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시선으로 타자를 바라보기
뉴 |
2005-07-20 09:19:21
타자의 시선으로 타자를 바라보기-
현실속에서 대저 타자의 시선으로 타자를 바라보기에,
자신의 시선은 존재 무로 된다.
냉전체제라는 대결구도가 허물어지면서
단순한 세계구조보다 다원화된 세계라는 시각-그것이 늘 이야기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인식기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타자를 승인하는 그러한 시각보다
타자의 시선으로 타자를 바라보기를 하는 것이 포스트모던의 현주소이다.
헤겔은 세계의 발전법칙을 테제-안티테제-진테제로 바라본다.
즉 진테제로 나아가기 위하여 필이 안티해야 된다는 것이다.
과장되게 말하면 발전하기 위하여서는 타자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그러한 논리인것이다.
아울러 세상은 나날이 더 좋아진다고 보는 것이다.
헤겔은 <세상을 바라보기>를 공식을 세운것은
그 개인의 공식보다 서구식의 세상을 바라보고 그것을 정식화 한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합당할 것이다.
이런 안티식 시선은 성경의 텍스트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다.
십자군 동정에서 보여지는 이민족에게 행해지는 잔혹한 학살이라는 전쟁을
정당화하는 것은
진테제로 나아가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정복해야 한다는 논리하에)
수많은 억울한 생명을 그 대가로 안티한 것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것은 개화라는 보다 진테제로 나아가기 위한것이다.
근대화에 한발 빨랐던 일본도 그렇게 이야기 했었다.
한국과 만주를 개화시켰다고. 근대화를 추동시켰는데
그 과정에 희생이 뒤따랐다고.
현재 이라크에서 행해지는 동란-그 바탕에 대한 미국의 시유는
곧 민주화로 나아가기 위한 안티이고 진테제로 나아가기 위하여서는
필이 안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안티에 거슬르는 것은 테러이고 시대역반적인 죄행이다. 그런 것이 아닌가?
과거 십자군 동정의 논리와 꼭 같은 것이다.
안티라는 전제하에는 하나의 절대진리르 항상 상정하여야 한다.
가장 바람직한 가장 합당한 진리,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진리란 한 공동체의 이익을 대표할뿐이다.
만인에게 절대적인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절대진리를 상정하고 실행함은 곧 <비진리>에 대한 억압과 탄압을 전제로 한다.
나라마다, 각 개인마다 절대균일화를 요구함-이것이 안티테제식 진리가 아닌가?
그 억압과 탄압은 항상 진리라는 면목하에 감추어지고 드러나지 아니한다.
더욱 통절한 것은 우리가 그런 안티테제식 진리에
이미 의식구조가 길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시각은 우리의 시각이 아니라
타자의 시각으로 타자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바라보아야만 진리로 향하여 나아간다는 것이다.
평등한 존재관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필히 절대진리를 부정하여야 하며,
타자의 존재패러다임을 존중하여야 한다. 그것이 곧 진정한 포스트모던이다.
허울뿐인 포스트모던이 아니라 우리 시각으로 오픈된 시각으로 타자를 바라볼때
다양한 문화와 의식 국가와 민족이 공존하는 포스트모던이 이루어진다.
사회주의국가에서 행해지는 <무산계급 독재론>도 엄밀하게 말하면 안티테제식 사유이다. 진테제로 나아가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안티해야 한다는 논리인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요즘 행하는 일련의 정책과 방향들은 안티테제식이 아니라
화합으로 나아간다.
사적인 재산을 보유할수 있고 그것을 법으로 보호하는
작동동되는 국가법률구조는
안티가 아니라 화합이다.
그러한 변화에 대하여 철저한 변화를 해야 한다는 논리는
절재진리를 그 귀저에 두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미국의 나름대로 갈길을 갈것이며,
한국은 한국의 나름대로 번영의 길로 나아갈것이며
중국은 나름대로 중국의 길을 갈것이다.
그 어떤 전대 진리가 없다. 절대진리는 항상 타자와 소수자를 억압하니깐...
중국의 발전의 제반형태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타자의 시각으로
중국을 바라보기일뿐이다.
인티로 진테제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쿤이 이야기 한것처럼 다만 패러다임의 차이일뿐이다.
패러다임을 승인할때 세상은 보다 긍정적이지 아니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