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그대의 자유를 잃어버리지 말라 (펌)

독재자  |   2005-06-28 15:58:26
본질은 실존에 앞서지 않는다. 그 반대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인간은 이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동물이다. 개는 개로 태어나, 개로 살며, 개로 죽는다. 자유는 없다. 장미는 장미인 채로 남는다. 다른 전환의 가능성은 없다. 연꽃이 될 수는 없다. 선택할 수도 없으며 자유도 없다. 이것이 인간과 전혀 다른 점이다. 자유가 있다는 것은 인간의 품격이며, 존재의 특별함이며 독특함이다. 인간은 백지 상태로, 깨끗한 석판으로 태어난다. 아무것도 그 위에 쓰여 있지 않다. 그대가 원하는 모든 것을 그 위에 써야 한다. 그대가 창조해야 한다. 인간은 자유로울 뿐 아니라 자유 그 자체이다. 그것이 인간 본질의 핵심이며, 그게 바로 인간의 영혼이다.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자 왕국이기도 한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자유를 부정하면 인간은 걸인으로 하락하며, 다른 어떤 동물보다도 추한 상황 속에 처한다. 다른 동물들은 적어도 프로그램이 짜여져 있기에 길을 잃을 걱정은 없다. 인간은 길을 잃어버린다. 인간이 자유 그 자체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성장의 가능성이 열린다. 무엇이 되고 안 되고는 모두 그대에게 달려 있다. 모두 그대가 만들어낸다. 인생은 정해진 운명이 펼쳐지는 게 아니라 모험이다. 모험이며, 탐험이고, 발견이다. 진실은 이미 그대에게 주어진 게 아니라 그대가 창조해야 한다. 매 순간은 자신이 만들어간다. 사람들은 자유로워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자유는 위험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디로 가는지 궁극적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한다. 이미 정해져 있는 운명이 아닌 이상 모든 책임은 자기 자신에게 돌아간다. 다른 사람에게 그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다. 맨 마지막에는 자기 홀로 존재 앞에 서서 전적인 책임을 져야만 한다. 무슨 일을 했건, 자기가 누구이건, 그 앞에서 숨거나 도망갈 수는 없다. 그러므로 두렵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결정론자의 태도를 취해왔다. 이상하게도 종교적인 사람들과 종교적이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동의하는 부분이 단 한 가지 있다. 인간에게 자유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부분에서 서로 의견이 다르지만, 이 한 가지 점에서 동의가 이루어진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 자신이 무신론자이고 종교적이지 않다고 말하지만 인간은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상황으로 결정된다고 말한다. 인간은 자유롭지 않으며, 인간의 의식은 외부적인 힘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같은 논리이다! 그들은 외부의 힘을 경제구조라고 부르지만, 헤겔은 그것을 '역사'라고 부른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그것을 '신'이라고 부른다. 신, 역사, 경제, 정치, 사회, 모두 외부의 힘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한 가지 사실, 인간은 자유롭지 않다는 것에 동의한다. 나는 그대에게 말한다. 그대는 절대적으로, 무조건 자유롭다. 책임을 피하지 말라. 도피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빨리 받아들일수록 더 좋다. 왜냐하면 받아들이는 즉시 자신의 운명을 창조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창조하는 순간 큰 기쁨을 느낀다. 원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완성할 때, 엄청난 만족감이 찾아온다. 마치 화가가 그의 작품에 마지막 붓질을 할 때 그의 가슴이 만족으로 가득 차는 것과 같다. 일을 잘 마무리하면 평화가 온다. 온 우주의 일에 참여했던 기분이 든다. 창조적이 되는 것만이 단 하나의 기도이다. 창조성을 통해서만 우리는 온 세상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참여하는 다른 방법은 없다. 신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해야 한다. 관찰자가 아니라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 그럴 때만 존재의 신비를 맛볼 수 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시를 쓰는 것도, 작곡을 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다. 자기 자신과 자기 의식과 자신의 존재를 창조하는 일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두려워할 이유가 있다.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데 오직 자신에게만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자유는 잘못 사용될 수 있다. 자유롭게 그릇된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는 올바른 것이나 그릇된 것이나 모두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오직 올바른 것만 선택해야 한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마치 포드사에서 만들어낸 첫 번째 자동차들 같은 것이다. 그 차들은 모두 검은 색이었다. 포드는 손님들에게 진열된 차들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마음에 드는 차를 선택하세요. 비록 모두 검은 색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무슨 자유인가? 옳은 것이라는 조건으로, 십계명을 따른다는 조건으로, 바가바트 기타나 코란을 따른다는 조건 아래에서, 붓다나 마하비라나 짜라투스트라를 따른다는 조건으로만 가능하다면, 그것은 이미 자유가 아니다! 본질적으로 자유는 옳거나 그른 일을 둘 다 할 수 있다. 사실 그릇된 일은 언제나 더 하기 쉽다는 위험이 숨어 있다. 그릇된 일은 언덕을 내려가는 일이고, 옳은 일은 언덕을 올라가는 일이다. 언덕을 오르는 일은 어렵고,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언덕을 내려가는 일은 쉽다.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으며, 중력이 대신 모든 것을 해준다. 그대는 그저 언덕 위에서 밑바닥을 향하는 바위처럼 굴러가기만 하면 된다.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만약 의식을 향상시키길 원하면, 아름다움과 진리, 지복의 세상으로 올라가고 싶으면, 가장 높은 정상에 오르고자 갈망하면, 그것은 확실히 어렵고도 힘든 일이다. 두 번째로,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떨어질 위험성은 더 많아진다. 올라가는 길은 좁고 온통 어두운 계곡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한 발자국만 잘못 내딛어도 심연으로 굴러 떨어지고, 그대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높이에 연연하지 않은 채 평지를 걷는 것이 더 안전하고 편안하다. 자유는 동물의 세계보다 더 아래로 내려갈 기회와 천사의 세계보다 더 높이 올라갈 기회를 둘 다 제공한다. 자유는 사다리이다. 사다리의 한 쪽 끝은 지옥으로 이르고, 다른 쪽 끝은 천국에 닿아 있다. 사다리는 하나이고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가는 스스로 선택한다. 부자유스러움을 잘못 사용할 수는 없다. 