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의 잃어버린 20년 (상편)

똥국맛짱  |   2005-06-12 14:00:45
비밀의 매니아칼럼에서 오길희님글입니다. 작성자 : 오길희  조회수 : 1961   2천만명이 아사(餓死)한 「지나」의 「대약진(大躍進)」 ▣1. 100명의 우파를 고발하라 『「우경(右傾)분자」가 공산당과 「지나」의 사회주의를 방약무인하게 공격하고 있다. 「우파」는 지식인 전체의 1%에서 10%정도인데, 이러한 「반당분자」들은 분쇄해야 한다.』 「지나」 소설가 「윤치안」의 어머니는 「사천(四川)성」 「성도시 동성구」의 선전 부장을 하고 있었는데, 1957년 6월에 이러한 「모택동」의 교시가 그의 어머니가 있는 「성도」까지 전해져 왔다. 이 명령을 실행하기 위해서 「모택동」이 든 숫자의 중간인 5%의 지식인을「우파」로 고발해야만 되었다. 이 「할당」된 수치를 채우기 위해서 「윤치안」의 어머니는 자신의 감독아래에 있는 조직에서 100명의 「우파」를 고발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어떤 부하는 「국민당」 장교였던 남편을 내전으로 잃은 초등학교 교사로, 『지금의 「지나」는 옛날보다 궁핍해졌다』라고 발언한 여성을 찾아내어 고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노력해도 10명을 채우기가 힘들었다. 상사는 『「우파 분자」를 찾아내지 못하는 것은 너희들이 우경화된 증거다』라고 위협했다. 「윤치안」의 어머니는 자신이 「우파」의 낙인이 찍혀 남편이나 아이들의 장래를 희생시킬것인가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100명이 넘는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킬것인가, 딜레마에 빠졌다. 그러나 이런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궁지로부터 빠져 나올 기회가 생겼다. 담당 지역에 있는 「사범학교」에서 학생 130명이 장학금 증액을 요구하며 시위를 했고, 상사가 이 학생 전원을 「우파」로 고발하여, 어찌 되었든 할당율은 채우게 되었던 것이다. 학생들은 공장이나 농촌에서 육체 노동을 하거나 강제 노동 수용소에 보내졌다. 그러나 이것은 「대약진」·「문화대혁명」이라고하는 20년이나 계속된 고난의 시작에 불과 했다. 「지나」에서 「잃어버린 20년」이라고 불리는 시기를 더듬어 보자. ▣2. 지식인 55만명 이상이 희생됨 1957년 봄, 「모택동」은 지식인 계급에 대해 자유롭게 「공산당」을 비판할 것을 요구했다. 「백화 제방」정책이다. 그러나 「모택동」은 동시에 이를 「우경분자」를 때려 잡는 「유인전술」이라고 말하는 비밀 발언도 하고 있었다. 56년 가을, 「헝가리」폭동이 일어났고 「지나」에서도 지식인들이 온건·자유주의 노선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고 「모택동」이 선수로 함정을 팠던 것이다. 57년부터 58년에 걸친「우파투쟁」으로 전국에서 55만명이상이「우파」가 되었다고 한다. 「북경대학」에서는 700명이 「우파 분자」란 딱지가 붙여졌고 800명이 퇴학등 처분을 받았다. 이것은 학생·교원 총수의 20%에 해당한다. 무사했던 지식인들도 이 이후 겉으로는 정치적 발언은 하지 않게 된다. 이는 국가 건설과 경제 발전의 양쪽에 긴요하기 쓰일 지성이 빠지는 결과가 되었다. 「원리 주의」때문에 중국의 지식인 엘리트를 그렇게도 많이 없애버리는 어리석음을 저질렀고 그결과 큰 피해를 가져 오게 되었다. 「미국」의 「지나사」 연구의 권위자인 「페어 뱅크」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58년부터 1960년에 「지나」 공산당이 강요한 정책 때문에 약 2천∼3 천만명이 영양 실조와 기아로 목숨을 잃었다. ···· 이것은 인류가 맞닥트리는 재해중에서 최대급 중의 하나였다. 그 책임은 완전하게 「모택동」몫이다. ▣3. 「지나」는 15년 이내에 「영국」을 추월한다 1957년 「소련」공산당 제일 서기 「후루시쵸프」는 「소련」이 15년이내 철강, 석유 등의 생산량에서 「미국」을 추월할 것이다, 라고 선언했다. 당시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있던 「모택동」은 형제국인 「소련」의 뒤를 따라 「지나」는 15년 이내에 「영국」을 추월하겠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세계 각국 공산당 정상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고 「지나」국내에서도 열광적으로 선전하였다. 「모택동」은 1957년에 약 535만 톤인 「지나」의 철강 생산량을 다음 해에는 약 2배인 1070만 톤으로 하라고 명령했다. 여기서 전인민의 제철·제강 운동이 전개되게 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제철 콤비나트를 만들 만큼의 자본도, 시간도 없었다. 