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위를 멸망으로 몰고간 대륙백제의 진실

백제제국의 영광  |   2005-12-14 04:24:55
위(魏)나라와 백제의 기병전(騎兵戰) --------------------------------------------------------------------------------               기록에 의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륙의 열국과 백제간의 전쟁에 관한 싸운 기록이 많이 있습니다(아래에 몇가지 실어 놓았습니다).      전쟁이 있었다면 당연히 수군(水軍 )에 의한 전투가 있어야 하고, 그 후에 육상에서의 전투의 기록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양쪽 기병이 싸운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그것도 한 두명이 아니라, 수 만명에서 수 십만명씩의 대규모 전투입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한반도에 백제를 한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위(魏)의 기병이 고구려를 통과해 지나가도록 고구려가 눈감아 준 경우와 백제가 대륙에 있다는 설명이 가능한데, 과연 고구려는 백제와 위나라의 군대가 자신의 영토에서 싸우게 했을까요?  아니면 고구려는 위나라군대와 백제군이 고구려의 영토를 그냥 지나가게 묵인하고 있었을까?    이는 앞쪽의 천문학적 사실을 미루워봐도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것이 설명이 되는 근거가 되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역사에서는 설명이 안 되자, 아예 가르치지 않고 있습니다.     다음은 대륙에 남아 있는 사서(史書)에 기록된 백제관련자료중 일부입니다.     "...서(西)쪽으로 월주(越州)를 포함하고(월주의 남쪽을 월남, 즉 베트남이된다), 북(北)쪽으로는 고구려와 국경을 마주하며, 남쪽으로 왜를 포함한다. 백제는 동, 서 두 곳에 서울을 두고 있다....(舊唐書)"    "... 백제는 전성기에 백만이 넘는 대군으로 오(吳), 월(越), 연(燕), 제(齊), 노(魯)나라 지역을 다 장악하였다...   (삼국사기)..."  -과연 삼국사기는 반도중심의 기록인가요?    "... 동진(東晉)때부터 남송과 양(梁)나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장강(長江) 양안(兩岸:양쪽 지역)을 모두 점령하였다...(周書)"        중국 남부에는 지금도 백제현이라는 지명들이 있습니다. KBS취재진이 탐방하여, 이들에게 어째서 백제라는 이름이 붙었나고 물어보자, 옛날에 조상들이 전쟁을 하기 위해 이 곳에 왔고 그래서 이곳에 그 조상때부터 정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백제 22담로를 배우고 있지만 그 위치는 배우지 않습니다. 담로는 지금의 연방과 같은 제도로, 백제는 하나의 나라로 이루워진 나라가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물론 위(魏)나라의 기병과 백제의 기병이 배위에서 서로 싸웠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기록은 그러한 사실을 반영하지 않고 있으며,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사소한 전쟁의 기록조차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역사인 것입니다.      우리의 사서라고 일컫는 기록에는 백제에 관한 기록은 미미할 지 모르나, 상대가 되는 대륙의 사서에는 백제에 관한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지금의 요동이 아니다-후술합니다.) 동쪽 천 여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 후 고구려가 요동을 공략하여 차지하자, 백제는 요서를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백제가 통치한 곳은 진평군이라 하였다. - 宋書-..."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晉나라때 이미 고구려가 요동을 공격하여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 진평의 2군을 점거하고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梁書-..."     "...부여는 鹿山에 자리잡고 있다가 백제의 공격을 받아 부락이 쇠퇴하였다. 그래서 서쪽으로 燕에 가까운 곳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이 외에도 백제의 대륙존재설을 뒷받침하는 사료는 수없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백제를 반도의 한 귀퉁이에 몰아 넣고 있습니다. 