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전통문화를 체계적으로 대체
1. 무신론(無神論) 선전
2. 유물론 선전
3. 전통문화 부정
4.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마오의 위대함을 선전
전 세계적으로 모든 고대문명과 문화는 다 신화에서 시작한다. 만물을 환화(幻化)시키는 인도 시바의 춤, 아테네 제우스 산의 여러 신들의 경이로움, 여호와의 일념(一念)으로 세계를 창조하고, 이집트 태양신 및 수많은 호법(護法), 중국의 반고(盤古)와 여와(女?)의 위대한 신화 등은 모두 이런 고대 문명들이 시작한 내원이다. 수천 년 동안 인류의 활동 역시 모두 신(神) 또는 하늘의 보호감독과 계시 하에 전개된 것이다.
중국인들은 자신의 고향을 신주(神州)라고 부르는데 신의 나라라는 뜻이다. 중국인들은 황제를 “천자(天子)”라고 불렀는데 이는 곧 하늘의 아들이란 뜻이다. 천단(天壇)은 황제가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 그 면적이 자금성보다도 4배나 크다. “하늘의 도를 살피고 하늘의 뜻을 따르며 모든 것이 그 속에 있다.”(觀天之道,執天之行,盡矣.) 이 말은 《황제음부경(?帝陰符經)》 서두에 나오는 말이다. 이는 곧 중화민족이 문자를 기록하기 시작할 때 처음 했던 말인 하늘의 도를 관찰하고 하늘의 뜻에 따라 하며 모든 도리가 그 속에 깡그리 포함되어 있다는 말과 같다. 중국인들은 비단 “하늘”을 숭배할 뿐만 아니라 또 “하늘” 중에서 그 가장 오래된 “노천야(老天?)”를 숭배하는데 이는 우주에 대한 중국인들의 존경심이다. 중국인들의 기억 속에 반고가 천지를 열고 여와가 사람을 만드는 데서부터, 신농(神農)이 백초(百草)를 맛보는 데까지, 신은 인류를 이끌고 홍몽(鴻?)을 개벽할 때의 어려운 세월을 지나왔다. 중화의 멀고 오래된 반신(半神)문화는 침구, 역경, 팔괘 등 문명을 남겼으며, 비록 몇 천 년이 흘러갔지만 오늘의 인류는 여전히 경탄만 할뿐 완전히 이해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다.
헌원황제(軒轅黃帝)가 신선 광성자(廣成子)에게 도를 묻고, 공자가 노자를 향해 도를 물은 이야기부터, 불법(佛法)이 동으로 전해질 시기가 되기까지, 유불도는 중국인들을 위해 덕을 중시하고 선을 행하는 문화의 내포를 다져주었으며 정통적인 신전문화(神傳文化)를 남겨주었다. 분명한 것은 중국의 전통문화 중에서 인간세상의 규칙 외에 또 “하늘”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세속을 초월한 세계에 대한 동경을 하고 있다. 중국인들이 말하는 겸손함의 진정한 내포는 바로 신에 대한 경외심이다. 심지어 나라에서 발생하는 어떠한 천재인화(天災人禍)도 모두 “천자” 자신의 문제와 관계가 있으며 그러므로 황제는 자신을 반성할 필요가 있으며 대사면을 하거나 혹은 목욕재계 하고 신과 하늘을 공경해야 한다.
그러나 지난 세기 공산주의가 인간세상을 어지럽히고 중공이 정권을 탈취한 후 공산당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중공은 전면적으로 중국의 신전문화를 훼멸시키는 폭력적인 운동을 펼쳤으며, 체계적으로 전통문화를 대체하고, 비자연적인 당문화 체계를 건립하기 시작했다. 그 대체과정에서 나타나는 계통적인 체현을 보면, 중공은 “무신론”으로 몇 천 년 동안 내려온 신에 대한 중국인들의 신앙을 단절시켜버렸고 또 공산당의 “유물론”을 세계와 역사를 인식하는 기본적인 방법으로 삼아 사람들에게 강제로 주입했으며 폭력과 투쟁을 위해 이론적인 지도를 찾았다. 동시에 공산당의 가치관으로 정화(精華)적인 것과 쓰레기, 선진적인 것과 열악한 것을 판단하고 전면적으로 중국의 정통적인 전통문화를 부정하여 민족 문화의 뿌리를 잃게 했다. 그런 후 “무신(無神), 유물(唯物), 문화의 뿌리가 없어진” 중국 인민들 앞에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마오쩌둥의 위대함을 선전했고 “신은 사람이 만들었다”는 이론을 크게 선전했다. 이러한 지경에 이르자 실천 중에서 변이된 이런 일련의 문화로 중국 인민들의 사상을 개조시킴과 동시에 하늘을 반대하고 땅을 반대하며 인성을 반대하는 당문화이론 체계가 확립되기 시작했다.
