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다까끼 마사오) 에피소드/ 한토마 펌~!

소한이 애비다~!  |   2005-12-03 13:14:00
박정희 (다까끼 마사오) 에피소드/ (다까끼 마사오)박정희는 1944년경 만주군 8단이 있던 열하성으로 전보되었는데 그곳에서 "조선놈 토벌이라면 내게 맡겨라."라고 호언장담 했다고 합니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뒤에도 그는 틈만 나면 주일 대사관을 통하여 입수한 일본 사무라이 영화를 관람하고 일본 검도를 즐겼다고 합니다. 또한 당시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씨 등과 청와대에서 술을 마시며 일본천황의 교육칙어를 번갈아 외우는 내기나 시합을 하곤 했다 합니다. 박정희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지독한 향수를 엿 볼 수 있는 대목들이지요. 중앙일보(1991. 12. 14) 기사를 볼까요. " ..... 계엄선포 한 달 전쯤인가(1971. 10.17 계엄이 선포되었다) 박 대통령이 나를 불러요.(여기서 '나'는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 대통령은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죽장화에 점퍼차림인데 말채찍을 들고 있었어요. 박 대통령은 가끔 이런 복장을 즐기곤 했지요. 만주군 장교시절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다카기 마사오 중위로 정일권 대위 등과 함께 일본군으로서 말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박 대통령이 이런 모습을 할때면 그분은 항상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 통치 기간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을 등용하여 나라를 좀먹고 민족정기를 회복할 수 없도록 망쳐 놓은 양반이 진정한 우리의 우상, 우리의 존경대상이 될 수 있을까요. 1961년 11월 최고회의의장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 박정희는 이케다 수상이 주최한 공식만찬에 만주군관학교 시절 교장이었던 나구모(南雲) 장군을 초청해 달라고 했고 생도 시절의 다카끼 마사오(高木正雄)으로 돌아가 나구모에게 큰 절을 올리고 술을 따랐다고 합니다. 동경의 한 요정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여 동석했던 일본인들을 놀라게 했다고 하지요. " .... 나는 정치도, 경제도, 모르는 군인이지만 명치유신 당시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지사와 같은 기분으로 해볼 생각이다...." 그것도 유창한 일본어로 했다고 합니다. 1963년 12월 17일 박정희 취임식에 참석한 일본의 자민당 부총재 오노 기자회견에서 " ....박정희 대통령과는 부자 사이 같은 관계로서 아들의 경축일을 보러 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즐겁다.."라고 했습니다. 일본군국주의 세력의 정신적 유대는 대일 굴욕회담을 (한일협정) 성사시켜 식민지 지배 피해에 대한 거의 모든 권리와 주장을 포기하였지요. 또한 1973년 서울 지하철차량 부정도입 사건을 저지릅니다. 일본에서 지하철차량 186량에 대한 매매계약을 체결하였는데 일본에서 3,204만엔하는 가격을 6,350만엔이란 두 배 정도나 비싼 가격으로 계약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만주군 출신 선배들의 로비와 정치자금의 리베이트가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하지요. 훗날 박정희가 10.26으로 죽었을 때 주한 일본대사관에서 한 일본외교관은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 라고 했다 합니다. 문란했던 사생활도 많이들 지적이 되지요. 참고 글을 인용해 봅니다. “.........군인이 되어 서울에 있을 때도, 선산 시골에 있는 아내와 딸은 생각하지 않고, 예쁘고 새파랗고 싱싱한 이화여대생을 관사(官舍)인 장교 숙소로 유인하여 동거했다. 