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열도에 없었다 일본의 비밀

일본의 비밀  |   2005-12-14 04:39:08
< 일본역사의 허구 - 날조된 일본역사 > 모든 역사서는 왜와 일본이 대륙의 남쪽 복건성 동야의 동쪽에 있었다고 쓰고 있으며,6c경 백제로부터 문자를 배우고 불교도 배웠다고 쓰고 있다. 또한 6c말 고구려왕이 국서를 보냈는데도 왜의 사관이나 대신들이 읽지 못했다고 한 것을 감안하면 왜가 삼국보다 일찍 통일되고 外國을 정벌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은 전혀 객관성을 유지할수 없다 < 서두에 > AD670년 이전 양자강 이남에 존재하였던 같은 동이족이었던 왜가 현재의 일본 역사로 둔갑된 이유가 무엇인가 ? 일본민족이 그토록 우리역사를 조작하여 본인들의 역사가 우리역사보다 높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 이는 우리역사가 밝혀지면 날조된 황국사관의 역사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날까 두려워 한 결과물이다 오늘 AD670년이전 왜는 양자강 이남에 있을 수 밖에 없는 역사적 진실과 한족에 의하여 지금의 대만으로 AD670년 왜가 쫒겨나면서 치욕의 역사를 잊기위해 변경한 일본이라는 국호가 어찌 지금의 일본국호가 되었는 가 ? 동이족의 역사를 반도로 밀어내기 위한 명나라와 그토록 상고사 조작을 원했던 지금의 일본민족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짐으로 인해 1403년 명나라는 일본이라는 국호를 지금 일본민족에게 부여하면서 그 엄청난 동이말살의 역사조작이 시작된다. "일본서기"라는 조작된 역사책으로부터 ~ ~ 조선사 편수회의 16년간의 결과물이 식민사학 ! 지금 그왜곡된 역사를 누가 가르키고 있는 가 ? 언제까지 이 왜곡된 역사를 후손들에게 남겨줄 것인가 ? 좀더 전문적인 내용은 아래에 별도로 전문가용으로 기록하였으니 참고바란다 ▣ 옛날일본(古日本:현재대만)과 현재일본(新日本:일본열도)은 지역이 다르다 670년 이전 일본(왜)은 중국대륙 양자강 이남에서 삼국과 같이 활동하였던 우리민족이며 현재의 일본은 옛날 동이족의 일부였던 왜의 역사를 빌어 짜 맞춘 가공의 역사에 불과하다. < 고일본 (왜) : 동이의 일부였던 우리민족으로 양자강 이남에 존재하다가 670년 현 대만으로 쫒겨나면서 일본으로 국호변경 > ▣ 고일본 추적 < 지 명 > : 대방, 회계, 담이, 주애 (양자강 이남에 실존, 고지도인 "우적도"에 실존) ☞ 자세한 것은 아래 지도 참조 담이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노자" -- 노자가 지금의 일본에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사람이 있는 가 ? 담이는 남월지에 살고 있는 사람(양자강 이남) 진시황이 신선초를 구하러 보낸곳이 회계(양자감 이남) < 풍 습 > : 단발문신(머리를 짧게하고 온몸에 문신(용)을 즐김) 아시아에서 문신습관은 "홍콩"이 제일 많음 왜가 국호를 670년 현재의 대만으로 쫒겨나면서 "일본"으로 개명한다 왜의 사람이 신라에 와서 현재의 "외무부장관" 직책을 수행한적도 있다 지금의 일본인이 대한민국에 와서 외무부 장관을 할 수 있는 가 ? < 신일본의 진실 (1403년 일본국호 최초사용) > 현재의 일본은 대륙의 유구했던 동이의 역사를 반도로 밀어내기위한 중국민족(지나족 : 명나라)과 역사를 새로 세우기를 바랬던 일본민족의 