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투자하면 망한다! 평양 순평 완구공장 사장의 실화!

똥국맛짱  |   2005-06-15 06:05:22
사악한 인신매매단 두목 개정일이 있는한 개성공단은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성공을 거둘수 없을것입니다. 냉장고에 와인만 2만병있고 한국에서 젤 비싼 음식인 캐비어를 매일먹는 그놈이 있는한 체코에간 여공들처럼 개정일이 배만 불려줄 것입니다. 월급을 우리나라 사장들이 주는게 아니라 김정일 주는것으로 했고,,그 돈도 이런저런명목으로 거의 다 뺏을텐데 근로의욕이 나겠습니까? 체코에간 여공들이 ▲김일성-김정일 생일 꽃바구니 값 ▲(원하지도 않는) 북한영화 테이프 값 ▲백두산 혁명전적지ㆍ사적지 건설 지원자금 ▲김정일花 온실 비품비 ▲가축 및 남새(채소) 종자값 ▲장군님(김정일) 만수무강 식품비용 등으로 월급 170달러중 160달러 삥뜯기고 10달러만 번답니다..그 10달러도 안먹어서 아낀 돈이랍니다..덕분에 거의 다 영양실조걸려서 생리도 제때 못한답니다. 개성공단이라고 다르겠습니까? 막말로 밑에 폭로한 사장이 당한것처럼 갑자기 파업하면 어쩔겁니까? 또 개정일이한테 이리저리 질질 끌려당할것이 눈앞에 선합니다. 어떤사람들은 김정일이 갑자기 붕괴되면 큰 혼란이 닥치니 그런 상황이 오면 안좋다고 하시는데,,역으로 그 누가 김정일보다 더 사악한 짓을 하겠습니까? 김정일이 있는한 100원투자하면 10원 투자한것보다 못합니다. 오히려 후세에는 이런 사악한 자의 목숨을 연명시켜 줫다고 우리를 욕할것입니다. 개정일이 사라지면 친한적인 정권이 들어서든 우리가 1국2체제로 지배하던 최소한 지금과같은 악몽은 없어질것입니다. 100원 투자하면 1000원 그 이상을 창출해낼것입니다!! 대한민국이 그동안 열심히 일하면서 그렇게 성장했듯이 북한 사람들역시 동기부여만 되면 우리와 똑같이 폭발적 성장을 할것입니다. 왜냐면 우린 똑같은 한민족이니까요!! [격정토론]「평양 순평 완구공장」金燦球 사장의 남북 經協 15년 결산 증언    盧대통령이 청산해야 할 組暴문화는 북한에 있다       『그들은 경제협력 파트너를 뜯어먹을 대상으로만 생각한다』 ●『북한은 세계의 공장 中國 때문에 희망이 없다』 ●『개성공단은 북한이 「여기 들어오는 한국기업이 실패하면 우리가 죽는다」고 목숨을 걸고 매달릴 때만 성공한다. 그런 징후는 없다』 ●『개성공단 진출이 한국의 중소기업을 살리는 게 목적이라면, 북한에 매달리는 정성으로 외국 노동자를 들여와 한국 공단에서 사업을 하는 게 훨씬 낫다』 金 燦 球 1937년 부산 출생. 부산 수산大 어로과 졸업(1961). 제동산업, 화양수산의 원양참치어선 항해사·선장(1962~1973). 한국원양수산 사장(1974). 미국 이민(1976). 파인 통상 사장, 수산물 수출입 및 봉제공장 운영.      金演光 月刊朝鮮 차장(부장직무 대행) (yeonkwang@chosun.com)   「고난의 행군」때도 평양에서 공장 운영            평양 순안비행장에서 자동차로 30분쯤 북쪽으로 달리면 평양 용성구역이다. 「용성지구 담배공장」 정문을 통과하면 아담한 2층짜리 건물이 오른편으로 하나 보인다. 「평양 순평 완구공장」이다.      1층과 2층이 각각 250평 규모다.      북한 노동자 240명이 이곳에서 봉제인형을 만들어 수출했다. 공장이 처음 가동된 것은 1995년 2월. 수백만 명의 북한 주민이 굶어 죽은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때였다.      在美동포 金燦球(김찬구·66)씨는 기계설비를 설치하고, 기술을 가르치고, 원자재를 공급하면서, 飢餓에 직면한 240명의 북한 노동자들과 고난의 행군을 함께 했다. 그는 1989년 1월 북한 땅에 첫발을 디딘 이래 59차례 訪北했다.      한번 방문하면 2주일 정도 머물러, 북한 체류일이 1000일에 육박한다. 벌인 사업은 다양하다. 선박수리소, 골뱅이·가리비 양식장, 농구화 공장, 봉제완구 공장, 농산물 가공공장, 캄차카 어장 진출 사업….      지금 평양 용성구역에는 그의 봉제완구 공장이, 대동강구역에는 농구화 갑피(가죽으로 된 신발의 덮개 부분) 공장이, 東평양 지역에는 농수산물 가공공장이 있다. 대동강구역 통일거리에는 그가 북한 정무원의 허가를 얻어 건설했던 대지 2만5000평의 봉제공장이 기초공사만 마친 채 버려져 있다.      이제 金燦球 사장은 평양 나들이를 하지 않는다. 그의 공장들은 모두 멈춰 서 있다.      지난 6월4일과 5일 꼬박 이틀 동안 그에게서 對北 경협의 뒷얘기를 들었다. 당분간 對北사업을 접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15년간 공들인 사업이 중단된 데 悔恨(회한)이 적지 않은 듯했다.      『처음 왕래할 때는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평양까지 빨리 가야 6일이 걸렸어요. 남들처럼 평양만 들락거렸으면, 1~2년 하다가 그만뒀을 거예요. 1989년 처음 북한을 방문해서 수산업을 하려고 나진에서 원산까지 북한의 동해안 항구를 다 돌아봤어요. 먹지 못해 몸을 휘청거리는 북한 동포들을 수없이 봤어요.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남쪽에서는 음식물 쓰레기가 넘쳐나고, 北에서는 먹을 게 없어서 사람들이 나자빠지는구나. 내 작은 힘이라도 보태자」는 마음이 「비즈니스 마인드」를 앞섰어요. 장사를 하려면 계산을 해야 하는데, 계산을 하면 당장 그날로 사업을 걷어치워야 해요. 북한 측 파트너들이 하도 억지를 부려 평양에 들어갔다가 하룻밤 자고, 기차를 타고 중국 丹東으로 나와 버린 적이 두 번 있어요. 그래도 나랑 일하는 북한 사람들 얼굴이 떠올라서 다시 갔어요』         배처럼 흔들리는 기차      金燦球 사장은 명태를 잡으러 북한에 갔다. 한국과 미국에서 17여 년간 선장으로 일했고, 미국에서 수산업을 하던 그는 「북한이 소련에서 배정받은 명태잡이 쿼터 20만t을 소진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다. 遠洋어선을 갖고 北에 들어가, 캄차카 해역에서 명태만 잡아도 채산성이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1989년 4월 두 번째 訪北 때 그는 북한 동해안의 항구들을 답사했다. 