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 1989년 6월 3일 밤 10시 중국 인민해방군은 베이징 천안문(天安門) 광장을뒤덮은 100만명의 시위대에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탱크와 장갑차까지 동원한 무력 진압은 다음 날 새벽 4시까지 이어졌다. 진압을 끝낸 후 당시 중국정부는 천안문 광장에서 사망자가 한 명도 없다고 밝혔으며, 외신은 수천 명의 시민과 학생이 무력 진압에 의해 숨졌다고 발표했다. 처참한 ‘피의 일요일’로 만든 이 사건이 바로 ‘6·4 천안문 사건’이다.
시위는 4월 15일 후야오방(胡耀邦) 전 당총서기의 사망이 발단이었다. 젊은 학생들은 급진개혁론자였던 그가 보수파 원로들에 의해 축출된 후 쓸쓸히 숨지자 불같이 일어났다. 베이징대학을 중심으로 후야오방의 명예회복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점점 불어났다. 5월 15일 베이징을 방문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서기장 일행마저 창안(長安)가 뒷길로 돌아가게 만들 정도였다.
5월 20일 리펑(李鵬) 중국 총리는 결국 베이징 일대에 계엄을 선포한다. 하지만 시위대가 ‘부패타도’와 ‘정치개혁’을 부르짖고 천안문 광장에 높이 9m의 ‘민주의 여신상’을 세우면서까지 저항하자 덩샤오핑(鄧小平)은 이를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 발포 명령을 내리게 된다.
논란의 와중에서 당시 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은 시위대를 방문해 위로하는 등 동정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 화근이 되어 결국 실각했으며, 당시 상하이 서기로 천안문 민주화운동 탄압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장쩌민(江澤民) 정권이 새로 탄생했다. 이 과정은 2001년 미국에서 공표된 천안문 문서에 담겨 있으며 당시 미국과 유럽 등 서방 세계는 즉각 중국에 대한 제재조치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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