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중국 성립때 장개석<将介石>은 어디에?

中国延边  |   2005-07-08 15:07:55
              광주일보<廣東省廣州市>   를  번역 동산구의  매화촌을  말할라치면  많은 광주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그리고  매화촌의  진제당사택도  많은 광주사람한테도  생소한  곳이  아니다. 그러나  장개석과  진제당사택사이에  한단락의  인연이  있다는것만은  모를것이다. 1949년 10월1일  모택동이  천안문성루에서  전게계에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선포할   때   장개석은  한창  진제당사택에서  그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하루를 보냈는데  이  역사의  일막을  아마  많은 사람들은  모를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때  장개석은 구경  어디에  있었는가? 한는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기자는 거리와  골목을  돌면서  사실을   알고있는   사람들과  문의하고 자료를  찾아보면서  발견했는데  장개석은   당시 진제당사택에  머무르고있었댔는대  하지만   그곳에  거주하고  있었던  많은 주민들은  도리여  모르고  있었다. 장개석은 원래  56년전    그들의  <임시이웃>이였던것이다.                                  1 진제당사택<陈屆唐宅>은  중산로 매화촌<梅花村>에  자리잡고있었는데  원림화  양옥이였다. 이집은 1930년에  건설한것으로써  후에 국민당정계요인들의  집회장소로  되였다. 진제당사택은 남쪽을 향해  자리잡았고  동으로  나져있었고  문어구안에  육각정을   만들어놓았다. 집은 높이가  두층반  가까이  되였고  방을  설치한것이  아주  정밀했으며 방마다  뻬치까를   만들어놓았다. 2충이  옥상에는  베란다가  있었고  베란다앞에는   정자가  있었는데  후에 방을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2층에  있는  복도는  옆층으로   통해있었다. 자료에  기재된대  의하면 진제당  본인은  미신을 믿었는데   사택을  지을   때  그는 전문  풍수를  찾아보았으며  엄하게  풍수의  뜻대로  설계하고  자리를  잡았던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진제당은 또  사택안에 <여조선사>라고  쓴  신위의  대청을 설계한후  그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기도를  드리군  했다. 매화촌가두당위   서기  송기상<宋骑湘> 제공한   진제당사택의  서류에서  기자는 <명인옛집>이라는  글을  보았는데  진제당사택은  1993년  8월에   광주시문물보호단위로 명명되여  지금  광동성부련회에서  사용하고   있었다. <역사연혁과  현황>이라는  글에서  기자는  다음과  같은 글에  주의를  도렸다. <<1949년  7월초,  해방군이  장강을  건는후  장개석은  국민당중앙상무회의를  열고 <국민당비상위원회>를  설립하고  이종인과  함께  대계를  홱책했다.>> 2003년  2월에  출판한  <매화촌가지>(梅花村宅记)에서    기자는  다음과 같은    글을  읽었다. <<1949 년  9월  29  일   장개석은  매화촌에서  국민당중앙상무회의와중앙정치,중앙감독회의를 열고   국민당당원들은  이종인(李宗仁),염석산(阎锡山)을  지지해 <나라를  위해  복무>해야 한다고  했다.  10월1일  오전  이종인은  동산  매화촌에서  장개석을  만났다. 10월14일,  광주가  해방되였다>>                        2 진제당사택의  서류와  <<매화촌가지>>를  대조해보면  가히  알수  있다. 10월1일  장개석은  매화촌에  있었는데  만약  주숙처의  변이의  가능성을 배제하면   장개석은 그날  진짜로  진제당사택에   있었다. 진일보  되는 확인을 위해  기자는 백화주문예출판사에서  출판한<<이왕지사:1949년  진실>> (以往之使:1949年真实)에서  작자는  이렇게  썼다. <<1949년 10월1일, 장개석은  가장  괴로운  하루를  보냈다..........당시  이미  자리를   내놓은   장개석은 광주에  있는  매화촌   진제당사택에    거처를   잡고있었다. 이날  장개석은 울안에서  거닐고있었는데    얼굴에는   웃음기라곤   찾아볼수없었다. 한것은 유성기(刘晟乁)에서   장패개석(将败介石)이라고  욕하는   말을  들은것이다. 그러나  그는  똑똑하게  알고있었는데  목전  한가지  해야  할일은   빨리    대통령직을 다시  회복하고  광주가  아니면  대만에  의거해  공산당과  해방군과  결전을  벌리는것이였다. 그러나  대리대통령  이종인이  자리를  내놓지  않아    장개석을   분이   상투밑까지  솟게했다. 장개석은 유성기옆에  서서  중공의  뉴스를  들었는데  매번  자기의  로부하들이   중화인민공화국   성립대회에  참가한 소식을   듣고는  고래고래  소리치며 욕을  퍼부었다. <배은망덕한  망할놈들,  내가  잘못해준것이   없는데   반역을  하다니.> 그날  오후  장개석은   말을  하지  않았다.                                     3 기자가  매화촌에서  취재할때   많은   주민들은  자기의  집   부근에   이렇게 큰   인물이  거처해  있었은걸  몰랐고  더우기  1949년 10월1일   공화국   탄생된날, 장개석이  여기에  있었다는걸  더구나  몰랐다. 성부련회  한   로간부는  기자한테   이렇게  말했다. <만약  몇달전 에  왔더라면  상세한  내용을   알수 있었을건대요.96살에  나는   노부인이  한분이  살아있었는데   공화국성립때   여기서  살았던  유일한  생존자였어요. 그런데  얼마전  세상을  떴어요.   다른  사람들은 그때 일에  대해  알지못해요.> 역사자료에  기재된대  의하면  1949년 10 월 14 일 ,  해방군  제 4 야전군   주력부대와, 제 2 야전군  진갱병퇀은  공남,오동   양로로   협공해  화남을  공격해  광주를  들이쳤다. 요해한데  의하면  당시  장경국(将经国장개석  아들)은   장개석한테   소련은   정식으로  중공정권을  승인하고  광주로부터  원   중화민국주대사   로씬을 북경으로  데려갔다고  보고했다. 장경국은 장개석을    독촉했다 <<근일  광주의  형세는  아주  복잡합니다.  거리마다에  공산당삐라가  나붙고있습니다. 그러니    빨리  대만으로    건너갑시다>> 10 월 3 일  장씨부자는  대륙에  아쉬움을  품고  광주에서  대만으로  건너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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