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식 기독교를 모방한 김일성 통치방식(재미있는 글이네요)

환국  |   2005-06-30 10:30:32
김일성과 한국식기독교는 완전히 서로 상극입니다.
사상과 이념이 완전히 틀리죠 그렇지만, 이들 두 집단이 유사한 점이 발견됩니다. 서로 대립하면서도 어떻게 그들이 유사한 조직을 구축해 왔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기독교의 모태인 청교도에서 잉태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이념으로 정권을 잡았던 김일성은 얼핏보면 상극이지만, 공산주의 이념은 전략은 종교는 타도대상이고, 전술적으로는 종교를 이용해서 혁명완수를 할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것입니다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김일성주체사상과, 기독교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민족" "민족"을 주창하고 민족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해서 그들의 목적을 달성할려는데 있습니다. 북한은 200만 민족구성원을 굶겨 죽였고, 지금도 2000만 국민을 방패막이로 이용하면서도 끊임없이, 민족이라는 달콤한 사탕발림으로 한국의 감상적 투쟁가들을 현혹시키고 있고 기독교인들은, 민족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면서 중국의 연변의 조선족이나, 이슬람과격국가인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을 이용한 포교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원초적 김일성의 사회주의는 민족과 정반대의 사상이고 기독교는 민족의 뿌리인 단군목을 치고 민족정통성을 부정하는 추태를 보이고 있구요
김일성과 기독교



김일성(1912-1994)과 기독교. 언뜻 둘은 상반되는 느낌을 준다. 오히려 해방 직후 북한 지역에서 나타났던 기독교도와 조선노동당원 사이에서의 충돌, 한국전쟁 시기에 있었던 상호간의 학살, 현재 북한에서 인정되지 않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자유 등이 떠오른다. 따라서 남한 기독교계에서 반김일성, 반북정서는 대다수를 차지한다고 보아도 좋다.
올해부터 떠오른 반북시위의 핵심세력이 보수교단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도인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들에게 김일성은 반기독교의 핵심이며 사탄으로서 박멸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김일성의 가계와 성장과정에는 기독교의 영향이 짙게 배어 있다. 그의 가문 특히 외가는 한국 초대 교회의 중심이기도 하였다. 사실 한 인물의 성장배경과 과정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그 이후 역사과정에서의 그의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또한 그것은 지성사적 측면에서 북한사회의 지도자인 김일성의 사상과 실천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형성·발전되었는가를 살피는 하나의 준거가 된다.
이 글은 [역사비평] 1992년 가을호와 [바로 잡아야 할 우리 역사 37장면] 2권에 수록되었던 글을 줄이고 오늘날의 관점에서 일부 덧붙인 것이다.



외할아버지 강돈욱 장로와 창덕학교

평양시 만경대
칠골동 강반석 동상
김일성의 외할아버지 강돈욱은 중농(中農)으로서 평양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기독교 장로였다. 그가 언제부터 기독교인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김일성의 어머니인 딸의 이름을 예수의 열두제자 가운데 대표격인 베드로를 뜻하는 '반석'으로 지을 만큼 독실한 신자였다. 따라서 김일성은 강반석(康盤石; 1892-1932)의 아들로서 모태신앙(母胎信仰)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의 본명이었던 성주(成柱)라는 이름을 지은 것도 외할아버지였다고 전해진다.
강돈욱은 특히 향리인 대동군 용산면 하리(下里) 칠곡의 창덕학교에 많은 정성을 기울였다. 창덕학교는 1907년 하리 장로교회가 중심이 되어 세운 5년제 학교로, 강돈욱 자신이 설립자의 한 사람이자 교장으로서 학교를 운영하였다. 그는 큰 아들 강진석과 함께 칠골 일대의 3.1 운동을 주도하였고, 이후 강진석은 평양과 만주에서 백산무사단 등 민족해방운동에 헌신하다가 1921년 체포되어 1924년에 15년형을 언도받았는데 1942년 옥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일성도 11살 때였던 1923년 초부터 1925년 초까지 칠골 외가에 머물면서 창덕학교를 다녔다. 당시 김일성은 민족운동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1918년 만주로 건너가 장백현 팔도구(八道構)에서 소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후에 부친의 뜻에 따라 창덕학교에 보내졌던 것이다. 현재 북한에서는 팔도구에서 창덕학교로의 유학을 "배움의 천리길"이라 하여 해마다 기념하고 있다.