국가보위부 요원 1명, 대성총국 직원 3명이 동행했다. 그가 탄 열차는 배처럼 흔들렸다.      『평양에서 야간 국제열차를 타고 일단 웅기(선봉)로 출발했습니다. 기차가 흔들흔들 가요. 레일이 닳고, 침목이 낡아서 속도를 못 내요. 「사고가 자주 나지는 않는데, 한번 나면 수백 명이 죽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한 항구에서 「천연 가리비가 많이 난다」고 하기에, 잠수부에게 좀 따오라고 부탁을 했어요. 잠수부가 「힘이 없어서 바다에 못 들어가겠다」고 해요. 그때 벌써 북한 주민들이 골병이 들어도 단단히 든 겁니다』      북한과 합의한 첫 번째 사업은 선박수리사업소 건설이었다.      함경북도 북쪽 러시아 해안의 러시아 배들은 酷寒(혹한)을 피해 마카오와 싱가포르에 배를 수리하러 갔다. 이 배들을 나진·선봉 혹은 청진 원산에서 수리해 外貨(외화)를 벌자는 게 북한 쪽의 제안이었다.      金사장은 선박수리사업소를 건설해 준다음, 명태잡이 이야기를 진전시킬 요량으로 선박수리사업소 건설 요청을 수락했다.      선박수리사업소 건설은 2년 가까이 시간을 끌다가 결국 무산됐다.      金사장은 북한이 그때까지 자신이 한 번도 접해 본 적이 없는 까다로운, 예측불허의 사업 상대라는 걸 깨달았다.      『바다에 띄워서 쓰는 「플로팅 도크(Floating Dock)」를 만들기로 합의했습니다. 총 투자금액이 200만 달러 정도로 계산됐어요. 그때 북한이 「도크 제작에 필요한 철판은 우리가 대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래서 저는 4만 달러를 들여 설계를 하고, 도크에 필요한 자동기기 시스템 등을 구입하려고 했어요』      ―약속대로 북한 측이 철근을 댔습니까.      『4개월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었어요. 나는 「플로팅 도크」를 운영할 기관장·전기사·용접사 등 운영 팀까지 짜고 있었어요. 당시 북한과 연락하려면 캐나다 토론토를 거쳐서 텔렉스를 보내 2주일쯤 걸렸습니다. 북한 측에서 들어오라고 해서 갔더니, 「금년에 철근이 배당이 안 됐다. 내년에 기다려 보자」고 해요. 북한은 뭔가 조금 약속을 해서 투자자를 끌어들이고, 발을 못 빼게 묶어 둡니다. 이게 북한의 전술이에요』      ―철근이 확보되지 않아서 어떻게 했습니까.      『미국 플로리다州 마이애미 해변에서 낡은 「플로팅 도크」를 하나 찾아냈습니다. 38만 달러에 사기로 假계약을 했어요. 이걸 끌고 두 달 동안 태평양을 건너가는 데 50만 달러의 보험료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미국 땅에서 만든 선박은 엔진이 있든 없든 공산권에 판매할 수 없다」는 규제가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홍콩에 있는 회사에 판매하고, 이 회사가 북한에 보내는 방식을 취하려고 했죠. 미국 선주가 「최종 수요자가 북한이면 절대 안 된다」고 난색을 표했습니다. 할 수 없이 북측에 「시간이 걸려도 좋으니, 국가에 철판을 요구해라. 북한에서 만들자」고 했어요. 평양을 왔다갔다 하면서 2년을 허비했어요. 그러다 걸프戰이 터졌고, 기름이 없어서 북한의 모든 수산업이 올 스톱됐습니다』         組暴 같은 북한의 經協 행태      金사장은 「선박수리사업소」 사업을 진행하는 한편 북한 측과 가리비·골뱅이 양식사업을 진행했다. 金사장은 『골뱅이잡이를 하다가 완전히 골병이 들었다』고 했다. 북한은 經協사업을 제대로 키워 사업 파트너와 이익을 함께 나누는 「윈윈(Win-win)」보다는, 사업 파트너를 일방적으로 착취하는 조폭적인 행태를 보였다.      북한은 「무엇이든지 해주겠다」는 적극적인 자세로 나오다가, 일단 투자가 이뤄지면 차갑게 돌변했다고 한다.      ―골뱅이·가리비 양식사업에 실패한 이유는 뭡니까.      『가리비 양식에 관한 기초조사를 마치고, 나진에 가리비 양식장을 건설했습니다. LG에서 25만 달러어치 양식 漁具(어구)를 공급했습니다. 漁具를 설치하고 나서 중간중간에 기술자가 커진 種貝(종패)를 분리하고, 양식망 안을 청소해 줘야 합니다. 북한이 기술자의 방문을 한 번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투자 후 가리비 판매를 맡기로 했던 LG나, 기술을 제공한 속초의 양식업자 윤모씨 모두 낭패를 봤습니다. 중간에서 사업을 진전시킨 저는 면목이 없었고요』      ―양식장을 만들었을 때는 종패를 잘 길러서 수년간 이익을 보자는 계산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우리가 양식을 해도 된다. 오지 마라」는 자세예요. 아무리 좋은 방향으로 이해하려고 해도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에요. 조폭같이 행동하는 거예요』         25만 달러어치 양식 漁具 꿀꺽      ―설치해 둔 가리비 양식장은 어떻게 됐습니까.      『북한이 가리비를 길러서 외국에 수출한 흔적은 없어요. 우리가 준 종패하고 장비로 한 해 가리비를 잘 키워 먹었는지는 모르죠. 아마 양식장이 쓰레기장이 됐을 거예요. 북한이 가리비 양식장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관리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내가 할 수 있다」며 나선 거예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사람들이에요』      ―25만 달러 손해 본 것은 보상받았습니까.      『보상은 무슨 보상이에요. 그런 생각이 그 사람들 머릿속에 있지를 않아요. 완제품 인형에서 불량품이 쏟아져 나와도 「클레임」을 받아 주지 않아요』      ―「목적을 위해 어떤 수단도 합리화할 수 있다」는 게 진정한 공산주의자의 교양입니다. 법과 계약을 우습게 여기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닐까요.      『그래서 다 망한 거예요』      ―한때 「북한이 IT(정보통신 산업)에 집중 투자한다. 金正日의 장남인 김정남이 정보통신위원장을 맡았다」는 풍문이 돌았습니다. 게임이나 소프트웨어 산업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 창의력이 중요한 업종입니다. 