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원시보 편집부에 4일, ‘중공군부 퇴역간부’라고 서명된 투고가 배달됐다. 투고에는 1949년 중국 허베이 의과대학(현 바이추언[白求恩] 의과대학)에서 중공군이 국민당 포로를 이용해 인체표본을 제작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소개하고 있다. 투서 원문은 다음과 같다.
※ ※ ※
1949년, 중공군이 타이위안(太源)시를 공락할 당시, 허베이 의과대학(당시 스자좡시 서부 병영이었음)의 정치위원 겅위구이(耿毓桂)는 대학에서 인체 표본을 제작하기 위해 타이위안 참전부대에 국민당 포로(일설에 의하면 200명)를 요청했다. 대학으로 이송되어 온 포로들은 모두 튼튼하고 건장한 청년들이었다.
어느 날, 겅위구이 등은 신체검사 명의로 포로들을 한사람 한사람 불러다 독극물을 주사해 살해했다. 그는 포로들이 죽자 시신들을 즉시 보이지 않게 숨겼다. 처음에는 작업이 순조로웠지만 어느날 한 포로가 불려간 사람들이 한 명도 돌아오지 않자 의심을 품고 도망쳤다. 그는 가까운 보리밭에 숨어 있었지만 결국 붙잡혀서 역시 살해당했다. 끌려온 포로들은 모두 인체표본으로 만들어졌다. 이 대학교는 이후에 톈진을 거쳐 창춘(長春)으로 이전했으며 수차례 이름을 고쳤다. 현재는 ‘바이추언 의과대학’(지린성 창춘)로 불리고 있으며 표본 역시 옮겨졌다.
공산당은 겉으로 포로 우대나 인도주의, 부상자 구조 등을 외쳤지만 실제로는 대량의 포로를 살해, 끔찍하게도 인체표본을 만들고 있었다. 당사자들도 자신들의 행위가 외부로 누설되면 파문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관계자들에게 비밀이 누설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시켰다. 그러나 1951년 ‘3반(反)운동’ 당시, 이 대학 사무장이 진압 대상이 되었으며 그는 고문을 참을 수 없어 상부에게 지난 모든 행위를 실토했다.
이후 사건의 심각성이 드러나자 겅위구이 등 주범들에게 총살형이 내려졌다. 겅위구이는 당황해 즉시 마오쩌둥에게 편지를 써서, “제가 마오쩌둥 주석을 따라 장정(長征)참가했으니 설사 큰 공로가 없다해도 수고한 것만은 사실입이다. 이 일은 당의 사업을 위해서 한 일입니다”라고 말하며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겅위구이는 결국 사형을 면하고 면직이라는 가벼운 판결을 받았으며 다른 관계자들도 당내 처분만 받고 본 사건은 마무리 됐다.
당시 허베이 의과대학(군부대 편제) 주요 책임자:
첸신중(錢信忠, 허베이군구 위생부장 겸 교장)
겅위구이(耿毓桂, 정치위원)
스슈즈(時修直, 부정치위원)
천치위안(陳淇園, 교육장)
캉커(康克, 교무청장)
츠푸위안(遲複元, 교무청부장)
對중국 단파방송 - SOH 희망지성
http://www.soundofho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