합작품이다 현재의 일본은 명나라부터 足利義滿(족리의만)이 1403년 日本國王(일본국왕)으로 인준을 받으면서 "일본"이란 국호를 사용하게 된다 신일본의 역사는 1403년부터 시작되었고 이전은 특별한 국호가 없는 겸창(鎌倉) - 대화주(大和)시대를 거치어 왔다 일식기록이 670년 이전에는 없고 이후에 나타난 것도 양자강 이남쪽으로 나타나며, 현 일본열도로 나타나는 것은 1100년 이후로써 실현율도 50%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실현율 50%라는 얘기는 반이 소설로 짜맞춘 역사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사실은 서울대 박창범 교수가 증빙하였다 < 일본서기의 허구 > 670년 "왜"에서 "일본"으로 국호를 변경한다고 되어있다 일본서기는 일본의 최고의 사서이다 그런데 이 일본서기는 670년 이전 왜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근데 어찌하여 그당시 있지도 않았던 국호 일본을 사용한 일본서기가 되었단 말인가 당연히 "왜" 서기가 되어야 할 것 아닌가 현재 일본민족은 ? 신일본은 현 일본지역에서 1403년 明으로부터 받은 국호이며 그이전은 대화주(大和州)로 있었다. 반도에서 BC196∼AD32년까지 낙랑국시절 건너간 사람은 "나라" 32∼503년 사이 고구려때 건너간 사람은 "고리" 503∼936년 사이 동신라에서 건너간 사람들은 "시라,서라" 4∼6세기 백제총독부(공주유역)의 축출에 의해서 건너간 사람은 百濟(맥제)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결론은 이러하다 > 원래 일본민족은 "왜"로써 670년 이전까지는 고구려, 백제, 신라와 함께 활동하던 같은 민족이었다. 그러나 차츰 지나족(중국민족)의 동이족 말살정책으로 인하여 그동안 국가적인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던 현재의 일본(대화주) 에게 명나라가 "일본"이라는 국호를 주면서 양자강 이남에 있었던 왜의 역사를 현재 일본에 주어버린다 그래서 일본민족은 우리역사의 진실이 밝혀지면 자기들의 역사가 송두리채 드러나기 때문에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황실도서관(또는 동경대 비밀도서관(?))에 일제시대 약탈해간 비서(비밀서적)들이 보관되어 있다한다. 찾을 수만 있다면 ~ ~ 1980년대 말에 일본에서는 웃지못할 해프닝이 있었다 "한국어는 일본민족이 지었다"라는 책이 나와 베스트셀러에 올랐는데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에 한글이 한면 그대로 실려있다 하여 자기들이 만든 글자라 주장했다 한다 또 한가지는 670년 이전 현재의 일본땅에서 양자강 이남까지 진출하여 양자강 이남을 현재의 일본이 다스렸다는 책이 나와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한다. 우리의 손자민족에 불과한 일본민족은 자기들이 조금이라도 우수하고 더오래된 역사를 가진 민족이라는 근거를 만들기 위해 지금도 역사조작에 혈안이 되어있다 우리는 무얼하는 가 ? 널려있는 단군관련 사서조차도 위서라 운운하며 곰새끼 타령이나 하고 있지 않은가 ? 도대체 어쩌자는 말인가 ? 