정보 유통이 안 되고, 인터넷 접속조차 안 되는 북한이 정보통신에 투자한다는 얘기는 난센스입니다. 이것도 무작정 「우리는 우리식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는 북한 특유의 정서를 보여 주는 것 아닐까요.      『한국 사람들이 바람을 불어넣었어요. 「IT에 투자해서 소프트웨어 하나만 개발해도 몇백만 달러는 아무것도 아니다」고 하니까, 북한이 다른 건 제쳐 버리고 IT를 하겠다고 달려들었어요. 한국 기업 하나가 중국 丹東에 소프트웨어 업체를 차려서, 북한 사람들을 불러내서 교육을 하고, 소프트웨어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평양에 공장을 세워 달라」고 했지만, 이 업체가 평양의 생리를 너무 잘 아니까, 나중에 컴퓨터라도 안 뺏기려고 丹東에 공장을 세운 거예요.      1년6개월이 걸려서 오픈하고, 겨우 일을 꾸려 가고 있어요. 북한 기술자를 丹東에 불러내서 사업을 할 지경인데 뭐가 되겠어요. 「평양에 100만 평짜리 IT 단지를 짓겠다」고 북한이 큰소리쳤지만, 진전된 게 없어요. 북한 사람들이 「IT에 집중 투자하겠다」고 큰소리 치는 걸 보면 기가 차요』               중국이 있어서 북한은 희망이 없다      ―북한은 중국 때문에라도 신속하게 외부와 경제협력을 진전시켜야 할 처지군요.      『그렇죠. 앞으로 북한의 경쟁상대는 중국입니다. 중국이 있기 때문에 북한은 活路(활로)가 없어요. 북한 사람들에게 늘 「너희 경쟁상대는 중국이다. 중국만 신경 쓰고, 거기와 경쟁한다고 생각하면 모든 일이 다 해결된다」고 얘기해 줬어요』      ―중국이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는 상황에서, 북한이 조폭식 經協을 하고 있으니 참 걱정입니다.      『북한이 지금 남쪽과 經協하는 게 마치 무슨 施惠(시혜)나 베풀어 주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개성공단도 마찬가지예요. 한국 정부가 나서서 「북한이 세계의 공장 중국과 싸우려면 더 분발하고, 생산성을 높이고, 가격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거꾸로 「제발 經協 좀 해달라」고 매달려서 金正日과 북한 정권의 간만 키워 주고 있어요』      수산업 분야에서 연거푸 쓴잔을 마신 金사장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金日成이 1991년을 「경공업의 해」로 선포한 것이다. 그래서 1992년 1월 설립한 것이 농구화 갑피 공장이다. 20만 달러어치 설비를 설치하고, 농구화의 밑창을 제외한 윗부분을 만들었다. 제품은 일본의 유명 상표인 「아식스」를 만들었고, 한국 국내 판매용으로 시작했다.      金사장은 이 경험을 토대로 1992년 초 북한 경공업 담당 부총리 김복신과 완제품 신발 공장 설립에 합의했다. 북한에서 280만 달러의 신용장을 발부받아 기계를 발주할 무렵, 북한 측이 사업 중단을 통보했다.         ―大宇의 金宇中씨나 現代의 鄭周永씨모두 남북 經協보다는 정치적 욕심이 앞섰던 것 아닐까요.      『개인 욕심이 너무 앞섰죠. 두 사람 다 「내가 남북 經協의 문을 열었다」고 자랑하고 싶었고, 대통령 욕심이 있었잖아요. 제가 처음 북한을 방문했을 때 鄭周永씨와 같은 비행기를 타고 北京으로 나왔습니다. 북한 대사관의 벤츠들이 北京공항에 도착한 고려항공 트랩 아래까지 와서 鄭周永 회장을 실어 갔습니다.      북한의 위대한 지도자 金正日이 숙소까지 찾아오지, 「당신이 최고요」 하며 거국적으로 환영해 주지, 동족이라고 인간적으로 환영해 주지, 홀딱 넘어간 거예요. 鄭周永씨만 그런 건 아닙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鄭周永씨가 한국에서는 그런 대우를 받아보질 못했잖아요. 속된 말로 돈 뿌리는 재미가 나는 거죠. 하지만 만나서 부둥켜안고 울고, 술 마시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목놓아 부르는 게 실질적인 사업에는 오히려 방해가 됩니다』         理論으로는 자본주의가 공산주의 못 이겨      ―동포애나 동정심보다는 냉철한 「비즈니스 마인드」가 우선해야 한다는 겁니까.      『물론이죠. 김달현 부총리, 김복신 부총리를 만나서 「미우니 고우니 해도 미국을 상대로 수출을 해야 먹고 산다. 내가 미국에서 뛰어난 경제학자들을 데려올 테니 김일성 대학 학생들에게 자본주의 교육을 시켜라」고 했어요. 북한에 가겠다는 교포 경제학자들과 약속까지 했지만, 받아들이질 않아요.      북한 관리들을 개인적으로 만나 보면 굉장히 유연한 것처럼 보여요. 그건 우리 착각입니다. 제가 중학교 다닐 때 이웃의 대학생 형님들이 다 공산주의 이론에 미쳐 있었어요. 이론과 아이디어로는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를 이길 수 없어요. 제대로 된 경제협력과 교류가 이뤄지려면 노동당의 핵심들, 자라나는 대학생에게 자본주의 경제교육을 시켜야 하는데 그걸 절대로 안 받아들여요』      ―金사장도 「리베이트」를 줬습니까.      『15년 동안 비행기 운임이 60만 달러 정도 들었고, 경비로 100만 달러쯤 썼습니다. 북한에 들어갈 때 큰 이민가방을 두 개씩 들고 갔어요. 손톱깎이, 돋보기, 양말, 내의…. 북한 사람들은 모든 게 아쉬워요.      내가 가면 항상 푸짐하니까 대환영이죠. 안내원, 정부 사람, 평양 체재기간 안내해 주는 사람들에게 100달러도 주고, 200달러도 주고…. 당시 100달러면 북한 사람 1년 소득이에요. 한 번은 아는 북한 사람이 「진급에 필요한데 3000달러만 달라」고 해요. 기가 막혀서 「3000달러면 미국에서도 두 달 일해야 번다. 너 제 정신이냐」고 했어요.      어떤 在美동포는 북한에서 친척을 만나고, 남은 돈 5000달러를 안내원에게 주고 왔대요. 우리가 그 얘기를 듣고 「당신은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아야 하겠다」고 놀렸어요. 외부와 접촉하는 북한 사람들은 너무 스포일됐어요』      ―북한 지도자인 金日成·金正日 역시 경제협력을 통해 체제 개혁을 하기보다, 리베이트를 챙기는 데 재미를 붙였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리베이트 챙기던 버릇에서 남쪽의 金大中 대통령이 북한 땅에 들어올 때 5억 달러를 받는 사건으로 이어진 게 아닐까요.      