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충격 -8.3사채동결조치-
자유국민전선 |
2005-11-19 11:32:41
(한국경제 반세기)”한밤의 충격”..8.3 사채동결조치①
[edaily 2005-06-07 17:37]
[edaily 이종석기자] 1972년 8월2일 밤 11시40분. 야간 통행금지를 20여분 앞두고 충격적인 ‘사채동결조치’가 발표됐다.
기업들이 떠안고 있는 사채를 동결해 일정 기간 갚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의 ‘대통령 긴급명령’ 이었다. 자유시장경제 체제하에서는 있을 수도 없고, 상상하기도 어려운 초법적 조치였다. 반향은 즉각적이었다. 사유재산권의 중대한 침해이자 부실기업에 특혜를 주는 위법조치라며 각계의 반발이 잇따랐다.
하지만 청와대의 반응은 담담했다. “경제 파급이 큰 사안인만큼 국회에서 사전 공개토론을 할 수 없었고, 만일 그렇게 했다면 실효성을 거둘 수 없었을 것”이라며 긴급명령 발동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서슬퍼런 군사정권 시절, 박정희라는 절대권력자가 아니었다면 생각할 수 없는 전무후무한 초법행위였다. ◇ “기업을 살려라”…전경련 회장단 대통령에 건의 8.3 사채동결 조치가 내려진 이면에는 전경련의 막후 역할이 컸다.
전경련은 70년대 들어 기업들의 경영난이 가중되자 대통령에게 이 같은 상황을 직소키로 하고 청와대에 대통령 면담을 요청했다. 이에 71년 6월11일 박 대통령은 김종필 총리와 김학렬 부총리, 남덕우 재무부 장관 등을 배석시킨 가운데 김용완 전경련 회장, 정주영 부회장 등을 만나 경제계 실정에 대한 의견을 청취한다. 김 회장은 이 자리에서 재계가 겪고 있는 어려움 전반에 대해 설명하고, 특히 기업들의 사채이자 부담이 커 부실기업이 갈수록 늘어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김 회장은 해결책으로 기업사채를 은행에서 떠맡아 줄 것과 세금감면, 금리인하 등 특단의 대책을 요청했다.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을 맡았던 김정렴씨의 회고.“김 회장은 고리사채에 대해 정부가 비상한 결단을 내리지 않는 한 모든 기업이 연쇄적으로 도산할 것이라고 대통령에게 역설했지요. 특히 자신이 경영하는 경성방직도 사채를 쓰고 있었는데 최근 공장부지를 팔아 다 정리했다면서 조금도 사심없는 건의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한국 경제정책 30년사) ◇ 환율절상, 차관 상환…기업 자금사정 압박 60년대 우리나라는 제1,2차 경제개발계획을 거치면서 공업화와 수출증대를 기반으로 사상 유례없는 고도성장을 달성했다.
그러나 정작 기업들의 입장에서는 사상누각적인 측면이 적지 않았다. 자기자본이 부족한 상태에서 타인자본, 특히 사채의존도가 높다 보니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이자갚기에 급급한 형국이었다.
여기에 물가상승과 환율인상 등 고도성장에 따른 부작용이 표출되기 시작하면서 제2차 경제개발계획 후반기인 70~71년 들어 기업들의 자금상황이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불황의 여파는 성장률 하락으로 나타났다. 69년 13.8%에 달했던 경제성장율은 ▲70년 7.6% ▲71년 8.8% ▲72년 5.7% 까지 떨어졌다. 수출증가율도 68년 42%에서 ▲69년 34% ▲70년 28%대로 하락했다.
자금, 생산, 판매, 고용 등 경제 전반에 걸쳐 불황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면서 대기업을 중심으로 ‘부도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이러다가는 3차 경제개발계획은 물론 중화학공업 육성도 어려워질 수 밖에 없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70년대 들어 기업들의 경영여건이 이처럼 급격히 악화된 것은 60년대 중반 도입된 외국 사업차관의 원리금 상환이 시작되면서 기업들의 자금사정을 압박했기 때문. 여기에 정부가 수출촉진을 위해 환율을 18% 대폭 평가절하한 것도 차관기업들의 원리금 부담을 가중시키는 악재로 작용했다. 고도성장의 결실을 누리기도 전에 이처럼 기업들이 일제히 경영난에 봉착한 것은 그만큼 국내기업들의 자본축적에 문제가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원초적으로 국내 기업들의 자본 축적은 빈약할 수 밖에 없었다. 증권시장에서 유가증권을 발행해 자기자본을 확충하고 이를 통해 안정적인 재무구조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겠지만 당시는 유가증권 발행시장의 기능이 유명무실했던 시절이었다. 자기자본을 확충할 방법이 없다 보니 기업들은 급전 필요시 은행의 단기자금을 차입하거나 사채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 사채업자가 대기업 목줄을 쥐고 흔들던 시절 증시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70년대 사채시장은 기업들의 중요한 자금원이었다.
당시만 해도 서울의 명동과 소공동 등을 중심으로 적어도 100개 이상의 대규모 사채중개업소들이 활동했다. 이들은 세금을 피하기 위해 외형상 출판사나 전화거래상 등으로 위장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사채공급자로부터 돈을 끌어와 대기업에 자금을 공급하는 일에 전념했다. 당시 사채의 가중평균금리는 월 3.84%로 연 46%를 넘는 고금리였지만 돈을 구할 수 없는 기업들은 이 돈이라도 감지덕지 써야 할 형편이었다. 문제는 이들 사채중개업자들이 하나의 그룹으로 세력을 형성하면서 차입기업들의 경영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일부 사채중개업자 가운데는 상근직원을 채용해 차입자인 대기업별로 담당을 맡겨 차입기업의 경영사정, 재무상태, 단기전망 등을 분석하고 자금의 이동상황을 면밀히 체크했다. 대기업의 경영현황이 사채업자 파견 직원에 의해 매일 평가되고 보고되었던 것이다. 특정 기업의 자금사정이 악화돼 부실화할 우려가 있다고 평가될 경우 이들은 즉각 해당 기업의 정보를 교환했다. 정보교환 결과 부실화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나면 사채업자들은 거의 동시에 보유하고 있던 해당기업 어음을 교환에 돌려 버렸다.
일시에 어음이 돌아오면 차입기업은 이를 막을 수 없게 되고, 결국 부도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대기업이 부도를 맞게 되면 그 기업의 어음을 갖고 있는 중소기업까지 연쇄 부도로 이어지는 등 사회적 파장이 높아져 갔다. 대기업들이 모인 전경련내에서도 상당수 회원사들이 언제 사채업자들로부터 어음교환을 당해 부도위기에 몰릴 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위기 속에 전경련 회장단이 청와대를 방문, 고리사채에 대한 특단의 행정조치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다음 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