2. 유물론 선전
무신론은 당문화의 기초가 되어 신에 대한 사람들의 바른 믿음을 파괴했으며, 이는 중국공산당(중공)으로 하여금 제멋대로 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중공은 이보다 더 멀리 가려고 했다. 변증유물론과 역사유물론은 공산당의 세계관과 방법론이 되었으며 당문화의 또 다른 기초가 되었다. 유물론에 세뇌당한 중국 민중들이 보는 세계와 역사는 과거와는 이미 완전히 같지 않게 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론은 단지 아주 논쟁적인 일종의 철학유파에 불과했다. 출판업자 에드워드는 일찍이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초고를 아인슈타인에게 넘겨주어 의견을 발표하도록 했으며 이 초고를 인쇄할 필요가 있을지 문의를 한 적이 있다. 아인슈타인은 이 책을 보고 나서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에 대해 탐탁하지 않게 여겼으며 “만약 이 초고가 역사적인 인물로서 주목할 만한 저자의 손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나는 그것을 인쇄하지 말 것을 건의한다.” “왜냐하면 당대(當代) 물리학의 관점에서 말하든 아니면 물리학사(物理學史)의 각도에서 말하든 이 초고의 내용은 특별한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모두 들어맞는” “진리”로 여겼으며 교과서의 필수과목으로 자리 잡았고 매일 매일 그것을 언급하고 있다.
마르크스 변증유물론의 유물론과 전통적인 유물론은 또 같은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전통적 유물론은 오직 일종의 유심(唯心)적인 철학이라고 여겼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세계를 개조하는데 사용하기 위해 철학은 단지 탁상공론식으로만 세계를 인식할 것이 아니라 철학은 반드시 계급투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인정한다. 여기까지 이르러 이 유물론은 이미 간단한 철학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비단 소위 봉건사회부터 자본주의 사회를 거쳐 공산주의에 이르는 역사적 노정을 예측했으며 또 공산주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폭력혁명에 의거해야 한다고 하였다.
공산주의 이론이 나타났을 때 이상주의 색채로 가득했다. 인간 세상에서 “천당”을 건립하려는 이상(理想)은 뜨거운 피가 끓는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여 그 속에 가입하게 했는데 그 결과 붉은 재앙이 10여 개 나라에 퍼져 십 몇 억의 사람들이 노예가 되었고 일억이 넘는 사람들이 비명에 횡사했다. 폭력만으로 유지하는 정권은 오래갈 수 없다. 공산당은 “나쁜 일이란 나쁜 일은 다 하는” 동시에 또 “좋은 말이란 좋은 말은 다 해”야 했다. 즉 거짓말로 피비린내 나는 살육(殺戮)을 위한 모종의 “합리”적인 해석을 제공할 것이 필요했다. 이런 거짓말은 정밀한 공산주의 이론 포장을 거쳐 아주 아름답고 완벽하게 보인다. 그것은 살육을 위한 변호일 뿐만 아니라, 또 반드시 정치, 경제, 군사, 법률, 과학, 교육, 사회관리, 의료위생, 더 나아가 양로(養老) 및 가정생활 등 여러 방면에 대해 일련의 지도 및 통제 이론을 제출했고 역사에 대해서도 일련의 해석을 가했다. 다른 한 방면에서 중공은 또 사회 각종 업종, 각종 미세한 세포에 대해 전면적인 통제를 진행했다.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은 바로 공산당의 폭력혁명과 투쟁철학 등 구체적인 행동을 위한 이론적 지도를 제공하였다. 당문화(黨文化) “유물주의”의 최초 표현은 “폭력숭배주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볼 수 있다.
마르크스 : “물질역량은 오직 물질역량으로만 파괴할 수 있다.”
엥겔스 : “기관총, 대포가 가장 권위 있는 것이다.”
레닌 : “폭력은 100번 변론하는 것보다 더욱 효과적이다.” “국가는 계급압박의 도구이다.”
마오쩌둥 : “정권은 총 끝에서 나온다.”
린뱌오 : “정권이란 바로 탄압하는 권력으로 정권이 있으면 백만장자, 억만장자라도 하룻밤 사이에 때려눕힐 수 있다.”