『공짜 싫어하는 사람이 있겠어요. 金大中 정부에서 先供後得(선공후득)이라고 했어요. 소금 먹은 놈이 물 켠다고, 주면 나중에 뭔가 얻을 수 있다는 얘기잖아요. 그런데 5억 달러 줬으면 북한 어디서 땅이라도 100만 평 받아야 할 것 아닙니까? 아프리카 독재정권에 그 정도 돈을 줬으면, 결과가 있었을 거예요. 북한은 5억 달러 받고 아무것도 내놓지 않았어요.      지금도 뭔가 더 뜯어 낼 게 없나 궁리하고 있어요. 이번에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평양에 가서 쌀 25만t을 주고, 일본인 납북자 5명을 데려왔습니다. 金大中 대통령이 납북어부라도 몇 명 데리고 왔습니까? 북한은 국군포로, 납북어부들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전부 파악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고 「生死확인이라도 해달라」고 간청하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죠』         南韓은 우리 재산      ―정부는 「金正日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뭐가 있느냐, 대충 가자」는 거죠.      『북한의 버릇을 고치는 일은 한국 정부몫이에요. 「너희가 억지 쓰면 우리는 안 한다」고 문을 닫았어야 합니다. 북한 사람들은 「경제인들은 뜯어먹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해요. 북한 사람들이 「미국 놈들만 철수하면 당장 내려가서 통일한다. 북한 경제와 남한 경제를 합치면 우리도 잘 살 수 있다」고 얘기를 해요』      ―북한 사람들이 「남한은 우리 재산이다」는 식으로 정말 얘기를 합니까.      『그럼요. 군인들은 「전쟁을 해야 한다. 이기면 남한의 공장과 기업이 우리 것이 돼서 잘 살 것이고, 지면 남한 정부가 우리를 먹여 살릴 거다」고 해요』      金燦球 사장은 「평양 순평 완구공장」에 제일 애착이 많았다.      1995년 2월, 북한 진출 6년 만에 북한 당국자들을 설득해서 북한 유일의 봉제완구 공장을 설립했고, 공장을 본 궤도에 올려 4년 가까이 운영했다. 만들어진 완구는 한국의 「모닝 글로리」 등에 납품됐다. 金사장은 이 무렵 엘칸토 제화의 對北 진출 사업을 맡아, 성사시켰다. 엘칸토의 평양공장은 지금도 가동되고 있다.      ―완구공장 설립허가를 얻어 내는 게 쉽지 않았을텐데요.      『金正日의 여동생인 김경희와 줄이 닿았습니다. 당시 김경희가 「지방 경공업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김경희의 신임이 큰 「조선경공업 수출입회사」 부사장이었던 김명선이 우리 회사의 사장을 맡고, 제가 회장 직책을 맡아 운영했어요. 김경희가 저와 김명선 사장에게 「두 사람이 앞으로 북한 아이들의 완구는 책임지라」고 당부했어요』         평양 공장의 생산성이 深玔 공장의 10분의 1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은 직접 선발했습니까.      『노동당 동원국에서 보내 주죠. 인사 노무 관리를 직접 하지 못합니다. 당초 720명까지 늘리기로 하고, 240명으로 출발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집안에 보탬이 되야겠다」는 사람보다는 사상 무장이 철저하게 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작업하는 데 가서 「왜 지시한 대로 안 하느냐. 가르쳐 준 대로 하라」고 하면, 「회장 동지, 우리는 수령님께서 제시한 경제원칙이 있습니다. 왜 美 제국주의 자본주의 물을 넣으려고 합니까. 못 하겠시오」 하고 나가 버려요』      ―그런 직원들은 어떻게 처리합니까.      『어쩔 수가 없어요. 열이 받쳐서 공장 지배인을 부르죠. 「자꾸 자본주의 물이 든다고 반항을 하는데, 이건 살아가는 기초 상식이다. 우리 남한 사람도 그랬다. 손끝에 지문이 없어지도록 일을 해서 1달러를 벌었다」고 교육을 시켰죠』      ―제일 궁금한 게 북한 노동자들의 생산성입니다. 「북한에는 질 좋고, 값싼 노동력이 있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그 물음에 딱 떨어지는 자료가 있습니다. 평양에 설치한 똑같은 설비로 중국 深玔(심천)에 제 후배가 「심천 제2순평 완구 공장」을 운영했어요. 深玔에서는 평양보다 적은 160명이 일했습니다.      공장 가동 6개월 후에 평양 공장에서는 月 생산량이 10만 개가 안 나오는데, 深玔공장에서는 30만 개가 나와요. 중국은 생산량이 늘어나서 비용이 크게 줄어들었고, 북한은 4년간 제자리 걸음이었어요.      深玔 공장에서는 IMF 직전에 노동자 160명이 800만 달러를 수출한 반면, 평양 공장은 노동자 240명의 수출액이 100만 달러 정도였습니다. 경제적으로만 따지면 평양 공장을 深玔으로 옮기는 게 옳았어요』      ―평양 공장의 생산성이 深玔의 8분의 1밖에 안 되는 겁니까.      『10분의 1도 안 되는 거죠. 중국은 더 적은 인력이 일했잖아요. 게다가 제가 미국과 평양을 왔다갔다 하면서 쓰는 경비가 엄청나요. 深玔에서 부산항까지 컨테이너 하나를 실어나르는 운임비가 400달러입니다. 남포에서 인천항까지의 운임비는 1000달러나 해요』      ―생산성이 그렇게 떨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뭡니까.      『임가공료가 공원들에게 안 가기 때문이에요. 처음에는 임가공료를 노동당으로 직접 보냈고, 나중에는 순평 완구공장 계좌로 보냈어요. 어떻게 됐든 당에서 우리 공장 직공들에게 주는 돈은 북한 돈이고, 다른 공장과 똑같은 액수입니다. 深玔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을 기숙사에서 먹이고 재우고, 직접 돈을 주고, 열심히 하면 보너스를 주니까 신바람나게 일하죠. 북한은 신바람 안 나게 만들려고 모든 조치를 다하고…』         밀개떡이 점심      ―임금을 월급이 아니고 임가공료로 지불한 겁니까.      『임가공임만 주기로 계약을 했어요. 