리 방에 들어가 있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야근이 좋답니다. 세끼 밥도 혼자 해결합니다. 김치찌개를 끓이면 사흘을 먹고, 밥은 이틀에 한번씩 짓는데, 두번째 날이 되면 밥이 “꺼끌꺼끌해서” 맛이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버는 월급 140만원은 모두 부인에게 송금합니다. 필리핀에선 큰돈입니다. 초과근무 수당으로 나오는 40여만원이 로카의 생활비입니다. 한국에선 크지 않은 돈입니다. 이 가운데 20만원은 국제전화료입니다. “일주일에 서너 번, 한 번에 30분에서 한 시간씩” 통화를 합니다. 나머지 20만원으로 반찬을 사거나, 주말에 다른 필리핀 친구들과 어울립니다. 쌀은 공장의 조화자(67) 사장이 그냥 줍니다. 조 사장에게는 로카가 듬직한, 그리고 유일한 일꾼입니다.
인사성 밝고 성실하니 마을 주민들 모두 좋아해
로카도 이 마을이 편합니다
3년 전 심장마비로 외아들을 잃은 조 사장은 이제 로카가 아들 같다고 합니다. 조 사장은 “처음에는 말이 잘 안 통해 애먹었는데, 이제는 말도 잘한다”며 “애가 워낙 성실하고 착하다”고 말합니다. 6년 동안이나 이곳에서 일한 로카도 이제는 “이 마을이 편하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딸들을 볼 수 없다는 겁니다. 91년 이후로 한국 땅을 떠나본 적이 없는 로카는 아직 첼시의 얼굴을 못 봤습니다. 딸을 보러 가고 싶어도, 재입국이 힘들기에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의 방에는 부인과 두 딸의 사진이 곳곳에 붙어 있습니다. 첼시가 요즘 신장이 안 좋아 병원을 드나드는 것이 걱정입니다.
마을 사람들도 인사성 밝은 로카를 좋아합니다. 양지마을에서 구멍가게를 하는 양승희(60) 아주머니는 로카를 가리키며 “쟤는 거의 우리 마을 주민”이라고 말합니다. 양지마을은 피부색이 다를지라도 가난이라는 같은 짐을 짊어진 사람들을 따뜻하게 품어주고 있습니다. 이국 땅에서 외롭고 고된 노동의 나날을 보내는 로카도 그렇게 달동네의 주민이 된 것입니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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