현재 당문화의 “유물주의”에서 진일보로 파생된 “물질숭배주의”, “숭금(崇金)주의”, “향락주의”는 결국 오로지 이익만을 추구하는 “유리주의(唯利主義)”로 이끌게 된다. 이것들은 사람들을 진정으로 도덕이 추락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하고 있다. 당대(當代) 중국의 수많은 “지식인”들은 중공 폭력의 탄압과 돈으로 매수하는 정책 하에서 기어 다니고 있으며 철저한 “유리주의(唯利主義)”자가 되었다.
폭력과 금전을 신봉하는 중공은 신앙의 힘을 이해하지 못한다. 신앙 탄압에 대한 중공의 자신감 역시 “유물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유물주의는 도덕을 부정하는 작용을 하는데, 인류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도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소위 도덕이란 모두 어느 한 계급에 종속되는 것으로 중국에서 도덕의 의미를 결정하고 이를 서술하는 것은 자연히 모두 공산당이다. 도덕에 대한 중공의 변덕스런 작법은 보편적인 세상 도덕으로 하여금 정치운동 중에서 철저히 전복되게 하였다. “도덕 한 근에 몇 푼이나 하는가?”라는 말은 당문화가 교육해 낸 “유물주의자”들의 전형적인 사유논리이다.
유물주의는 생명에 대한 냉담과 무시를 가져왔다. 사람의 정신적인 요소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육체적인 요소만 인정하기에, 엥겔스는 생명이란 단지 단백질의 존재형식에 불과하다고 인식했다. 한 사람이 죽으면 단지 한 더미의 단백질이 존재형식을 변경한 것에 불과하며 그리 대단할 것이 없다고 여기는데 이는 공산당 살인의 중요한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유물주의는 직접적으로 양지(良知)의 작용을 부정한다. 신을 믿는 사람은 나쁜 짓을 한 후 모두 양심상 가책을 느끼게 되며 신명(神明)의 감독과 관찰, 인과응보가 있을까 봐 두려워한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은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마치 마오쩌둥이 “철저한 유물론자는 두려울 것이 없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만약 신이 없다면 인간을 징벌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세상의 폭력밖에 없다. 아울러 한 사람 혹은 조직 자체가 바로 인간 세상의 폭력을 장악하고 있다면 어떤 악한 일이든 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선악(善惡), 도덕 등 가치판단이 인류의 세속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신과 하늘의 뜻 그곳에서 박탈되었으며 도리어 완전히 세속권력의 일부분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또 세속권력의 타락과 명성의 추락에 따라 마지막에는 개인의 이익으로 선과 악과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가치관의 변화를 완성하였다.
당문화는 “물질이 의식을 결정”하고 “경제적인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경제발전은 필연적으로 정치 발전, 민주주의의 개선, 법제(法制)의 건전화, 도덕의 승화, 문화적인 번영 등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철저한 당문화의 “유물주의” 사유방식은 이미 우리가 직접 목격한 지난 몇십 년 동안의 개혁개방에 동반된 정치적인 부패, 독재의 횡행, 도덕의 타락, 문화적인 쇠락, 사법(司法)계통의 독재 도구화 등의 현상을 통해 거짓임이 철저히 입증되었다.
중공이 경제발전으로 자신을 변호할 때 늘 일종 진퇴양난의 곤경에 빠지곤 한다. 당신이 중국의 민주와 법제건설 부족, 신앙, 언론, 결사 등 기본적인 자유권이 국가의 폭력에 의해 잔혹하고 뻔뻔스럽게 박탈당하는 것을 비난할 때면 중공은 경제가 발달하지 못했고 교육수준이 낮으며 인민들의 자질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댄다.
그렇다면 정말로 이러한가?
“우리는 튼튼한 전함과 강력한 대포만으로 강대국이라고 볼 수 없다. 우리는 반드시 민주 자체를 하나의 힘으로 보아야 한다. 모든 재산, 모든 국방용 무기는 단지 민주와 함께 결합되어야만 비로소 진정 강대한 힘이 될 수 있다.”
“그들은 중국에서 민주 정치를 실현하는 것이 오늘의 일이 아니며 몇 년 뒤의 일로 간주하는데, 그들은 중국인민의 지식과 교육정도가 구미 자본가 계급 민주국가 정도로 제고된 후에야 다시 민주정치를 실현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바로 민주제도 아래에서 민중을 교육하고 훈련하기가 더 쉽다.”