「30달러를 기준으로 해달라」, 「100달러 기준으로 해달라」고 하는데 생산성을 확보할 자신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서로 마음 편하게 임가공임으로 하자. 한 달에 20만 개 생산이 목표지만 당신들이 5만 개밖에 못 만들 수도 있다. 손실이 줄어 가는 시점에 임가공임을 조정하겠다」고 했어요. 深玔 공장에서는 인형 한 개당 평균 1달러를 줬는데 평양 공장에서는 10%를 더줬어요. 북한 사람들이 「떼놈들과 동족인 우리를 똑같이 취급하느냐」고 해서 올려 줬어요. 그래도 불만이 많아서 「평양 공장의 생산성이 높아지면, 深玔 공장 설비를 다 뜯어가지고 평양에 들어오겠다」고 설득했죠』      ―생산성을 저하시키는 다른 요인은 없습니까.      『深玔 공장에서 10명이 라운드 테이블에 앉아서 하는 완제품 검사를 평양 공장에서는 20명 이상이 어깨를 맞대고 앉아서 검사를 해요. 한 사람이 인형 눈도 보고, 코도 보고 하면 될 텐데, 눈을 보는 사람은 눈만 봐요. 그러다가 어느 부분에서 검사할 인형이 밀려서 쌓여요. 그런데도 자기가 맡은 것만 검사를 해요. 「왜 그렇게 하느냐」고 하면 「수령님이 교시하신 생산방식이…」 하면서 기분 나빠 해요』      ―그래도 노동자들에게 인센티브를 부여하기 위해 뭔가 하셨을 것 아닙니까.      『생활필수품을 좀 차등이 있게 나눠 줬어요. 1조에는 치약을, 2조는 칫솔, 3조는 비누, 4조는 빨랫비누 식이죠. 비슷비슷하지만 치약이 제일 부족하니까, 「1조가 제일 많이 생산했구나」 짐작을 하죠. 설탕이 부족하다고 하면 사카린과 설탕을 나눠 주고, 한참 굶을 때는 중국에서 밀가루를 사와서 직원들에게 나눠 줬습니다』      ―그렇게 차별적으로 인센티브를 제공하면 북한 당국에서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사장을 불러다가 「너희 공장만 밀가루를 주면 안 된다」고 기합을 줘요. 김명선 사장이 화가 나서 중국에서 사 온 밀가루를 장마당에다 내다 팔았어요』      ―북한의 식량난이 가장 극심할 때 평양에서 공장을 돌렸는데 직공들 먹는 사정은 어땠습니까.      『낮 12시부터 한 시간 동안 점심시간이 있어요. 도시락을 싸 와서 모여 먹는 방이 있어요. 절대로 안 보여 줍니다. 북한 지배인에게 「무얼 싸 오느냐」고 물었더니 「묻지 말라」고 해요. 「감자를 싸 오느냐, 고구마를 싸 오느냐」고 계속 물으니까 「밀개떡을 싸 온다」고 해요. 중국에서 사료용으로 쓰는 옥수수에 밀가루를 좀 섞어서 찐 거라고 해요. 저녁에 야근할 때 국수를 삶아 줬어요』         굶주린 직원들에게 점심 주는 것을 차단      ―점심 식사를 제공해 주지 그랬습니까.      『제공할 수 없어요. 북한 당국이 그걸 법으로 막았어요. 순수한 조선기업과 차별이 생기면 자본주의에 물든다는 거예요』      ―「고난의 행군」 때 수백만 명의 주민이 굶어 죽고 있다는 사실을 북한 고위층이 알고 있었습니까.      『알아요. 자기들도 귀가 있는데 모르겠어요. 얼마나 굶어 죽는지 정확한 수치를 모를 뿐이죠. 지방 黨에서 몸이 아파 병들어 죽었다고 보고하지, 「굶어 죽었다」고 보고하겠어요』      ―4년 만에 완구공장 가동을 중단한 이유는 뭡니까.      『IMF 직후에 임가공료를 개당 2달러로 100% 올려 달라고 해요. 한국 경제가 마비돼서 거래처에 부도가 나고 난리가 났어요. 북한 쪽에 아무리 설명을 해도 「돈 많다고 자랑하던 한국에 왜 돈이 없느냐」고 해요. 내가 深玔 공장의 생산자료를 가지고 설득에 나섰습니다. 「물류비용, 내가 다니는 경비를 포함하면 지금도 深玔 공장보다 임가공임을 70~80% 더 주는 셈이다. 이걸 두 배로 올리면 공장문을 닫아야 한다」고』      ―뭐라고 하던가요.      『어느 날 갑자기 김명선 사장의 목을 자르고 다른 사람이 지배인으로 왔어요. 「김명선 사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더니, 「일을 잘하셔서 영전했습니다」고만 하고, 만나게 해 주질 않는 거예요』      ―전임 김명선 사장은 어떻게 됐습니까.      『목이 달아났어요. 북한 노동당의 눈으로 보면, 김명선 사장은 나하고 4년간 일하면서 「자본주의의 물」이 든 거예요. 黨에서 「남조선 노동자 한 달 월급이 최소 1000달러인데, 임가공임을 그 정도로 받느냐」고 김명선 사장을 계속 압박했어요.      김명선 사장은 내가 深玔 공장 자료를 전부 보여 주고, 바깥 세상 이야기를 해주니까 내 얘기를 수긍했어요. 黨의 임금인상 지시를 차일피일 미루니까, 잘라 버렸어요.      그 무렵 2만5000평짜리 새 완구공장을 지으려고 토목공사를 시작했는데 이걸 빌미로 임가공임 인상 관철을 지시한 거예요. 黨性이 투철한 새 사장은 막무가내예요. 「남한의 인건비가 얼만데 이러느냐. 우리 공장 노동자 임금은 한 달에 30달러가 안 된다」면서, 나를 교육하려고 해요.      내가 「나를 그렇게 못 믿으면 北京의 북한대사관을 통해서 조사해라. 深玔 공장은 평양 공장보다 8배나 더 생산한다. 떼놈이 저렇게 잘 하는데 너희는 자존심도 없느냐」고 했어요』         숨이 콱 막히는 순간들      ―뭐라고 그러던가요.      『「남조선에서 인형 한 개에 4500원에 팔리니까, 한 개당 임가공임으로 3000원은 받아야 한다」고 우겨요』      ―임가공료를 배로 올리면 공장 문을 닫아야 할 상황이라고 설명하는데도, 배로 올려 달라고 계속 고집을 피운 겁니까.      『완전히 무데뽀(막무가내)예요. 북한은 외교만 벼랑 끝이 아니라, 뭐든지 벼랑 끝이에요. 그런 순간 숨이 콱 막히는 거예요. 「내가 미친x이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김복신 부총리, 김달현 총리에게 내가 이렇게 얘기했어요. 「우리가 마산 수출자유지역을 열었을 때 일본에서 시원찮은 기술자가 하나 와도 회사 사장이 공항에 가서 모시고 오고, 기생파티를 해 주고, 갈 때 인삼 한 보따리를 선물해 줬다. 내 돈, 내 기술, 내 자재 가지고 공장하겠다는 사람이 오면 너희들이 내가 묵는 호텔 앞에서 줄줄이 서서 기다려야 하는 것 아니냐」』      ―그렇게 얘기하면 김복신, 김달현 부총리는 이해할 것 아닙니까.      『그 자리에서 비서를 불러서 지시해요. 비서들이 수첩에 메모를 하고, 그 다음날 아침에 호텔로 찾아와요. 오는데 그게 끝이에요. 가라 하니까 왔는데, 뭘 해야 할지를 몰라요』      ―임가공료 협상이 얼마나 오랫동안 진행됐습니까.      