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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당(黨)문화] 제1장 전통문화를 체계적으로 대체(4)

편집부  |  2020-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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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SOH 자료실]


제1장 전통문화를 체계적으로 대체


1. 무신론(無神論) 선전


2. 유물론 선전


3. 전통문화 부정


4.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마오의 위대함을 선전



4.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마오의 위대함을 선전


무신론과 유물론이라는 당문화의 양대(兩大) 이론기초를 확립한 후 전면적인 신전문화(神傳文化)에 대한 부정을 통해 당문화 체계는 곧 “만사가 구비되어 오직 동풍(東風)만 필요할 뿐이다.” 민중들의 신앙에 공백이 발생하자 공산당은 기어이 자신의 “신(神)”을 만들어 민중들의 사상 속에 주입시켜 이 공백을 메우려 했다. 바로 이러한 조신(造神 역주: 신격화)운동을 통해 공산당과 같은 이런 종류의 정교(政?)가 합일된 사교조직 체계는 전부 완성되었다. “신”을 그리고 마지막에 눈을 그려 넣은 후 천지(天地), 인성을 반대하는 당문화는 결국 살아 숨쉬기 시작하며 인간세상을 해치기 시작했다.


비록 중국 역사상에도 “황건적”, “태평천국”과 같은 부류의 정교합일 정권이 나타난 적은 있지만, 이런 정권들은 모두 중국을 통일하지 못했으며 더욱이 그들의 교리를 다른 조직에까지 보급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중공은 유일하게 전국 정권을 탈취하였고 아울러 폭력을 수단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교리인 “정교합일” 조직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였다. 그 교주는 바로 각 시기 중공의 최고 권력자였다. “위대한 수령 마오 주석” 다음에는 또 2년만 지탱한 “영명한 수령 화(華) 주석”이 있었다. 조신이란 어휘는 영원히 공산 사이비 종교의 교주를 수식하는 데 사용되어 왔다. 그러므로 대를 이어서 “혁명 지도자”가 된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마오쩌둥은 당연히 신격화되는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해방자” 혹은 “구세주”의 명예를 쓰고 신의 제단에 받들어졌다.


신은 전지전능하며 잘못을 범할 수 없다. 때문에 중공은 조신 과정 중에서 자신의 “위대하고 영광스러우며 정확한[偉大光榮正確]” 형상을 수립했다. 이 때문에 중공 최고 지도자가 만약 현직에 있다면 정말로 잘못을 인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권력 합법성의 출처가 바로 “일관되게 정확”하다는 것인데 일단 잘못을 인정하게 되면 곧 합법성의 상실을 조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사람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을 범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거짓을 퍼뜨리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방법이 아닐 수 없다.


조신 중에서 어떠한 초자연적인 존재라도 완전히 부정하는 다른 한 가지 방법은 바로 역사를 날조하는 것이다. 마오쩌둥을 예로 들자면 홍군의 제5차 반(反) 포위토벌이 실패한 후 이리저리 도처로 도망 다녔다. 이 실패와 도망을 공산당 교과서에서는 “북상항일(北上抗日)”로 선전하고 있다. 분명 “9.18 만주사변 후” 3개월에 마오쩌둥은 징강산(井岡山)에 “중화소비에트 공화국”이란 분열국가를 세웠으나, 시안사변(西安事變)이 발생했을 때는 도리어 “장제스를 압박하여 항일”에 참여하게 만든 영웅이 되었다. 이런 식의 역사날조는 마오쩌둥에게 “민족의 영웅”이란 영광을 주었다.


루산(廬山)회의에서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의 좌경모험주의와 과장에 도전했다. 공산당 지도자에 대한 이런 도전이 일단 성공하면 “조신운동”은 곧 실패하게 되며 앞서 서술한 것처럼 중공의 집권 합법성 문제가 직접 도전받게 된다. 때문에 마오쩌둥이나 저우언라이 등은 펑더화이에 대한 비판을 발동한 후 더욱 이지를 잃고 “약진”을 선전했으며 이는 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반까지 인류 역사상 최대의 기근을 직접적으로 초래하게 했다.


중공은 단지 문장을 통해서 뿐만이 아니라 연극, 영화, 가곡, 음악 등의 형식으로도 신격화를 계속했다. 어록가(語錄歌), 충자무(忠字舞)를 이용하고, 아침이면 (마오 주석에게) 교시를 청하고 저녁에 보고하는 방식으로 신을 만들었으며, 징을 치고 북을 울리면서 “최고지시”를 환영하면서 신을 만들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공은 여전히 “반복 학습”, “깊은 이해”, “실시 관철”, “착실히 수행”과 같은 유의 선전을 여전히 사용하면서 장쩌민이나 후진타오의 “중요 강화(講話)”를 대하고 있는데 사실은 현재 지도자에 대한 조신운동인 셈이다.