초조해진 「모택동」은 산업혁명 이전 고대의 제철법인 「흙용광로」를 전국적으로 설치하도록 명령하며, 철강생산에서도 인해전술을 강요했다. ▣4. 308만 톤의 「쇠 똥」과 같은 철 서두에서 언급한 「윤치안」은 이 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직후였는데 그의 학교 교정에 부뚜막과 「도가니」 형태를 한 커다란 「흙용광로」가 자리잡고 있었다. 선생들은 24시간 휴일도 없이 학생들이 주워 모아 온 고철쓰레기를 그 통에 넣었다. 선생님들이 제철작업에 동원되고 있었으므로, 수업도 없었고 「윤치안」은 선생님 집에서 청소나 애기를 볼 뿐이었다. 어떤 선생님은 양팔에 큰 화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여 문병하러 간 「윤치안」은 거기서 의사나 간호사조차도, 「흙용광로」의 불이 꺼지지 않게 부산하게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아마추어가 장작을 때어 만든 철은 농기구용조차도 되지 않았다. 「윤치안」의 집의 냄비나 솥도, 하물며 침대의 스프링도 모두 동네의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6000만명의 노동력을 투입하여 308만톤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쇠 똥」 같은 철을 만들었던 것이다. ▣5. 전인민이 벌목 운동에 쓸모없게 된 것은 막대한 노동력 만이 아니다. 「흙 용광로」 연료로 대량의 석탄이 사용되었다. 그 때문에 어처구니 없게도 정규의 제철소가 연료 부족에 빠져 조업이 정지되게 되었다. 더우기 석탄을 살 수 없는 농민들은 삼림을 벌채하여 장작을 만들었다. 전 인민 제철·제강 운동은 금새, 전인민 삼림 벌채 운동으로 바뀌었고 이 환경 파괴는 수십년이 지난 후에도 계속되는 악영향을 남긴다. 20여년 후의 1980년에, 인민해방군의 「리정」장군이 고향의 「호서성」에 돌아오자 마을사람들은 빈궁의 수렁에서 헤메고 있음을 호소했다. 『옛날, 뒷산에는 몇사람에 합쳐도 안지 못할정도의 아름들이 수목들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전 인민 제철·제강 운동 이후에는 모두 베어 버렸습니다. 산은 민둥산이 되었고 토지도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한 번이라도 큰 비가 내리면 토사가 전답에 흘러들어, 비옥했던 토지도 황무지가 되어 버립니다. 이것으로 어떻게 농사가 잘 되겠습니까?』라고 또, 흙 용광로를 만들기에는 벽돌이 필요하다. 그 때문에 전한(前漢)시대의 수도인 「장안」을 지키던 동쪽 관문으로 2천년의 역사를 지닌 「호남성」의 「함곡관」 2층의 누각, 「감숙성」 「위무현」의 당나라 시대의 성벽 등 유서깊은 건축물이 흙용광로를 만들기 위해 파괴되었다. ▣6. 보신을 위해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모택동」의 한마디로, 왜 전인민이 이 정도로 어리석은 일에 전력을 기울여 임했는지? 공산당의 간부들은 철강 생산의 노르마를 부과하고 매일 생산량을 보고할 것을 요구하였다. 상급 간부의 관심은 오직 「모택동」이 명령한 「1070만 톤」이라는 숫자뿐이였다. 당장 그 철을 사용할 것도 아니니, 품질도 관계하지 않았다. 이러니 당연하게 아래로 부터의 보고는 뻥튀기 마련이다. 부풀려 보고하는 것에 반대한 양심적인 간부는 통계국장을 포함해 「우파분자」라는 평가를 받아 「노동 개조소」나 감옥에 투옥되고 남는 당간부, 관료도, 전문 기술자들도, 이 운동이 얼마나 인민을 괴롭히고 경제 발전을 저해하고 있을까를 알고는 있어도 일신의 보신을 위해 입을 닫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7. 인민공사에서 기적적인 증산!? 철강 증산과 더불어 「모택동」의 염원인 「인민공사」에 의한 농촌의 공산화가 진행되었다. 『공산주의는 천국이다. 「인민공사」는 천국으로 가는 구름다리이다.』라고 하는 슬로건이 1958년 이후 「지나」 전 국토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2천에서 2만호를 하나의 단위로 「인민공사」를 만들고, 그 안의 사람들은 전답이나 삼림, 가축, 농기구 등 모든 사유재산을 내 놓아 공유화한다. 자택에서의 취사는 금지되며 농민은 농사일이 끝나면 공동 식당에서 식사를 한다. 수확은 모두 나라의 것이 되므로 아무도 농사일에서 성의를 보이지 않고 걱정등을 하지 않는다. 농촌에도 철강 생산의 기준이 있으므로, 농경 작업은 우선 순위에서 뒤로 밀린다. 그리고 먹고 싶으면 먹으므로, 식료품 비축은 쉽게 바닥이 나버렸다. 「인민공사」는 지방의 공산당 관료의 관리 아래 있었고 각 「인민공사」는 「모택동」의 환심을 얻으려고, 식량 증산이라는 뻥튀기 경쟁을 시작하였다. 어떤 「인민공사」가 지금까지 1 묘(畝)에 200근 정도 밖에 밀을 생산하였는데, 2105근이나 증산하였다고 해서 이 소식을 「인민일보」로 흘렸다. 