앞에서 본인이 언급한 이러한 사실들을 모른다면 일본은 또 한번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워 동북아의 패권을 지려고 시도할 지도 모를 것이다 "네티젼들의 힘은 왜곡된 우리의 역사를 반드시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 전문가용 > ▣ AD 670년 이전 倭(위, 왜)는 弁韓의 일부이며 양자강 이남에 있었다 倭(위)는 본래 본音委 이고 同音으로 衛이다 - < 서 언 > 우리 민족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倭(위)의 역사를 論하지 않는 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倭는 BC 50년부터 AD 500년까지 新羅와 가장 활발한 교섭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 따로 위따로 연구를 하고 있으며 倭의 연구는 현 일본의 연구과제 인 것처럼 믿어버리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도 한족의 正史도 倭(위)와 新羅는 같은 민족이며 같은 지역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1. 담이는 倭의 일부이고 朝鮮의 일부였는데 南越 즉 廣東省에 있었다. 담이는 韓의 일부이고 倭의 일부이고 廣東省에 있었다. 담이의 기록은 倭(위)의 기록속에 있다. < 문헌별 기록 > 삼국지 동이전 : 會稽 朱崖 會稽東治之東 담이가 함께 있으며 이모두 帶方의 동남쪽에 있다. (帶方 石門...河北省에 있다.) 후한서 : 會稽東冶之東 會稽東冶縣 朱崖 移住 단洲 蓬萊가 담이와 함께 기록되었다. 양 서 : 會稽之東 朱崖와 함께 담이가 기록되어 있고 帶方至倭가 기록하고 있다. 북 사 : 會稽東與담이의 기록이 있고 移住의 기록이 있는데 낙랑대방 에서 떨어져 있었다고 하였다. 남 사 : 朱崖와 함께 담이가 기록되어 있다. 이상 담이는 倭의 일부로 기록되어 있는데 倭는 會稽의 동쪽의 冶(今 江省州) 단주(丹山;舟山,절강성) 夷洲(금 대만)가 倭의 땅이었으니 담이도 당연히 양자강 이남의 땅에 같이 있어야 한다. 담이가 회계의 동쪽에 있는 것으로 보일수가 있으나 倭의 항목에서는 양자강 이남 어디엔가 있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담이는 韓의 일부이다. 倭(위)의 항목에 나오는 담이가 眞番郡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倭 관련 지명 (고지도인 우적도와 현재지도 대비 추적지명) > 漢書卷7에서 罷담이眞番郡에 기록된 耳는 夷자와 동음이다. (同音異字化) (史記 : 古夷字也, 漢書 28 : 夷通借作古文鐵字鐵又之文耳) 그렇다면 罷담이眞番郡은 '담이가 살고 있는 진번을 郡에서 제외했다' 라는 뜻이다. 여기서 眞番은 辰弁을 나타내는 말이다. 우리나라의 弁韓의 지역을 漢이 郡으로 名稱을 붙였던 것이다. 漢武帝가 兩越을 재물로써 매수를 했다(招東구事)면 兩越은 漢의 직책을 사용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眞番이라는 말을 쓸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581-645년까지 살았던 顔師古(안사고)가 말하기를 담이本南鉞地 眞番本朝鮮地라 했는데 이는 "담이는 본래 南越땅에 살았고 眞番은 조선 땅이었다." 한무제가 매수한 兩越은 朝鮮의 眞番이었고 담이가 살던 땅이었다. 이것이 바로 倭(위)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다. 