박정희 생애를 통하여 알려진 박정희의 최초 '영계 사냥'이다. 이 때부터 시작되었는지, 아니면 그 이전부터 남 모르게 몰래 시작되었는지는 모르나 박정희의 영계 사냥은 그 후 처녀 육영수를 아내로 불러들인 이래, 육영수가 청와대를 지키고 있던 대통령 재직 중은 물론이고, 육영수가 타계(他界)한 후 소위 궁정동 안가(安家)에서 이루어진 대소(大小) 행사에 무려 200여명의 여자(연예인, 모델, 대학생 등)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 것을 보면 박정희야말로, 제2의 패륜아 연산군과 같은 희대의 색마(色魔) 색광(色狂)이 아닐 수 없다. 궁정동에는 두 가지 여인 행사가 있었다. 하나는 대행사이고, 다른 하나는 소행사이다. 대행사는 술 시중을 들던 아리따운 아가씨를 데리고 잠자리까지 가는 것이고, 소행사란 술 시중만 받고 마음이 내키지 않아 여인을 버리고 청와대 대통령 본관에 혼자 가서 자는 것을 말한다. 위에서 말한 200여 여인들이란 대행사 대접용들이었고, 박정희의 주안상이 대행사로 이루어지지 않고 소행사로만 끝나는 날이면, 궁정동 채홍사(採홍사(紅絲士)는 안절부절이었다. 그 따위 계집을 불러다 잠을 자라고 했느냐는 질책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홀아비 대통령 박정희의 그 후의 대행사는 술 자리에 앉은 여자가 아무리 박색이라고 하더라도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할 형편이 못 되었다. 박정희 자신이 직접 수소문 하거나, 텔레비전 화면 같은 것을 보면서 자기 자신이 채홍사가 되어 여자를 직접 지명하고, 하명(下命)하여 데려다 잤기 때문이다. 육영수는 충청북도 절세(絶世) 대가(大家) 육(陸) 씨 집안의 20여 자녀 중에 맏딸이다. 그런 처녀가 장가 들고 아기 낳고 다른 처녀와 동거까지 한 박정희를 만난 것은 6.25사변으로 나라가 망하여 대구로 도망 갔을 때였다. 박정희는 엎어지면 코에 닿을 거리에 있는 본처(本妻)에 대한 관심은 전과 같이 전혀 없이, 부하를 통하여 충북 처녀 육영수를 만나 전시 중에 결혼식을 올린다. 걸작(傑作)인 것은, 신랑 신부를 제대로 모르는 주례가 박정희는 여자 이름 같고, 육영수는 남자 이름 같아, '육영수 군과 박정희 양의 결혼을 .....' 운운하는 주례사를 했다는 점이다. 박정희는 참으로 뻔뻔한 군인이었다. 나라가 망하는 판에 결혼식은 무슨 결혼식이고, 처자(妻子)를 둔 판에 장가는 무슨 장가이며, 숫총각도 아닌 주제에 숫처녀를 신부로 새로 맞은 것은 무슨 또 뻔뻔스러움이며, 전선에 나가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주제에 왜 한 여인의 일생을 망치려고 또 결혼식을 올린단 말인가. 박정희는 육영수를 맞아 한 동안 신접(新接) 살림을 하다가, 명(命)을 받아 전선(戰線)에 투입되었고, 그의 근무지는 강원도 강릉이었다. 적군(敵軍)이 바로 눈 앞에 있는 동해안 최전선(最前線)이었다. 군인의 사명이 무엇인가.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는 일이고,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정신이다. 그런 훌륭한 한국 전통 무인 정신을 따라 전선을 지킨 용감한 군인들이 많고, 집에 두고 온 아내를 향하여 뒤를 처다보지 않다가, 영원한 호국(護國) 영령(英靈)이 된 전사자(戰士者)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러나 박정희는 그렇지 않았다. 박정희는 수 많은 사람들이 전선에서 고혼(孤魂)이 되어가고 있을 때에 장교(將校)라는 직위(職位)를 이용하여 전시(戰時) 군용(軍用)찝차를 동원하고, 군복(軍服)으로 위장(僞裝) 시킨 육영수를 강릉 진중(陣中)으로 데려왔다. 아무리 장교이지만, 전쟁 중에 진중에 여자를 되려 왔다는 것은 군법회의 회부(回附) 이전에 발견 즉시 현장 총살(銃殺) 감이었다............ [집필/송우]“ 박정희의 친일경력이나 군사쿠데타를 통한 집권이라는 헌정의 파괴, 유신을 통한 일인독재체제의 확립에 대해서는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옳을 듯 합니다. 청렴했다는 부분도 많이 과장된 것입니다. 경제적 치적운운하며 이런 것들이 미화되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요. 경제적 치적도 과연 박정희의 업적인가 좀 더 심도있는 검토가 필요할 듯 합니다. 