아버지 김형직의 민족운동과 기독교

김형직 동상
그의 아버지 김형직(1894-1926)도 조선국민회 활동 등을 통해 기독교계의 민족운동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 지금의 만경대에서 태어난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 이래로 지주집안의 묘지기였다 (김일성,『세기와 더불어』제1권, 조선노동당출판사, 1992, 4쪽). 그는 1911년 숭실학교에 입학했다가 다음해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교를 중퇴하였다. 그러나 그는 재학 중에 경제적으로도 안정된 장로이자 교육자였던 강돈욱의 사위가 되어 이듬해 아들 김일성을 낳았다. 아내 강반석은 그보다 두 살이 위였다.
그리고 김형직은 모교인 순화학교와 강동군의 기독교 계통의 명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생계를 꾸려나갔는데, 1918년에 조선국민회 사건으로 체포되기도 하였다. 조선국민회는 평양 숭실학교 재학생 및 졸업생 중심으로 결성된 비밀결사로, 기독교계통의 애국계몽운동 전통에서 벗어나 무력항쟁 노선으로 전환한 민족운동단체였다.
김일성은 아버지에 대해 회고하길 "사상으로 보면 무신론자였으나 숭실학교 출신이었기 때문에 주위에 기독교인이 많았다"고 하였다. 하지만 김형직은 장로의 딸과 혼인하였고 기독교 계통의 숭실학교를 다녔으며, 기독교계 민족 운동가들과 함께 조선국민회 활동을 했고 기독교인들이 세운 명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무신론자였다는 것은 아무래도 납득하기 어렵고, 또한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가 기독교인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김형직의 친구로서 함께 조선국민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배민수도 김형직이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한편 김일성은 어머니를 따라 어린 시절 교회에 다녔는데, 어머니가 예배당에는 다녔지만 예수를 믿지는 않았다고 하였다. 고된 일에 시달리다가 단지 너무 피곤해서, 쉬러 간다고 어머니가 말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태신앙을 지니고 태어난 강반석이 신앙이 없었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는다. 이처럼 김일성은 애써 부인했지만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그의 부모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음이 분명하다.



김일성의 기독교관

김일성은 자서전에서 성장과정 중에 기독교적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신자들에게서 인간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온 세상 사람들이 평화롭고 화목하게 살기를 바라는 기독교정신과 인간의 자주적인 삶을 주장하는 자신의 사상, 곧 주체사상은 모순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이 어린시절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녔으나 엄숙한 종교의식과 목사의 단조로운 설교가 싫증이 나서 그만두었으며 창덕학교 재학시절에도 교회에 가지 않았다고 하였다. 물론 그 당시만 하더라도 주일학교가 제대로 조직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어른들과 같이 예배보는 것이 어린 김일성에게 지루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 이미 "예수의 복음이 우리 인민이 겪고 있는 비극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비약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김일성은 1927년 4월 자신이 조직한 길림(吉林)의 소년회 학생들 가운데는 기독교인이 많아 이들에게 아무리 하나님이 없고 종교를 믿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고 하였다. 심지어 어떤 소년회원들은 거리를 다니면서도 찬송가를 부르고 다닐 정도였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청소년들이 예배드리러 다니는 것을 경계했던 이유는 결코 종교자체를 타도하려는 데 있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청소년들이 기독교교리를 절대화하게 되면 혁명에 아무 쓸모없는 나약하고 무기력한 존재가 될 수 있기에 이를 미연에 방지하자는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신자라고 해서 혁명을 못한다는 법은 없지만 과학적인 세계관이 부족한 청소년들이 종교가 내포하고 있는 무저항주의적 요소들로부터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찬송가를 부르는 신도들보다 결사전가를 부르는 투사들이 더 필요했다고 회고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민족운동에 참여했던 기독교인들에 대해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나라의 기독교신자들 속에는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훌륭한 애국자가 많았다. 그들은 기도를 드려도 조선을 위한 기도를 드렸고 ‘하느님'에게 하소연을 하여도 망국의 불행을 덜어달라는 하소연을 하였다. 그들의 순결한 신앙심은 항상 애국심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평화롭고 화목하고 자유로운 낙원을 건설하려는 그들의 염원은 시종일관 광복을 위한 애국투쟁에서 자기들의 보금자리를 찾았다.
(김일성, 『세기와 더불어』 제1권, 조선노동당출판사, 1992, 355쪽)