양자강 이남의 兩越지방은 조선의 땅이었는데 武帝에 의하여 매수되어 眞番이라고 불렀으나 26년만에 파하여 버렸다. (BC82) 그것은 倭(위)의 활동이 강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兩越에서 민월은 福建省 建安이고 남월은 廣東省南海이었다.) 倭의 항목과 眞番의 기록에서 담이는 양자강이남의 南越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담이에 의해서도 倭(위)는 현재의 일본으로 옮겨올 수 없다. 670년 이전의 倭는 결코 半島의 동쪽에 있는 현재의 일본 땅이 아닌 양자강 이남의 朝鮮族의 倭(위:衛)인 것이다. 2. 倭의 本音委이고 衛이다. 倭는 670년 이전의 국가였는데 漢書에 이미 등장을 하고 있다. (한서28)항목으로는 東夷의 新羅 百濟 倭 加羅중에서 제일 먼저 기록된다. 漢書와 三國志에는 倭人으로 기록된다. (漢書28 樂浪海中有倭人) 그런데 倭人을 如墨委面이라 해석하였고 또 倭是國名不謂用墨 故謂之委也라고 해석하였는데 이는 九黎의 후예라는 뜻이 아니 었을까? 이곳에서 委는 倭로 쓰여졌음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다. 항목으로써 최초인 三國志에는 倭人在帶方東南大海中...夏后小康之子封於會稽...今倭水人 '위인은 대방의 동남해대중에 있으며.......하나라제후인 소강을 회계에 봉하였는데....지금의 위수인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今會稽지역에 衛가 있다. 玉篇의 衛를 살펴보면 '康叔少封國名'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小康을 줄이면 康이 되고 會稽와 衛는 같은 절강성지역이다. 倭音은 '위' 와 '왜'이다. 委音은 '위'이다. 衛와 委와 같은 音으로 볼때 倭라고 불러야 옳은 것이다. 半島에서 동쪽의 今日本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倭라고 쓰고 訓民正音이후 '왜'라고 하면서 670년 이전의 국가 倭國(위국)을 잘못 발음했다고 볼수 밖에 없다. 漢書28에서 委面이 委人이란 뜻으로 풀이해 볼수 있으니 倭人(위인)이 옳은 것이라 할 수 있으며 현재 浙江省의 衛가 倭(위)나라의 수도로 볼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 衛의 북쪽에는 獨山 含山이 있으며 西北쪽에는 德安 岑山 桐城 獨山 項城이 있다. 衛의 동쪽에는 台州 會稽山 丹山이 있다. 衛의 북쪽에 있는 獨山은 新羅와 倭의 전투지명이며 含山은 土含山의 준말로 볼수도 있다. 衛의 서북쪽에 있는 德安은 百濟가 망하고 五도독부 중의 하나이고 桐城과 岑山과 獨山은 新羅와 百濟의 전투지역이다. 3. 倭와 新羅는 朝鮮弁韓의 나라다. 倭(위;衛)와 신라는 BC 50년부터 AD 500년까지 41회의 관계 기록이 있다. 전투도 많았는데 지명으로 木出島 一禮部 沙道城 長峯城 風島 吐含山 斧峴 金城 獨山 明活城 對馬島 月城 活開城 軟良城의 14개의 지명이 있는데 이중에서 金城 月城 明活城은 신라의 首都라 하였다. 신라 수도의 서쪽으로 項城이 있어야 하며 서쪽과 북쪽에 百濟가 있어야 한다. 양자강이남에는 衛(倭)가 있고 북쪽이 獨山과 含山이 있다. 新羅와 倭의 관계는 三國史記에서 倭人이 新羅에 와서 외교를 담당했으며 (赫居世 38年 倭人瓠公을 馬韓)에 보냈다. 大輔(脫解王도 大輔에 있다가 왕이 됨)에 임명 되었다.(탈해2년) 倭人이 신라에 와서 그와 같이 직책에 있다는 것은 同族이 아닐때는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 다른 민족이라고 하는 今日本人이 귀화했을때 과연 可能하겠는가? 伐休10년(193년)6월 倭人들이 큰가뭄이 들어 먹을 것을 구하러 온자가 천여명이었다. 