다음 글을 보시지요. “1961년 5.16 이후 형성된 군사정권 체제는 '절차'의 불법성을 가리기 위해 '목적'과 '결과'에서 정당성의 근거를 확보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5.16 이전의 역사를 부정과 극복 대상으로 파악하였습니다. 특히 그들 자신이 파괴했던 민주당 정권에 대해서는 극히 부정적인 모습으로 부각시켰답니다. 이러한 인식이 30여년 이상 지속되었기 때문에 9개월로 단명한 민주주의 정권은 파벌투쟁으로 시종한 부패 무능한 정권이라는 이미지가 고착되었습니다... 장면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한 민주당 정권은 9개월 정도 존속한 단명의 정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19혁명이라는 시대적 과제의 해결을 위해 진력을 다한 정권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9개월 동안 장면 정권에서 추진한 경제정책의 기조와 구체적 실행을 살펴 볼 때 확인됩니다. 장면 정권에서 추진했던 국토개발사업, 제1차 5 개년경제개발계획 등은 정권이 몰락한 이후에도 계승되어 시행되었습니다. 국토종합개발계획, 경제계획원과 건설부 설치 계획 등 장면 정권기에 구상되었던 정책 역시 군사정권에 의해 현실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은 장면정권에서 추진한 경제정책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장면 정권이 내세운 '경제제일주의'의 시정 방침은 당시의 심각한 경제적 위기의식의 소산이었습니다. 그리고 '질서와 발전'을 내세워 경제적 질서의 확립을 기반으로 한 경제 발전을 추구하는 정책은 경제의 민주주의 원칙을 천명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장면 정권은 경제정책의 수립에 있어서 다양한 경제 주체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수렴하고 그것을 조정, 통합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역할의 중요성을 절감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하여 종합경제회의를 개최하고 중앙경제위원회나 경제계획원과 같은 경제정책 기구를 설치 또는 구상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1차 5개년경제개발계획의 구상은 각계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산업개발위원회에 맡겼습니다. 5.16 이후 밀실에서 몇몇 사람에 의해 수립한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리하여 경제개발 계획에서도 정부와 민간 부문의 역할 조정에 유의했고, 국토건설 사업의 시행은 국민운동 형식으로 추진하였습니다. (김기승,허동현 교수 공동 강의 중 에서)“ “.....박태균 교수는 장면 정부가 처음 내세운 '경제개발 제일주의'가 군사정권에 의해 부활했다고 본다. 장면 정부의 국토건설사업은 농촌인구의 과잉과 실업문제를 해결하려는 목적을 가졌는데, 이는 넉시를 비롯한 균형개발론의 핵심논리를 따른 것이다. 군사정권이 '자주적' 경제를 건설하겠다고 천명한 혁명공약 제4항도 민족 또는 경제적 자급자족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50년대의 경제담론이 60년대들어 실행에 옮겨지게 된 것이다. 박씨는 60년대 후반 들어온 불균형 성장론의 영향으로 70년대에 수출입국론,탈민족경제론,중화학공업론이 등장하고, 경제사는 새로운 분기점을 형성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박정희의 경제개발계획은 기실 장면 정권때 만들어 진 것이라 보아야 합니다. 즉, 박정희의 쿠데타가 없었더라도 우리의 경제는 정상적으로 발전해 올 수 있었음을 엿보게 하는 대목입니다. 이제는 박정희의 독재와, 그에 기생하던 기득권층, 언론 등에 의해 가려졌던 진실들을 계속 연구하고 논의해 가야 한다. 무비판적 우상화에 앞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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