『2년간 했어요. 나중에는 창고에 쌓여 있던 제품 10만 개를 보내지 않았어요. IMF 때문에 평양 공장을 정리해야 할 판인데 제가 얼마나 속이 탔겠어요. 평양에 달려갔더니 「임가공임 올려 주려고 왔느냐」며 천하태평이에요. 「인형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받고 서울에 왔는데 또 감감 무소식이에요. 다시 평양에 갔더니 「임가공료를 안 올려 주면 완성품 10만 개를 못 보낸다」고 해요. 그래서 내가 「너희가 팔 데가 있으면 팔아라. 외국에 팔 데가 없으면 평양 애들에게 나눠 줘라」 하고 공장에서 손을 뗐어요』      ―함남 신포의 경수로 건설현장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북한 근로자들이 「임금을 500달러로 올려 달라」며 작업을 거부해서,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근로자들을 데려다가 썼습니다. 북한에 가려는 우리 기업들은 「북한 근로자들이 우리와 말과 생각이 통해서 좋다」고 하지만, 북한 근로자들은 「왜 똑같은 일을 하는 우리에게는 터무니없는 급여를 주느냐」고 반발합니다. 본격적으로 남북 經協이 시작되면, 감정적인 마찰의 소지가 더 클 가능성이 있습니다.      『마산 수출자유지역에서 여공이 100달러 받을 때, 그곳에 와 있던 일본 기술자는 수천 달러를 받았어요. 우리가 그걸 참고 견뎌서 지금까지 왔습니다. 북한은 그게 아니에요. 동족이라는 것만 내세워서, 「남조선 최저임금이 1000달러인데, 우리한테 500달러는 줘야 한다」고 고집을 부려요. 그 노동자를 누가 교육해야 하느냐? 노동당에서 해야 합니다. 金正日과 노동당이 이 정도의 합리성을 갖추지 않는 한 經協은 어려워요』      ―공장 가동을 중단한 시점이 언제 입니까.      『1999년이에요. 「2004년 7월에 마지막으로 평양에 간다」고 최종 통첩을 한 상태입니다. 북한 쪽에 「기계설비를 돌려 달라」고 요구하고 있어요. 계약서에 「부득이한 사정으로 공장을 그만둘 때 기계설비는 돌려 준다」는 조항을 제가 집어 넣었거든요』      ―얼마 정도의 설비가 남아 있습니까.      『순평 완구공장 기계만 30만 달러 정도고, 원자재를 합치면 50만 달러어치 될 거예요』      ―순평 완구공장 노동자 240명은 어떻게 됐습니까.      『실업자가 됐죠』         밥 팔아서 죽 사 먹는 사람들      ―임가공료 올려 달라고 고집을 부리다 240명 밥줄을 끊은 셈이군요.      『도대체 어떤 계산으로 어떤 목적으로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행태가 늘 비슷해요. 북한 정부의 책임자를 만나면, 「공장 재가동을 행정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하는데, 서울로 돌아오면 「꽝」이에요』      ―북한 내부에서 어떤 시스템이 작동하기에 그런 행태가 나오는 겁니까. 합영회사를 시작할 때는 잘 운영해 보겠다는 생각이 분명히 있었을 것 아닙니까.      『「자본주의에 물든다」는 생각이 짙어요. 돈을 벌어야겠다는 욕심은 있지만, 모든 걸 자본주의식으로 해야 한다는 현실은 끝내 수용을 못 해요. 공장을 중단시키고 얼마 후 北京에 볼일이 있어 갔더니, 파견 나온 民經連(민경련)의 직원이 내게 「완구를 좀 팔아 줄 수 없느냐」고 부탁을 해요. 봉투를 하나 가져와서 뜯어 보니 곰인형이 두 마리 들어 있어요. 내가 놔두고 온 원자재와 설비로 만든 거예요. 만들어봐야 자기들이 해외에 판로가 있나요? 하도 한심해서 얘기도 안 했어요』      ―밥 팔아서 죽 사 먹을 사람들이군요.      『내가 그 직원을 호텔로 불러서 「봐라, 이 곰인형이 내 공장에서 만든 거다. 이런데 내가 너희 북한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나. 인형 만들어서 팔지도 못하면서, 기계 다 썩히고…. 내가 그 공장 살리려고 얼마나 애를 쓰고, 돈을 얼마나 썼는지 아느냐? 너희는 월세 받고 땅 내준 것밖에 더 있느냐」고 한탄했어요. 그 직원이 「죄송하게 됐다」는 말밖에 못 해요』      ―공장을 재가동하자는 제안이 들어왔습니까.      『여러 차례예요. 내가 「이제 옛날 조건으로 완구공장을 하자고 해도 나는 못 한다」고 했어요. 「기계설비나 보내라. 국제적인 계약을 지켜라」고 맞서고 있어요. 중국 丹東(단동)에서 북한 쪽 사람들을 만났더니 「아무리 해도 기계는 안 준다. 포기하라」고 해요.      나는 「내 물건 내놔라. 이게 국제법이고 경제원칙이다」고 했어요. 안 돌려 줄 것 뻔히 알면서도, 이게 북한 사람들에 대한 교육이라고 생각해서 이러는 거예요』      ―혹시, 북한이 순평 완구공장을 재가동시키려고, 「평양에 설비가 다 돼 있으니, 원자재만 가지고 들어오라」고 한국 기업들을 유혹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왜 안 그러겠어요. 북한이 한 한국 기업인에게 「시설이 다 돼 있다. 우리는 경험이 많다. 모델하고 원자재만 대주면 된다」고 유혹을 했어요. 그 기업인이 나를 찾아와서 「북한에 진출할까」 물었어요. 다른 업종에 진출하려는 기업들도 저를 수소문해서 찾아와요. 아무리 바빠도 그 사람들을 만나서 조언을 해줬어요. 한 기업인한테 「어려운 단계가 오면 나를 찾아 오라」고 했더니 연락이 없어요. 자신 있게 북한에 들어갔다가 수십억원을 날렸어요』      ―그분은 왜 손해를 봤습니까.      『조심하라는 내 말을 안 믿고, 북한 사람들의 달콤한 말만 믿은 거예요』      ―어떤 업종이었습니까.      『절전용 전구를 만드는 공장이었어요. 북한이 「북한에 전기가 부족하니까 절전형 전구가 인기 있을 거다. 생산해서 내수 판매를 하고 수출하라」고 권했어요. 20억원짜리 기계를 설치했는데, 북한에 자기 돈 주고 전구 살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엘칸토의 성공 사례      金사장은 1997년 3월부터 북한 측과 7개월간 교섭을 벌여, 평양에 엘칸토 「만경대 구두공장」을 설립했다. 엘칸토는 협상의 전권을 金사장에게 위임했다. 엘칸토의 중국 上海 현지 공장으로 북한 기술자 12명을 불러 4주간 기술교육을 하였고, 金사장은 기숙사에서 이들과 함께 생활했다.      1998년 6월에는 여성용 구두를 만드는 생산 설비를 설치하고, 여성용 구두를 생산하고 있다. 