이것은 같은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漢族의 기록에서 신라와 倭人이 三國志에서는 新羅와 百濟의 기록이 없었을때도 漢書28 에서는 倭人이 등장하고 있으며 三國志30에서는 항목으로 倭人이 기록하고 있다. 倭人은 '委의 사람들'이란 뜻이 었다고 볼수 있는데 삼국지에서 한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韓傳에 많은 나라의 이름이 있다. 이중에서 후에까지 나라로 존속하는 나라를 예로 들면 百濟國 卑彌國 狗盧國 駟盧國등의 이름이 50여국과 함께 기록되어 있는데 대방의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新羅와 倭와의 관계를 알수 있는 방법은 없다. 倭人傳에는 倭女王卑彌呼와 狗盧國南王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卑彌國의 여왕이 있다면 무엇이라 하겠는가 ? 卑彌國女王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女王을 卑彌라 불러서 卑彌國이라 하고 倭(衛)를 중심으로 있었기 때문에 倭人이라 불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卑彌國(倭中心)과 狗盧國은 委(衛)를 中心으로 합쳐서 倭奴國이 되었다고 할 수도 있는데 卑彌國의 倭와 狗奴國(狗盧國)의 奴를 따서 倭奴國이 되었으며 줄여서 倭로 불렀던 것이라 볼수도 있다. 倭女王卑彌呼와 狗奴國南王卑彌弓呼가 있던것도 역시 帶方의 동남쪽에 있었던 것이니 帶方(河北省)의 남쪽에 百濟國 駟盧國 倭가 같은 지역에 있다는 말이 된다. 百濟의 地名에는 淸河 黃山 東明 德安 周留城이 있으며 新羅의 지명으로는 項城 獨山 桐城 岑山 연주 泗之漣水 地理城 武寧이 있으며 倭의 지명으로는 會稽 會稽東 단洲 夷洲(대만) 朱崖 담耳(南越) (삼국사기: 독산 토함산이 있다) 위의 지명으로 보아서 半島동쪽의 기록으로 볼수가 없다고 본다. 新羅 倭는 朝鮮弁韓後裔국가 들이며 양자강을 사이에 두고 남북에 있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 관련지명 > < 서울대 박창범 교수가 밝힌 일본서기에 나오는 일식관측지 > - 양자강 이남으로 나온다 # 참 고 # < 우적도 > 송나라(700~800전)때 만들어진 고지도로 대만 영인본과 상해 영인본이 있음 대만 영인본 : 중국역사도설 590 "우적도" 상해 영인본 : 송본지리지장도에 소개 아시아에 남아 있는 고지도 중 화이도, 추리도 등이 있으나 "우적도"만이 지명을 가장 명확히 확인할 수 있음 < 설 명 > 위에 동그라미 지명들은 삼국시대 관련 지명으로 현재 중국지도에도 남아 있는 지명들이다. 이뿐만아니라 수많은 지명이 있으나 이를 예로 드는 것은 현재의 중국지도를 가지고 우리역사를 대비하여도 70 ~ 80%는 해석할 수가 있다는 취지이다 위로부터 차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유 : 최지원전에서 고구려 백제가 평정했다는 지명 유연제노오월중1 2. 북평, 태원 : 고구려초기 한과 고구려 전쟁에서 모본왕때 고구려가 평정한 지명중2 3. 창 : 창해군 추정지명(지금은 창주, 신해가 있음) 4. 자 : 김유신때 신라에서 당나라에 자석과 침을 보냈는데 송나라때까지 자석생산지 5. 해 : 해는 바다가 아닌 지명 백제패망시 당나라 군사 동원관련 지명(치청래해) 신라왕에게 작호를 줄때 붙인 '--영해--'의 강소성을 대표하는 지명추증 6. 사, 연수 : 장보고전에 등장하는 지명 7. 