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 보시라이 당적 박탈과 공직 추방 후 중공 상층부의 움직임이 잦아지고 있습니다.
중공 18대(18차 당대회)는 9대와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1969년 중공 9대는 파벌간 투쟁이 격렬하고, 전바오다오(珍宝島) 위기 후 두 파벌은 신속하게 통합하고 류샤오치(劉少奇)를 내쳤습니다. 지금의 18대도 비슷한 상황으로, 댜오위다오 문제로 서민의 불만을 돌리고 정변을 노리던 보시라이를 내쳐 당 내 표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보시라이 처분 결정 후 중공은 보시라이, 저우융캉 세력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명 인터넷 작가 라오룽(老榕)은 웨이보에 ‘각 부 위원회는 중앙의 소식을 통지해, 전원에게 태도 표명을 요구하고 있다’, ‘B(보시라이)와 관련된 사람은 15일까지 자수할 것, 이후는 청산을 불사한다’ 등의 글을 게재했습니다.
베이징에서 보시라이와 그 잔당에 대한 처리는 지난 3월부터 움직임이 있었고, 당시에는 군부에도 태도 표명을 요구했습니다. 3월 12일 후진타오 주석은 중공이 군대를 지휘한다는 정책을 견지할 것을 요구했고, ‘해방군보’는 3월 19일 ‘당이 총을 지휘한다’는 논평을 1면이 게재했습니다. 5월 해방군보는 다시 중공에 의한 군의 선도를 요구했습니다. 이 기간 중 각 군구에서는 후진타오를 지지한다는 태도 표명이 이뤄졌습니다.
그러나 보시라이와 그 잔당 처리는 5월에 멈췄습니다. 현재 나온 정보에 따르면 당시 중공 상무위원회 내부에서는 저우융캉이 실권을 잃고 18대 인사에 대한 추천권을 포기하면 보시라이와 그 잔당에 대한 처리는 하지 않는다는 협의 결과였습니다. 5월 이후 저우융캉과 쩡칭훙은 보시라이를 구하려는 농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또 시진핑 부주석이 2주일 정도 몸을 숨긴 것은 장쩌민파가 시진핑에게 보시라이에 대한 형사처벌 면제를 강요했기 때문에 시진핑이 권력교체를 거부했고, 이로 인해 상층부가 보시라이에 대한 엄격한 처벌에 동의했습니다. 이 정보는 설득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진핑이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왕리쥔에 대한 공판이 진행됐으며, 신화사 보도에서는 비난의 화살이 ‘충칭시 주요 책임자’ 보시라이를 향했기 때문입니다. 당황한 저우융캉은 직접 안후이성 허페이(合肥) 법원으로 가서 처벌에 반대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중공 내부의 보시라이와 그 잔당을 눈감아 준다는 협의는 이미 파기됐고 전원의 태도 표명이 다시 시작됐습니다. 보시라이 처분이 발표된 다음날 왕양이 주최한 광둥성 상무위원회에서는 ‘당 중앙의 보시라이에 대한 심사와 처분’을 단호하게 옹호하겠다고 표명했습니다.
이 때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충칭시 서기 장더장입니다. 보시라이와 분리하고자 한다면 18대 보고서를 수정해야 하며, 동작이 느리면 정치국 진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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