엘칸토는 對北 경협의 몇 안 되는 성공사례로 꼽힌다.      ―엘칸토 공장은 잘 운영이 되고 있군요.      『엘칸토 측이 3년간 교섭을 하다가 제대로 되지 않자, 저한테 위임해서 공장 설립에 성공했어요. 한 달에 구두 5만 켤레가 나오는 설비가 들어갔는데, 그게 다 안 나와요. 속도가 안 나는 거죠. 철저한 경제원칙을 따지면 「잘된다, 못된다」 얘기하기가 애매한 상태지만, 북한에 들어간 기업 가운데 현재까지 성공적으로 사업을 이어오는 것은 엘칸토 정도일 겁니다』      ―엘칸토가 그나마 성공한 비결은 뭔가요.      『그때 제 봉제완구 공장이 정상 가동되고 있었어요. 공장을 설립·운영하면서 겪은 어려움을 토대로 제가 조목조목 다 짚어서 꼼꼼하게 계약을 했어요. 시기도 좋았고요. 엘칸토는 완제품이 생산될 때마다 투자한 기계 값의 일부를 상쇄하고 임가공료를 줍니다. 저도 투자한 설비 값을 「1년 거치, 3년 상환」 식으로라도 받아 냈어야 했는데, 그런 반성을 하죠』      ―엘칸토는 임금을 어떻게 지급합니까.      『월급이 아니라 임가공임을 지불합니다. 순평 완구공장과 똑같아요. 엘칸토는 임가공임을 아주 낮은 수준에서 잡았어요. 물건이 잘 나오면 먼저 임가공임을 올려 줬어요. 선수를 친 거죠. 북한 기술자들이 중국에 나와서 교육받을 때 함께 있었던 기술자를 평양에 보내 거부감을 줄였어요. 지금 평양 시내 黨 간부와 가족들 중에 엘칸토 구두를 안 신은 사람이 별로 없어요. 고려항공 스튜디어스들도 엘칸토 구두를 신어요』      ―엘칸토 직원들이 북한에 기술지도를 위해 상주하고 있나요.      『2주일 내지 4주일 정도 북한에 머물면서 교육하고, 신발 생산 기계를 수시로 점검합니다. 부속을 구해 줘도 북한 기술자들이 수리를 못 해요』      ―북한이 조폭적 행태를 드러내서 억지를 부린다면, 엘칸토도 난관에 부딪히지 않을까요.      『제가 엘칸토 회장에게 「투자해서 실패하더라도 원망하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고 교섭을 시작했어요. 요즈음 북한에서 가죽 구두가 없으면 안 될 귀한 물품이 됐어요. 엘칸토가 유일한 고급 가죽 구두 공장이어서 노동당이 구두공장을 별도로 관리하고 있는 눈치입니다. 북한이 언제 어떤 변덕을 부려 돌변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죠』         開城공단은 목표가 불투명            한국 정부가 개성공단을 향해 숨을 헐떡이며 달려가고 있다.      우선, 투자했다가 손실이 발생할 경우 5억원 한도內에서 정부가 보전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1만 평의 시범단지 사업이 끝나면, 100만 평의 부지에 1000여 개의 중소기업을 입주시키겠다는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      金大中 정부 시절 남북화해의 상징이 금강산 관광사업이었다면, 盧武鉉 정부는 남북관계 진전의 상징으로 개성공단을 개발하려는 자세다. 정부는 현대그룹의 운명과 鄭夢憲(정몽헌) 회장의 목숨을 앗아간 금강산 사업의 비극은 잠시 제쳐두고, 개성공단에 관한 장밋빛 전망을 내놓느라 분주하다.      對北 경협사업에서 성공한 기업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金燦球 사장은 『정부가 개성공단 사업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지, 먼저 목표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중소기업을 살리는 게 목적이라면, 외국 근로자들을 들여와 한국內의 공단부지를 이용하는 편이 낫습니다. 북한 주민 지원이 목적이라면, 중소기업을 이렇게 마구 끌어들일 게 아니라 정부 예산으로 인도적인 지원을 하는 게 낫습니다.      북한 당국과 주민들에게 자본주의 교육을 시키는 게 목적이라면, 「손해 나면 보전해 준다」는 非경제논리를 끌어 들여서는 안 됩니다. 이런 식으로 뒤죽박죽으로 사업을 몰아가서 개성공단에서 성공할 중소기업은 거의 없을 겁니다』      ―金사장이 북한 정무원의 결의에 의거해 사업을 했던 것에 비하면, 개성공단 사업을 亞太평화위원회라는 임의단체와 진행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것 아닐까요.      『김복신·김달현 부총리가 약속하고 사인해도, 북한 측 공장 사장이 바뀌면 무효예요. 그런 정도로 약속을 안 지켜요. 북한은 빠져 나갈 구멍을 늘 만들어 둡니다. 개성공단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亞太평화위원회에 책임을 지우면 끝나는 거예요. 亞太가 나자빠지면서 모르겠다고 하면 국가 간 약속이든 국제법이든 소용이 없어요』      ―정부는 北측으로부터 「57달러의 임금을 2년간 유지한다」는 약속을 받아 냈고, 장관급 회담을 통해 안전장치를 마련했다는 입장입니다.      『57달러를 받고 100달러어치 일을 해줄 사람이 와야 의미가 있죠. 57달러로 2년간 묶어 두더라도 생산성이 올라가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생산성이 올라가면 그만큼 임금을 올려 주는 게 당연하죠. 자본주의적 베이스에서 북한 당국과 우리 개별 기업 사이에 협상이 이뤄질 수 있어야 합니다. 정부 간 협의만으로는 부족해요. 임금이 싸다는 사실에 너무 자신감을 가지면 위험합니다.      「5억원까지 손해나도 정부가 보장해 준다」는 건 북한에 잘못된 신호를 주는 거예요. 「개성공단에 투자한 기업들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려야 하겠다」는 생각보다, 「입주 기업이 손해나도 한국 정부가 보전해 준다더라」고 생각하게 될 테니까요』      ―임금을 57달러로 2년간 묶어 두는 건 가능할까요.      『북한이 약속을 지킬 것인가, 누구도 장담을 못 합니다. 남한 근로자들이 임금을 올려 달라면서 데모한다는 걸 북한 사람들이 더 잘알아요. 데모 안 할 이유가 있습니까? 개성공단은 우리 땅이 아닙니다. 노동당 동원국에서 어느 날 직원 50명을 데리고 가면 어떻게 할 겁니까. 노동자들이 1주일만 공장에 안 나오면 답단한 건 입주한 우리 기업들입니다』      ―아무런 통보 없이 공장의 노동자들을 데리고 가는 경우가 있었습니까.      