지 : 지의 서쪽에는 백제 패망때의 덕안과 백제와 신라전쟁 관계지명이 현존한 다. 이 근처에는 현재 금천씨의 지명 청양 김수로왕관련지명인 허촌 묘수 구자산 황산등이 있음 8. 섭 : 위서에서 고구려가 백제에 빼앗긴 나전칠기생산지명으로 추증(섭라로 추증) 9. 회계, 대, 주애 : 후한서에 등장하는 왜관련 지명 10. 남월, 진번 : 한서7에 등장하는데 진번군의 위치를 확인하는 지명 근처에 진파(진번이 있음) 11. 정 : 당서지리지에 나오는 신라 지배지역 12. 해 서쪽에 제라는 지명은 유연제노지명중1, 북쪽에는 치청래가 있음 ------------------------------------------------------------------------------------------------------ 아래자료는 "세계의 초 강대국 고려高麗홈페이지"에 올려진 글을 인용 내용을 보충합니다 ! "세계의 초 강대국 고려高麗홈페이지 바로가기" <삼국지(三國志)위(魏) 오환(烏丸)전(傳) 진한(辰韓) 왜인(倭人) 1167쪽 기록> - 대륙의 진한(辰韓)과 왜(倭) 辰韓在馬韓之東 其耆老傳世 自言古之 亡人避秦役來適 韓國馬韓割其東地 (진한재마한지동 기기노전세 자언고지 망인피진역래적 한국마한할기동지) -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원래 선조들이 동쪽으로 와서 이 동쪽에 후손이 전해 졌다. [진한사람들] 스스로 옛일을 말하기를 진秦나라가 망할 때 피신하여 일하기 좋은 곳으로 와서 [살은 곳이], [한국마한할기동지 韓國馬韓割其東地]--> 마한의 동쪽 땅에 할거(割據)했다. 與之有城柵 其言語不與 馬韓同名國爲邦弓 爲菰[원 글자는 위에 붙은 풀초변이 없음]賊爲寇行酒爲行觴[술잔, 술잔질할, 술마실 상]相呼皆爲 徙有似秦人 非但燕齊之名物也 (여지유성책 기언어불여 마한동명국위방궁 위호적위구행주위행각상호개위사유사진인 비단연제지명물야) [피신해 마한 동쪽으로 온 사람들은] 성책을 만들고 [마한과 같은 사람들이라] 그 언어는 같지 않았다. 마한 사람들은 방궁이란 나라 이름도 가졌다. [-->필자 주註 : 마한동명국위방궁(馬韓同名國爲邦弓)에서 방궁(邦弓)이란, 나라방(邦), 활궁(弓)이라는 뜻 그대로 활을 잘 만들기도 하고, 활을 잘 다루고 쏘기도 잘한다는 뜻 - (東夷) 동이의 뜻이 활을 잘 쏘고, 잘 다룬다는 뜻의 동이 설명 원전(原典)?] 호적(菰[원 글은 위에 붙은 풀초변이 없음 : 활 고]賊)=활든 도적 질을 하면서 길다니면서 술잔질을 하였다. : 진나라 망한 망국인들의 자포자기하는 행태를 나타내는 말. 이들은 진秦나라 사람이거나 흡사하였고 연,제(燕齊)나라 사람은 아니며 명물이었다. 名樂浪人爲阿殘東方人名我爲阿謂樂浪人 本其殘餘人今有名之爲 秦韓者始有 六國稍分爲十二國 (명낙랑인위아잔동방인명아위아위낙랑인 본기잔여인금유명지위 진한자시유 육국초분위십이국) - [위 명물인]사람들은 낙랑사람들이며 아잔이라는 동방사람의 이름이 있다. 나는 아잔이며 낙랑인. 본래의 그 뿌리가 남아 있어 유명해졌다라 하였다. 진한(秦韓)은 처음 6국이었다가 조금 커지자 12국이 되었다.---> 분명히 진한(秦韓)이라고 표현하여, 辰韓과 같음을 표시. 弁辰亦십이국十二國又有諸小別邑各有渠師大者名臣智其次有險則次有樊濊次有殺奚次有借邑有 (변진역십이국우유제소별읍각유거사대자명신지기차유험즉차유번예차유살해차유차읍유) 변,진,한도 12국이었다. 그중 작은 읍의 나라도 있었고 각 나라마다 거사(渠師)큰 스승, (大者) 큰사람, 명신(名臣), (智)지혜 있는 자도 그 중에 있었다. 