죄수는 그의 상황을 잘못 이용할 수 없다. 그는 얽매어 있으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것이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동물들의 상황이다. 동물들은 자유롭지 않다. 그들은 어떤 종류의 동물로 태어나 그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간다. 사실 자연은 스스로 충족되어 있다. 다른 어떤 일을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의 삶에는 도전이 필요 없다. 도전과 직면하는 동물은 오직 인간뿐이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위험을 무릅쓰고 정상을 발견하기 위해 높이에 도전한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 붓다나 예수 같은 이들이다. 왜 모든 인류가 붓다와 같은 지복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선택을 하지 않는가? 예수와 같은 사랑, 크리슈나와 같은 향연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선택을 하지 않는가? 왜? 이유는 간단하다. 그런 높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위험을 무릅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일에 대해 아예 생각하지 않는 편이 낫다. 인간은 이미 정해진 운명을 타고났기에 자유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쪽이 더 편하다. 태어나기 전에 자신의 운명이 미리 쓰여졌고, 그러므로 그것에 만족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자유만이 그릇되게 사용할 수 있다. 노예 상태는 그릇되게 쓰일 수 없다. 오늘날의 세상이 이토록 혼란스러운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전에는 인간에게 그렇게 많은 자유가 허용되지 않았다. 미국이 가장 혼란스러운 사회인 것은 미국 사람들이 세상의 어떤 곳보다, 역사의 어느 시기보다 더 큰 자유를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가 있는 곳에 혼돈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러한 혼돈은 가치가 있다. 별은 오직 혼돈으로부터 탄생한다. 나는 어떤 수련도 시키지 않는다. 모든 수련은 미묘한 억압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계명도 주지 않는다. 누구에게서 받은 계명이건 외부에서 주어진 것은 사람을 얽어매고, 노예화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자유로울 것과 자기 자신으로 남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하도록 가르친다. 동물보다 못한 상태로 내려간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의 결정이라면, 그것을 완전히 허용하라. 자신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결정했다면 그것이 자신의 권리다. 그러나 만약 자유와 그 가치를 이해한다면, 아래로 내려갈 수 없을 것이다. 동물보다 못한 상태로 내려가지 않고 천사보다 더 높은 경지로 오르기 시작할 것이다. 인간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다리이다. 신과 동물,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두 가지 실체를 이어주는 다리이다. 각성 속에서 자유 속에서 성장하라.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은 모두 자신의 선택이다. 자신을 창조하라. 그리고 그 모든 책임을 져라. 우리는 날개를 가졌지만 아직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날개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리 작아 보이는 날개일지라도 그것은 날개이다. 그것은 온 하늘을 덮을 수 있다. 그 용량은 무한하고, 거대하고, 측정할 수 없다. 날고 있는 새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그의 조그만 날개 아래 모든 하늘이 들어간다. 그 날개로 존재의 궁극의 한계를 향하여 날아가고, 항상 아무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비상하며, 결코 새로운 세계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 - 사실 그는 언제나 미지의 것에게로 이끌린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은 매번 던져 버린다. 왜냐하면 일단 그대가 그것을 알고 나면, 그것을 계속 반복해서 경험한다는 것은 완전한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현명한 사람은 새로운 경험을 원한다. 새로운 전망이 열리기를 원한다. 새로운 비전을 원한다. 바로 그것이 날고 있는 새가 상징하는 것이다. 그것이 신에 대한 모든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은 하늘을 연다. 자유는 유일하게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자유를 얻으면 모든 것은 저절로 따라온다. 자유가 없다면 어떠한 가능성도 없다. 결코, 단 한순간이라도 그대의 자유를 잃어버리지 말라.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자유를 파괴하지 말라. 그것이 나에게는 종교의 의미이다. 진실로 종교적인 사람은 항상 자유롭다. 그리고 그는 자신과 접촉하는 사람들을 자유롭도록 도와 준다. 그는 절대로 아무도 소유하지 않고, 그 자신 역시 절대로 누구의 소유가 되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경계가 필요하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무엇인가에 달라붙기를 원하고, 일단 달라붙게 되면 우리는 자유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집착 속에서 우리는 서서히 죽어간다. 그때 아주 이상한 상황이 발생한다. 우리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증오한다.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사람을 파괴하기를 원한다. 매우 이상한 일이기는 하지만, 알고 보면 그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논리적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그대의 자유를 파괴하기 때문에 그대는 그를 증오한다. 사랑이 그대를 구속하기 때문에 그대는 사랑을 증오한다. 그대는 일종의 포로가 된다. 낯익은 것, 친숙한 것은 그대에게 어떤 편안함을 중으로써 그대를 집착하게 만든다. 그대는 미지의 것, 저 너머의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그대는 계속 자기 모순적인 행동을 한다. 한편으로는 집착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유를 원한다. 그것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허덕거리고 있는 이유이다. 그들은 자유로와지고 싶은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자유는 그들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자유를 떨쳐 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렇게 할 방법도 없다. 그것은 우리가 자유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는 자유이고 또한 자유 속에서만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ν 독재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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