무신론의 보급은 19세기 진화론 학설(진화론의 오류에 대해서는 앞으로 뒷장에서 상세히 논술)에서 비롯되었다. 소위 “유물”은 정신적인 힘을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며 인류를 초월하는 일체 존재, 즉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신앙경전에서 유래한 도덕표준들은, 동양의 불교에서 말하는 선(善), 도가의 진(眞), 유가의 “극기(克己)”와 “조화를 귀하게 여기는 것[和?貴]”을 포함하고 서양의 모세 10계 등을 포함하여, 전부 의지할 곳을 잃어버렸다. 이에 도덕표준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변경시킬 수 있는 준칙으로 변해버렸다.


공산당사회 중에서 가치관과 도덕에 대한 해석권은 최고 통치자의 수중으로 들어갔으며 중공의 가치관에 저촉되는 세상의 모든 보편적인 도덕은 중공에 의해 쉽사리 사이비도덕, 봉건잔재, 자산계급 인성론 등 각종 모자가 씌워질 수 있다. 그런 후 중공은 스스로 도덕을 해석할 수 있는 고지에 서서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비판, 투쟁, 탄압을 진행한다.


기왕에 중공이 “위대하고 영광스러우며 정확”하다면 일체 “당(黨)문화”는 반드시 이런 “위대하고 영광스러우며 정확함”을 찬양해야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중공은 또 피의 빚[血債]이 산더미처럼 많고 극도로 사악한 사교(邪敎) 조직이다. 도덕의 좌표를 잃은 상황에서 공산 사당(邪黨)의 “위대하고 영광스러우며 정확함”을 찬양하는 문화가 사람들의 도덕에 어떠한 혼란을 조성하고 사회 기풍에 어떤 악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중공의 선전 속에서 마르크스는 혁명가, 철학자, 과학자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완벽한 사람이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1843년 귀족 처녀 예니(Jenny)는 25세의 마르크스에게 시집올 때 하녀 렌헌(Lenchen)을 데려왔다. “착취”에 대해 줄곧 극도로 혐오하고 미워하는 것처럼 가장해 온 마르크스는 자본가인 엥겔스가 “착취”해온 돈을 마음대로 썼으며, 무상으로 하녀의 노동을 점유했을 뿐만 아니라 강제로 그녀의 몸을 차지하여 1850년에는 사생아까지 낳았다.


당시 예니는 이 일로 인해 마르크스와 심하게 다퉜다. 그러자 마르크스는 오랜 친구이자 독신으로 있던 엥겔스에게 눈을 돌렸다. 그는 “공산주의자 동맹”의 명예를 위해 엥겔스에게 희생양이 될 것을 요구하면서 사생아를 엥겔스의 성을 따서 이름을 지었고 엥겔스는 아이를 한 노동자의 집에 입양시켰다. 말 못할 피해를 입은 엥겔스는 죽기 전에 후두암에 걸려 말을 할 수 없게 되자, 종이에 다음과 같이 썼다. “프레디(Freddy)는 마르크스의 아들이다. 투시가 그녀의 아버지를 이상화(理想化) 시켰다.” 여기서 프레디는 마르크스의 사생아이고 투시는 마르크스의 딸이다. 이 추문은 지금 이미 동부 독일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2004년 6월의 『유럽신경학 저널(The European Journal of Neurology)』에서 폭로한 바에 따르면, 3명의 이스라엘 의사들이 역사 자료를 참고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고 한다. 레닌은 1917년 10월 혁명을 지도하기 전에 이미 유럽에서 매독에 걸렸으며 이 때문에 1924에 사망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참고한 역사자료에는 유럽과 소련에서 레닌을 치료했던 의사의 기록과 레닌의 건강 상황 자료 및 연구자들에게 “정치선전”이라고 불리는 검시(檢屍)보고서를 포함한다. 연구자 중 한 사람인 정신과 의사 러너(Vladimir Lerner)는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당신이 레닌의 이름을 없애고, 그 증상을 전염병에 대해 잘 아는 신경학자에게 보여준다면 그는 “매독”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중공 당원들은 문화대혁명 이전에는 마치 모두 금욕주의자인 것 같았지만 마오쩌둥만 해도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한 부인만 셋이나 된다. 마오쩌둥은 양카이후이(楊開慧)가 죽지도 않았는데 허쯔전(賀子珍)에게 장가를 갔고, 허쯔전과 이혼도 하기 전에 바로 장칭(江靑)에게 새장가를 들었다. 1994년, 마오쩌둥 신변에서 22년간 근무했던 리즈쑤이(李志綏)는 『마오쩌둥 주치의 회고록』이란 책에서 마오쩌둥의 방탕하고 문란하기 그지없는 생활을 폭로했다. 책에서는 마오는 “언제나 여자를 노리개로 삼았다”라고 했으며, 많은 아름답고 젊은 여자들을 입궁시켜 “마치 식탁에 요리를 올리듯이 번갈아 가며 여자를 진상했다”고 언급했다.