『많죠. 한번은 봄철에 모심기 지원을 해야 한다면서 트럭을 몰고 와서 순평 완구공장 직원 30여 명을 실어 갔어요. 기가 막혀서 「얼마나 가 있는 거냐」고 물었더니, 「모르겠다」고 해요』         자유통행이 안 되는 북한의 자유경제구역들      ―개성공단 진출이 우리 중소기업에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고 생각합니까.      『개성공단에 가겠다는 기업들은 한계 중소기업입니다. 1센트, 2센트라도 중국이나 동남아보다 임금이 싸니까 가겠다는 거예요. 예기치 않은 변수로 공장가동이 일주일이라도 멈추면, 자금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한 방에 갈 수 있는 겁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나진·선봉에 자주 드나들고, 양식업을 했는데 나진·선봉 경제구역은 왜 실패한 겁니까.      『김정우가 외국 기업에 설명회를 하면서 「나진·선봉 프리 존(Free Zone)」이라고 거창하게 사업설명을 했잖아요. 내가 김정우에게 「프리 존은 마음대로 들락날락 할 수 있어야 한다. 한번 북한의 허가를 얻으면 몇 년간은 허가 없이 통행을 해야 프리 존이다. 그렇게 할 자신이 있나」고 물었어요. 김정우가 아니라 金正日이라도 대답을 못 했을 겁니다. 나진·선봉 자유경제특구 만들어 놓고, 철조망으로 삥 둘렀어요. 들어가려면 초청장받아야 하고, 들어갔다가 나올 때까지 안내원이 졸졸 따라 다녔어요. 평양하고 똑같아요. 그런 경제자유구역이 성공할 수 있겠어요』      ―그때 김정우가 北京에서 『나진·선봉에 한국 사람들도 비자 없이 통행시키겠다』고 공언하지 않았습니까.      『「자유경제지역이라면 자유통행이 보장되는 거겠죠」라는 물음에 김정우가 「아, 그렇죠」라고 했어요. 우리 언론이 그걸 「김정우가 자유 통행을 보장했다」고 썼을 뿐이에요』      ―정부 당국자들은 『이번에는 다르다. 북한도 사정이 급해서 개성공단을 깨면 피해는 북한이 입는다』는 얘기를 합니다. 「북한의 개성공단 운영 책임자들이 중국의 경제특구를 방문해서 여러 가지 배우고 있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습니다.      『개성공단을 하겠다고 전면에 나선 북한 사람들은 모두 내가 15년 동안 상대해오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도 안 변했습니다. 우리도 안 변했고요. 그런 상대끼리 만나서 똑같은 일을 하는데 과거와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리라 기대할 수 있을까요』      ―개성공단 사업을 추진하는 중소기업분들을 만나 보니, 『북한 당국자들이 「왜 개성공단을 한다고 하고, 약속을 제대로 안 지키느냐. 우리는 준비가 다 됐다. 빨리 오라」고 재촉한다고 합니다.      『그게 다 쇼예요. 준비가 됐다면 변화된 증거를 보여야죠』         개성공단 서두르면 안 된다      ―북한이 성의껏 하려고 한다, 변화됐다는 징표는 뭐가 될까요.      『중국은 「땅을 공짜로 쓰라」는 도시가 아직 있습니다. 「공장을 세울 때 은행 융자를 해주겠다」, 별의별 제안을 다합니다. 북한이 그걸 해야죠. 「중국의 경제특구에서는 이렇게 하는데 우리는 이것저것을 더해 주겠다」, 「남쪽 기업이 들어왔을 때 5년 후까지, 10년 후까지 단계별로 어떤 지원을 하겠다」는 구체적인 案을 들고 나와야죠. 노동당 차원에서 案을 정하고, 권한을 가진 사람이 당에서 나와서 개성공단에 가겠다는 기업들과 개별적으로 협상을 해야 합니다』      ―그런 충고를 정부나 중소기업들에 했습니까.      『정부에 서둘지 말라고 얘기했어요. 지금 중국에 진출한 한국 중소기업이 2만5000개 정도입니다. 개성공단에 입주하지 않으면, 한국의 중소기업들이 다 죽는 것처럼 조급하게 서둘면, 북한은 더욱 배짱을 부릴 겁니다』      ―개성공단 진출과 맞물려 「북한이 이번에는 진짜 개혁·개방을 마음 먹었다」, 「2002년의 가격현실화 조치로 북한 경제가 시장경제로 진입하고 있다」, 「폐허 속에 새로운 움직임이 엿보인다」는 희망적인 관측이 쏟아집니다. 북한이 변화하고 있는 건가요.      『북한을 제대로 모르고, 우리 주변을 기준으로 妄想(망상)을 하는 거예요. 7·1 경제조치는 서민경제에 혁신을 일으키려고 한 게 아니에요. 「이제 도저히 배급을 못 준다. 너희들 재주껏 먹고 살아라」 그 얘기예요. 묶었던 걸 풀어 준 게 아닙니다. 북한 주민들이 평생 나라만 쳐다보면서 받아먹던 습관에 젖어, 무얼 할 엄두를 못 내요. 외화벌이와 장사를 아는 극소수 주민, 중국을 왔다갔다 하는 화교만 재미를 보고 있어요』      ―평양에서 2만 대의 휴대전화가 사용된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물론 변화의 하나죠. 그렇다고 북한의 중심축이 변화했느냐? 그건 아니에요. 중국 휴대전화를 들고 북한에 들어가면 함흥에서 외국과 전화통화가 가능합니다. 부산에서 서울로 전화하듯이 잘 들려요. 북한의 변화를 강요하는 외부 요인이 늘었어요. 자꾸 물들면 변화가 오겠지만, 북한의 중심축은 전혀 변하지 않았어요』      ―북한이 변했다고 판단할 수 있는 첫 번째 징표는 집단농장의 땅을 1970년대말의 중국처럼 농민들에게 나눠 주는 일이 되겠죠.      『중국처럼 땅을 나눠 주면 빈부격차가 벌어지고 사회 불안이 엄청나게 생길 거예요. 金正日은 그게 자신이 없는 거예요. 용천사고가 났을 때 북한이 「병원선 오는 것도 싫다」, 「구호품이 육로로 오는 것도 싫다」고 했잖아요. 남한 방송들이 구호품을 개성까지 운반해 준 걸 가지고 「구호품이 육로로 전달됐다」고 호들갑을 떨었을 뿐이에요』         金日成이 10년 더 살았더라면…      ―金日成 시대와 金正日 시대에 차이가 있다고 느끼십니까.      『金日成이 金泳三 前 대통령과 頂上회담을 하고, 10년을 더 살았다면 지금보다 북한의 형편이 나아졌을 겁니다. 혁명 1세대인 金日成이 국민을 생각하는 마음에서는 金正日을 앞섰어요. 북한 사람들이 「金日成은 말하는 거나 현지지도를 하는 거나 국민을 많이 생각했다. 그때는 먹을 것이 있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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