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 베이징에서 오랫동안 비즈니스 컨설팅을 하고 있는 ‘잃어버린 신중국’의 저자 에단 구트만은 지난 9월 12일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에서 열린 ‘중공에 의한 종교 신앙자와 정치 이견자에 대한 장기적출’이라는 주제의 공청회에서 증인으로 진술했습니다.
구트만은 지난해 12월 5일자 미 보수 정치 주간지 위클리 스탠더드(The Weekly Standard)에서도 중국의 장기적출 실태를 폭로했습니다. 다음은 그 전문입니다.
제4부 마약 단속관:정치범 처형장에서 대기하는 ‘장기적출용 특수차량’
1997년 2월 2일부터 바티아 셈시딘씨는 자신이 이름뿐인 경찰은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2년 전 그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이닝(伊寧)시 시청(西城)구 공안국 마약단속팀에 입대했다. 장신에 꽃미남인 그는 이 일자리에 어울렸다. 후에 자유를 얻기 위해 캐나다로 건너 간 그이지만, 당시 ‘나는 한족 협력자가 아니고 긴급사태 구원자다’라는 자신의 뜻을 그대로 기억했다.
몇 년 전부터, 헤로인이 이닝 지역에서 범람해 마치 중세의 전염병처럼 위구르의 젊은이들을 침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티아는 즉시 뭔가가 있음을 눈치챘다. 헤로인 밀수자는 당국에 의해 방임되어 있었고, 뒤에서는 당국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마약 단속관으로 채용했던 것도 함정이었다. 한족 상사는 그에게 마약 판매원을 단속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메쉬렙(Meshrep)을 조사하게 했다. 메쉬렙은 위구르족의 전통적인 모임으로, 건강한 생활양식, 스포츠, 민족음악과 춤을 활성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메쉬렙이 만약 헤로인의 침입을 저지한 한약처럼 유행한다면, 한족 통치자들은 이를 분명 정권에 대한 ‘특별한 위협’으로 볼 것이다.
1997년 1월초, 단식을 끝내는 라마단 새벽의 밤, 이닝시 경찰은 위구르족과 한족 경찰 전원에게 검사를 위해 권총을 반납하라고 명령했고, 약 1개월 후 권총은 반환됐다. 그러나 바티아의 권총은 반환되지 않았다. 담당 한족 경찰에게 물으니 문제가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언제 고칠 수 있냐는 질문에 담당자는 아무런 대답없이 갖고 있던 명단을 보더니 ‘가보라’고 말했다. 그 날 일을 마칠 무렵, 그는 한족 경찰의 총은 모두 반환됐고, 위구르족 경찰의 총은 모두 ‘문제’가 있어 반환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3일 후 바티아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2월 5일, 약 천명의 위구르인이 이닝시 중심부에 모였다. 그 전날 6명의 여성이 한족 당국에 체포되었다. 전원이 무슬림 교사이자 메쉬렙 참가자였다. 정보에 따르면 그들은 고문을 받았으며, 이 항의 시위에 모인 젊은 위구르인 남성들은 두꺼운 옷을 입지 않았다. 어떠한 무기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사전에 계획되었던 것인지는 모르나 한족 경관은 그들을 향해 발포했다.
이닝사건의 사상자수는 아직까지 불명확하다. 바티아의 기억으로는 경찰 내부 계산으로 약 400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그는 살해현장에 들어갈 수 없었다. 위구르인 경찰은 모두 ‘범인 고문’이라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현지 감옥에 파견됐기 때문이다. 사건의 전 과정에서 그들은 감옥에 갇혔다. 한편 바티아가 본 것은 많은 위구르인들이 감옥에서 들려나가 전라의 모습으로 눈 속에 방치된 모습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피를 흘리거나, 내장이 손상된 사람도 있었다. 또 이닝시의 주요 위구르인 진료소는 휴업명령을 받았고 한족 특수경찰이 10명의 의사를 체포하고 진료소의 구급차를 파괴했다. 4월말이 되자 체포자가 급증해 감옥은 이들을 다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매일 위구르인 정치범이 처형되기 시작했다. 4월 24일 그의 동료는 8명의 정치범 총살현장을 목격했다. 거기에는 ‘장기적출용 특수차량’과 의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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