실제로 김일성은 길림에서의 대중활동을 손정도(孫貞道)목사가 시무하던 교회를 중심으로 전개했다. 손정도 목사는 상해임정의 임시의정원 의장을 역임한 민족운동가로서 신채호와 함께 이승만의 위임 통치론을 배격하고 '임정창조파'로 활동하다가 실패한 후 길림으로 돌아온 인물이었다. 그는 친구의 아들이었던 김일성이 구속되었을 당시 옥바라지와 석방운동에 앞장 섰던 은인이었다.
그는 기독교 교리가 지향하는 목표를 인정하면서도, 종교가 갖는 무저항주의적 성격과 외세에 대한 사대주의적 성격을 배격하였다. 반면에 민족의 지향과 함께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해 높은 평가를 내렸다. 그는 해방 이후 기독교인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선의 하늘을 보고 기도하라", "조선의 예수를 믿으라", "종교는 국가와 인민의 이익에 복종되어야 하며 우리민족의 이익을 위한 종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아울러 북한에서는 주체사상이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기독교를 부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윤리도덕적 의미와 민족주의적 입장을 전제로 한 동질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기독교를 통한 남북동질성 회복을 기대하며

김일성은 민족주의적 성향의 청년 기독교인으로서 사회활동을 시작했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북한 정권 내에도 기독교인 출신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그의 6촌 할아버지가 되는 평양신학교 출신의 강양욱 목사는 북한에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의 아들 강영섭 목사 역시 현재 북한 조선기독교연맹의 위원장이다. 주체사상의 내용 가운데에도 기독교의 교리와 교회의 조직원리를 차용하고 있는 부분이 적지 않다고 보인다.
그러나 구체적인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북한의 지배집단과 교회 사이에는 엄청난 갈등이 있었으며 많은 피를 흘려야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의 주장과 달리 공식적으로 북한에서 기독교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러한 갈등들이 김일성의 의지와 관계없이 진행되었던 것인지, 그런 것이 아니라면 어떤 과정을 통하여 교회와 대립적인 자세로 변모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김일성 말대로라면 반민족적인 기독교인들의 의도적 도발에 의하여 할 수 없이 갈등을 빚게 되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한 쪽에서 바라본 진실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궁극적으로 남북한의 동질성 회복과 통일을 전망함에 있어서 중요한 관점을 제기한다. 사실 해방 전 북한지역은 한국 기독교의 핵심기지였다. 오늘날 북한에 살고 있는 주민 가운데 상당수는 그 자신 또는 부모나 조부모 가운데 기독교인이었다. 남북 상호간의 공통적 인식을 추출해 내는데 교회가 중요한 역할을 할 필요가 있고 반드시 그러한 노력이 전개되어야만 한다.
그 과정은 역사적 부채를 오늘날 어느 한 쪽에 일방적으로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오해와 반목 그리고 죽임을 진심으로 함께 반성하고 사과하는 일에서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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