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달픈 인생살이
이렇게 |
2005-12-13 03:04:52
“오늘도 쌀밥에 안주는 물 건너 가부렀네. 빈속에 막걸리나 한 잔만 걸치고 들어가야제….”
매서운 칼바람에 체감온도가 영하 15도까지 내려가는 등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씨를 보인 8일 오전 5시30분. 서울 종로구 창신동 종로약국 앞 사거리에서 만난 남성진(60)씨는 타 들어 가는 담배를 들어 보인 뒤 “이거 다 피우도록 일거리 없으면 볼 것 없응게 들어가버릴 것이구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남씨는 그날 담배 반 갑은 족히 피우며 1시간은 더 기다린 뒤 결국 인근 경마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겨울철이 건설경기 비수기라고 해도 사계절 내내 최소 150여 명 이상은 모이던 서울 창신동과 봉천동, 명륜동 등 서울시내 인력시장에는 차가운 날씨만큼이나 버텨내기 힘든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 특히 한 달에 4∼5일이라도 일자리를 구하면 감지덕지한 탓에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이들 ‘잉여’ 인력들은 고용주들이 부르는 값에 일을 하고도 수당을 받으려면 수개월이나 기다려야 하는 힘든 겨울나기를 하고 있다.
이날 오전 4시부터 창신시장에 모여든 사람들은 어림잡아 50여 명이었지만 일을 찾아 떠난 사람은 5명에 불과했다. 철근조립과 콘크리트 타설, 도비공 등 세 부류만 모이는 이곳에서 14년째 막노동 일을 구해왔다는 김정식(가명·56)씨는 “인력사무실을 통해 일당 7만원짜리를 구하면 10%인 7000원을 뱉어 내야 한다”며 “쩌그 찬바람 횡횡 부는 일산 공사 현장 꼭대기라도 올라갈 수 있으면 좋겠건만 영 기회가 없다”고 말했다. 벌써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키고 왔다는 최중곤(가명·59)씨는 “두 달 전에 구로에 있는 ○○전자 신축공사에서 일한 돈을 아직도 못 받았다”며 “막노동꾼들의 일당을 은행에 묵혀두면서 이자 받을 심산인가 본데 그렇다고 뭐라 할 수도 없는 형편이라 사방에서 죽는다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전했다. 결국 아무 일자리도 구하지 못한 나머지 40여 명은 오전 6시가 다 되어서야 각자 주머니에서 천원 짜리 지폐 몇 장을 확인한 뒤 인근 사설 경마장과 복권방으로 향했다.
비슷한 시각 서울 관악구 신림동 현대시장 네거리 인력시장. 담배를 피우며 한없이 일자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 일자리를 얻으면 다행이라는 곽정훈(66)씨는 “겨울에도 철근 일은 끊이지 않았다”며 “월드컵도, 아시안게임도 없는 지금 뭘 먹고살아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비계공(일당 14만원 정도), 철근공(일당 13만원 정도)에 비하면 낮은 가격이지만 6만 원은 받게 됐다는 정장식(57)씨는 승합차 한 대가 나타나자 서둘러 자리를 떠나며 “이 돈 받고 일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나마 일당으로 쳐 준다니 군소리 않고 나가야 한다”며 “저기 일자리 못 얻어 그냥 돌아갈 사람보다는 다행”이라고 말했다.
노동부 임금근로시간정책팀 관계자는 “건설 일용직 같은 경우에는 하루 단위 임금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그날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 것은 근로기준법 위반”이라며 “근로 계약 당사자 간 위계 관계가 존재, 막노동하는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점을 악용하는 것인데 향후 노동부의 지도감독 대상”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