위에 서술한 두 구절은 중공 기관지인 『신화(新華)일보』에 발표된 것이다. 단지 인쇄시점이 각각 1944년 3월 5일 과 1939년 2월 25일일 뿐이다. 이는 그때 국민당 정부의 전시 특별상태를 겨냥하여 진행한 비판이었다.
여기서 보다시피 중공은 정권을 탈취하기 전에 민중의 경제상황과 교육정도가 민주를 실현하는 장애가 된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지금은 오히려 경제상황과 교육정도가 전체적으로 항일(抗日)전쟁이나 국공(國共)내전 시기보다 월등히 좋은데 어떻게 도리어 장애로 될 수 있단 말인가?
더욱 풍자적 의미를 지닌 것은 “유물주의”를 높이 외치고 있는 중공 자체가 결코 “유물주의”가 아니라는 점이다. “물질이 의식을 결정한다”라고 이야기하는 중공은 이데올로기 선전부문을 농업부문보다도 더욱 중시해왔다. 유물주의 깃발 아래 중공은 재차 “유의지론(唯意志論 역주: 오직 의지만 있으면 다 된다는 의미.)”의 착오를 범했다. 즉 “사람이 대담해질수록 땅에서 산출되는 양도 많다”, “하루는 20년과 같다”, “공산주의로 달려 들어가자.” 등등이다. 펑더화이(彭德懷)는 이러한 구호들이 “과장되고”, “소자산계급의 열광”이며, 경제법칙과 과학법칙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여겼다가 마오쩌둥에게 “반당(反黨)집단”으로 몰려 공격받았다. 전국적으로 “우경 기회주의에 대한 반대”가 시작되었다. 결국 직접적으로 3천여만 명이 굶어죽는 대기황이 들었는데 이것은 실로 중공의 “유심(唯心)”의 결과였다.
1960년 린뱌오(林彪)는 “인적인 요소가 제일이고, 정치공작이 제일이며, 사상공작이 제일이고, 활동사상이 제일인바 이것이 우리 군의 정치사상 공작 방향이며 또한 전체 군대의 건설 방향이다.”라고 제기했다. “4개의 제일”이란 말을 꺼내는 자체가 바로 사상을 물질 위에 놓은 증거이니 이는 의심할 바 없이 바로 “유심주의”이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오히려 “누가 중국인에게 창조가 없다고 말하는가? 4개의 제일은 좋은데, 이것이 바로 창조다.”라고 치켜세웠다. 1964년 2월 1일 『인민일보』 사설 「전국적으로 모두 해방군을 따라 배워야 한다」는 글에서는 “해방군은 정치사상 공작을 크게 틀어쥐고, “4개의 제일” 원칙을 견지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해방군이 가는 곳마다 승리하는 원인이다.”라고 크게 선전했다.
지금까지도 중공은 여전히 “3개 대표”를 치켜세우면서 이 몇 십 글자를 “하나의 체계적인 과학을 형성했으며….” 이는 공산당의 “입당(立黨) 근본이자 집권 기초이며 힘의 원동력이다”라고 한다. 중공 중앙선전부 부장 류윈산(劉雲山)은 “반드시 “3개 대표”의 중요사상을 마음속 깊이 새길 수 있도록 큰 힘을 기울여야 하고 광대한 간부 군중들의 행동 지침으로 삼아야 하며 우리의 각 항목 공작에서 근본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심지어 모 농촌의 담벽에는 놀랍게도 “”3개 대표”로 우리의 도축작업을 지도하자”라는 큰 표어가 나붙었다.
“유물주의”거나 민주에 대한 논술이거나 간에 모두 공산당의 다른 하나의 큰 이론계통 중에 놓여있는데 이것이 바로 변증법(辨證法)이다. 변증법의 기능은 바로 어떻게 “백(白)”을 “흑(黑)”으로 이야기하는 가이다. 백마(白馬)는 말이 아니며 회백(灰白)은 백이 아니라는 식의 유희는 공산당의 언어계통 중에 충만 되어 있으며 또한 대다수 사람들에 의해 은연중에 받아들여졌다. 그러므로 절름발이 시장경제를 “사회주의시장경제”라고 부르며 중공의 독재통치를 “사회주의 민주”라고 부르며 독재는 “인민민주주의독재”가 되었고 인권침해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인권이론”이 되었다. 아무튼 접두사나 접미어를 더한 후 제 마음대로 원뜻의 정의를 고쳤다. “변증”을 거친 이런 종류의 황당한 개념들은 과거에 중국 대륙에서 범람했고 지금도 여전히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계속) / 에포크타임스
편집부
(ⓒ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soundofhope.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