차유험(즉次有險則)--> 때로 험하게되니, (次有樊濊) 차유번예--> 때로 지독하게되니, (次有殺奚)차유살해-->때로 해(奚)[종족 이름 해, 이중재님은 계집종 해로 해석]를 살해하니, (次有借邑有) 차유차읍유-->읍[읍에 있는 거사(渠師)큰 스승, (大者)큰사람, 명신(名臣),(智)지혜 있는 자]을 빌려 배치했다. 巳抵國 不斯國 弁辰彌離彌凍國 弁辰接塗國 勤耆國 難彌離彌凍國 弁辰古資彌凍國 弁辰古淳是國  奚國 弁辰半路國 弁樂奴國 軍彌國 弁軍 彌國 弁辰彌烏邪馬國 如湛國 弁辰甘路國 戶路國 州鮮國 馬延國 弁辰狗馬國 弁辰走漕馬國 弁辰安邪國 邪魯國 弁辰瀆魯國 優中國 弁辰韓合 二十四國 (사저국,불사국,변진미리미동국, 변진접도국, 근기국, 난미리미동국, 변진고자미동국, 변진고순시국, 염해국, 변진반로국, 변락노국, 군미국, 변국,미국, 변진미오사마국, 여담국, 변진감로국, 호로국, 주선국, 마연국, 변진구사국, 변진주조마국, 변진안사국, 사노국, 변진독로국, 우중국) - 변진한합이십사국弁辰韓合二十四國,변진한을 합하여 24국이었다. 大國四千家 小國六七百家 總四十五萬戶 其十二國屬 (대국사천가 소국육칠백가 총사십오만호 기십이국속) - 큰나라는 四千家사천가, 작은 나라는 六七百家육칠백가 총 45만호, 그나라는 12국이 속했다. 辰王辰王常用馬韓人作之世 世相繼 辰王不得 自立爲王 魏略日明其 爲流移之人故爲馬韓所制 土地肥美宜種五穀及稻曉蠶桑作 布乘駕牛馬 嫁娶醴俗 (진왕진왕상용마한인작지세 세상계 진왕불득 자립위왕 위략일명기 위류이지인 고위마한소제 토지비미의종오곡급도효잠상작염포승가우마 가취예속) 진왕은 진왕으로지만 마한인의 세상이었다. 그래도 진왕의 왕세는 이어져 왔다. 진왕은 부득이 자립하여 왕을 칭하였다. 위(魏)서에 날이 밝을 때마다 유이민이 흘러들어 마한의 제재를 받았다 쓰고 있다. =>魏略日明其 爲流移之人故爲馬韓所制 (위략일명기 위류이지인 고위마한소제) - 토지는 비옥하고 아름다우며 오곡과 벼농사,누에와 뽕나무재배하여 비단 포목 생산에 마땅하였다. 우마를 길러 임금께도 바치고 타고 다녔다. 결혼의 예도 갖췄다. 男女有別 以大鳥羽送死 其意慾使死者飛揚 魏略其國作屋橫累木爲之有似牢[굳을,소,양 뢰,로]獄也 (남녀유별 이대조우송사 기의욕사사자비양 위략기국작옥횡루목마지유사뢰옥야) - 남녀유별하였고 큰새를 데리고 가다 죽는 수가 있으며 그 욕심이 큰새를 다루다 날라갈 때 죽는 수도 있었다. 위(魏)서에 그 나라=진한은 통나무를 가로로 겹겹이 대어 집을 지어 뇌옥과 같게 했다. 國出鐵韓濊倭皆從取之諸市買皆用鐵如中國用鐵又以供給 (국출철한예왜개종취지제시매개용철여중국용철우이공급) - 이 나라=진한에서는 철이 많이 빠져 나갔는데 한, 예, 왜로 빠져 나간 철은 시중에서 매매가 이뤄졌고 철을 많이쓰는[(買皆用鐵)매개용철] 중원의 나라들은 철을 사서 사용하는 데에 공급하였다. 二郡俗喜歌舞飮酒有琵其形似筑彈之亦有音曲見生便以石壓其頭慾其福今辰韓人 (이군속희가무음주유비기형사축탄지역유음곡견생변이석압기두욕기복) - 두 고을의 풍속은 歌舞飮酒가무음주를, 琵비[파] 형태의 악기를 타면서 즐겼다. (見生便以)견생변이, 생활을 편하게 생각하며 (石壓其頭慾其福今辰韓人) 석압기두욕기복금진한인, 머리를 압박 받지않는 복있게 생활하려 했던, 지금의 진한인이었다. 皆福頭男女近倭亦文身便步戰兵仗與馬韓同其俗行者相逢皆住讓路 (개복두남녀근왜역문신변보전병장여마한동기속행자상봉개주양로) 남녀는 모두 복많은 사람이라고 가까이 지냈다. 왜인들은 역시 문신을 하고, 다닐때에 보병의 의장대처럼 하고 다녔으며, 마한 사람들도 그 풍속을 같이하였으며, 길에서 만나면 모두 길을 양보 하였다. [왜인들이 육지=대륙에 이웃해 살았다는 말이 여기에서 명백하지 않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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