마오쩌둥의 경호원은 마오가 대기근 기간에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인민들과 고생을 같이했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대기근은 이미 1959년에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오는 후난(湖南)성 위원회 서기 장핑화(張平化)에게 적수동(滴水洞) 행궁(行宮)을 건축하라고 지시했으며 이를 “203공정”이라고 불렀다. 1960년 하반기부터 공사에 착수하여 1962년까지, 총 건축면적 3638.62평방미터에 달하는 1, 2, 3호의 주 공사와 더불어 소산(韶山)에서 적수동까지 연결 도로를 동시에 준공하는데, 총 1억 위안을 소비했다. 만약 이 돈으로 식량을 구입했다면 후난성에서 대기근 3년 동안 적어도 150만 명이 굶어 죽는 일이 발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공산당 지도자의 방탕한 생활은 무절제한 욕망에 따른 방종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 권모술수와 냉혹함 그리고 거만하고 사치스러우며 음란하고 안일한 생활은 신앙의 단속, 도덕의 단속, 매스컴의 감시가 없었기 때문에 국가 권력을 이용하여 악을 행하게 했으며 그 결과는 극도의 재난(災難)성을 띠고 있었다. 게다가 저속하고 타락한 품성이 일으킨 시범 작용은 사회도덕을 급속히 아래로 끌어내렸다.


“조신(造神 신격화)”은 개인 독재의 기초가 되었다. 왜냐하면 신은 잘못을 범할 수 없기 때문에 공산당 지도자 역시 자연적으로 진리의 화신으로 가장해야 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오직 맹목적으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일언당(一言堂)”을 합리화했고 한 사람의 두뇌로 수억의 두뇌를 대신함으로써 재난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바로 시정할 방법이 없었다. 독립적인 사고는 위험한 일로 되어 버렸는데, 왜냐하면 중공이 싫어하는 그런 결론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세를 따르고 흐름 등에 따를 뿐 자신의 인생에서 스스로 주인이 되지 못했다. 모든 문제는 오로지 중공의 의지대로 움직이거나 조직에서 결정하기만 기다렸다.


조신”의 또 다른 결과는 바로 많은 사람들이 심하게 박해를 받을 때 여전히 “조직을 믿고 당을 믿는다”는 것이다. 신을 믿는 사람들은 박해를 받을 때 마음속의 신에게 기도를 드리며 신의 공정함에 희망을 기탁할 수 있다. 하지만 무신론자는 박해 받을 때 그들은 더 높은 도덕권위를 찾을 수 없기에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지게 된다. 이때 이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하여?”(당) 중앙은 좋으니, 조직에서 명확히 해결할 거야”라고 말한다.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이런 것도 중공이 자신을 신격화한 결과이다.


유신론자는 곤경에 처했을 때 기도를 하거나 심지어 사찰이나 도관(道觀)에 가서 향을 피우며 소원을 빌 수 있다. 무신론자는 갈 곳이 없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으면 조직을 찾아가는데” 당(黨)에서 문제를 해결해 주길 바란다. 하지만 오히려 당(黨)이야말로 문제를 만들어낸 진정한 장본인임을 모르고 있다.


중공은 정권을 탈취한 초기에 즉시 매체와 교육을 농단하였다. “일언당(一言堂)”의 방식으로 “무신론” 과 “유물론”을 주입했으며, 전통신앙에 대해서는 단속, 왜곡, 탄압을 진행했으며, 지식인들에 대해서는 사상개조를 진행에 왔고, 전통문화에 대해서는 여러 방면에서 먹칠하면서 “봉건(封建)”, “미신(迷信)”이라고 폄하하며 모조리 무너뜨렸다. 폭력기계를 지휘하여 당(黨)문화를 받아들이길 원하지 않는 출가인과 지식인들을 소멸해 버리거나 혹은 생활 내원을 단절시키는 방식으로 협박하여 굴복하게 만들었다. 또 개인을 숭배하는 “조신” 행동을 통해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빈 공간을 채웠다. 중공의 안중에서 어떤 문화를 인정하는 것은 결코 학술문제나 혹은 단순한 관점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문제이자 계급적 입장의 문제이다. 문화대혁명 후기에 이르러서는 당(黨)문화가 마침내 단련되고 성숙되어 중공이 희망하는 정도로 전통문화를 대신하기에 이르렀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듯이 신세대는 모두 당문화의 교육에서 자라나 정통(正統) 문화와 관념에 대해서는 무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 / (계속) / 에포크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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