백제의 침략을 받은 나라는 대륙에 존재하는 것을 뒷받침하는데, 백제의 후손이라고 일컫는 자들은 그러한 적이 없고, 반도에 있었다니..        대륙인들은 지나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사는 것일까요? 또한, 부여는 우리가 배우기에 고구려의 북방에 있던 나라로 배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의 자치통감의 기록을 보면. 반도의 백제가 어째서 대륙의 부여를 공격할 수가 있는가요? 공수특공대가 진입하였을까요?       아니면 부여조차 반도에 있었다는 것일까요? 아마 현 사학계는 그러고 싶을 것이다. 그래야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가 있을테니까요? 여기서 소위 사학계의 입장을 대변하는 주장을 실어봅니다. 감상해 보십시요..       "...(전략) 이들 기록에 의문을 품고서 백제의 대륙진출설을 불신하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백제가 자리잡은 한반도 중남부와 요서지방은 말을 타든 배를 타든 대단히 먼 거리인데, 굳이 백제가 군대를 보내어 군현을 설치할 이유가 있었겠는가하는 것이다. 백제가 군현을 설치했다는 진나라는 3세기 후반~5세기초엽에 해당한다. 아직 백제가 해외에 군현을 설치할 정도로 성장하지 못했고, 4세기 후반기에도 황해도지방을 놓고 고구려와 줄곧 전쟁을 치르느라 요서지방까지 진출하여 군현을 설치할 겨를이 없었다. 요서지방까지 군대를 파견하기 위해서는 많은 전함과 뛰어난 항해술이 있어야 하는데, 이 역시 백제 사정상 생각하기 어렵다. (중략) ...실제로 중국 기록을 보면 요서지역에 백제군현이 몇 년이상 존속할 만큼 힘의 공백상태를 보인 적은 없었다. ..(후략) ..."      어떠십니까? 맞는 말이라고요... 음..      위 글의 근간은 반도에서 해석하다보니 해석이 안된다는 것이지요.. 백제의 위치를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쓰는 모습입니다. 무슨 역사 해석을 자신의 의견에 맞지 않는다고 왜곡 해석하는지..우선, 백제는 수군을 파견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기병을 투입했습니다. 또, 대륙의 사서의 기록은 고구려와 백제가 요동과 요서를 놓고 쟁패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사학계는 황해도를 놓고 싸웠다고 합니다. 당시 요수와 패수는 근거리에 있었습니다. 패수(浿水)를 지금의 대동강으로 한정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사학계입니다. 그러니,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은 반도에서 보니, 황해도가 되고 맙니다.      하지만, 왕건에서도 나왔지만, 패수는 지금의 북한의 대동강이 아닙니다. 이곳은 당시의 대륙의 요수와 인접한 곳으로 백제와 고구려는 대륙에서 서로 패권을 놓고 겨룬 것입니다. 당시의 백제의 국력이 먼 곳에 원정군을 파견할 만하지 못했다는 것도 우스운 소리지만, 물론 백제는 원정군을 요서(지금의 요서가 아니다.)로 파견한 것이 아니라, 그곳이 백제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대륙의 열국의 위치를 지금의 중국의 위치로 확대시켜 놓고 백제의 자리를 찾으니, 힘의 공백상태가 없었다는 소리를 운운합니다. 상대방의 나라는 있는대로 늘려서 해석하고 우리의 강역은 되도록 이면 작게 해석하려고 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요즘은 백제가 대륙에 진출했는데, 그것을 고대상업세력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영토는 그리지 않으면서 그 당시는 영토의 개념이 지금과 달랐다는 둥 알 수 없는 말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나라들의 영토개념도 그렇게 말해야지 당나라의 영토도 아마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겠지요.. 더군다나 수십만의 위의 기병과 백제군이 싸웠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있음에도 장사꾼이라니, 백제의 상인들은 잘도 싸웠나 봅니다.     북위의 효문제와 백제군의  기록        "...정로장군 : 매라왕 -사법명, 안국장군 : 설중왕 - 왕찬수류, 무위장군 : 불중후 -해풍곤, 광위장군 : 면중후 - 목우나...(남제서)"        이렇듯 백제의 대륙에서의 전쟁기록은 여러 역사서에 장군들의 이름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국사책에는 이러한 장군들이 나오지도 않고, 이러한 역사를 단순한 고대상업세력으로 얼버무리고 있습니다. 위에 기록된 장군들을 장사꾼으로 매도해 버리고 있습니다. 지금의 국사책이 맞다면 위의 기록된 장군들은 당시의 유명한 장사꾼이 되는 것입니다.
검색 입력박스
검색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