「모택동」이 제창한 밭에 틈도 없이 빽빽이 작물을 심는 「밀식(密植)」에 의해 소출량이 10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자 다른 「인민공사」들도 질 수없이 벼 7000근, 1만근 등이라는 말도 되지 않는 숫자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8월에는 「호북성」「마성현」에서 1 묘당 벼의 소출이 3만 6956근이라고 하는 뉴스가 보도되었고, 이때 「인민일보」는 4명의 아이가 밀식 된 벼 위에 서 있는 사진까지 게재했다. 이것은 모두 완전한 날조된것이었다. 진실은 농민들에게 철야 작업을 시켜 몇 묘의 전답에서 벼나 보리를 1묘로 옮겨 심은 것이다. 그러나 무리하게 밀식 하자 바람이 통과하지 않고 고온 현상으로 곧바로 작물의 생육은 엉망이 되고 농민들은 온 종일 논 밭에 바람을 보내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소출량을 뻥튀기하여 보고를 하니 상납해야할 양도 그에 비례하여 늘어나 농민들은 정작 자신들의 식량은 한층 더 줄여들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농민들은 제철운동에 메이게 되고「인민공사」는 효율이 저하되었고 상납해야 할 양은 늘어나 식량 비축도 바닥이 났고 1960년부터 61년에 걸쳐 중국 전 국토를 맹렬한 기근이 덥치게된다. ▣8. 아이들이 자꾸 굶어 죽고 있다 「윤치안」도 작은 만두를 갉아 먹으면서 학교로 가고 있는 도중에 팬츠 한 장만 입은 삐쩍 마른 소년에게 먹던 만두를 빼앗긴 경험이 있다고 한다. 「윤치안」의 부모는 공산당 간부로 식사에는 곤란하지 않았으며 그의 아버지로부터 「너는 행복한 편이다. 너 또래의 아이들이 자꾸 굶어 죽어 가고 있다.」라고 들었다. 「윤치안」의 집의 가정부 「화양양」의 집은 혁명전에 지주였던 탓으로 식량 배급 리스트의 최하위에 놓여져 있었다. 어느 날 「화양양」의 노모가 방문하여 「윤치안」의 어머니를 보게 되자, 이마를 마루에 붙히며 말했다. 「나으리는 딸의 목숨의 은인이십니다」노모는 「화양양」의 부친과 남동생이 죽었다는 것을 전하러 왔던 것이었다. 「화양양」이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은 온전히 「윤치안」의 집에 있었기 때문이라는것이다. 그러나 1개월 후 그 모친이 돌아가셨다는 통지가 와 「화양양」이 테라스의 기둥에 의지하여 손수건으로 입을 막으며 소리 죽여 울고 있던 그 오열을 잊을 수 없었다고 「윤치안」은 말하고 있다. ▣9. 「팽덕회」의 눈물 고급 간부 중에는, 보신을 위해 이러한 사태를 보고도 못 본 척 하는 사람 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국방부 부장이었던 「팽덕회」는 궁핍한 농민의 출신으로 그 괴로움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팽덕회」가 58년말 기근의 초기 단계에 있던 고향인「호남성」「상담현」을 방문하자 한사람의 노인이 『천제(天帝=「모택동」)에게 농민의 절박한 생활을 전해주게나. 난 어떻게 되어도 좋네』라고 엎드려 호소하였다. 「팽덕회」는 주루룩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당신은 내 고향의 장로인데, 이런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니. 엎드려 사과할 사람은 바로 저입니다.』 「팽덕회」는 「모택동」에게 완곡하게 사태를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다. 「모택동」은 「팽덕회」의 편지를 인쇄하여, 당수뇌부에 회람하게 하고 그 반응을 보았다. 이것도, 「유인 술책」이었다. 「팽덕회」는 당시 「후루시쵸프」와 회담을 하였고, 이번의 「모택동」 비판은 「소련」과 내통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라고 「임표」가 「모택동」의 사주를 받아 규탄했다. 「팽덕회」에 동조한 사람들도「반당 분자」「우파 기회주의자」 등이라는 비판을 받고, 차례차례로 실각되었고, 「팽덕회」는 자택에 연금된후 자살하였다. ▣10. 아사자 2∼ 3천만명 간부들을 숙청한 뒤, 59년에는 모택동은 한층 더 대대적인 반우익화 운동을 전개했다. 농민이나 인민공사의 간부·공무원으로, 조금이라도 정책에 불평불만을 토로하면 여지 없이 적발되었다. 그 총수는 「지나」전역에서 1000만명에 달했다고 등소평은 말하고 있다. 「팽덕회」의 비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계속 철강 증산이나 「인민공사」화를 강행한 결과, 60년, 61년에는 한층 더 심한 기근이 「지나」 전 국토를 뒤덮었다. 전국에서의 아사자는, 2∼3 천만명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55년부터 58년까지의 평균 인구증가율 2.29%를 적용 하면, 61년말의 인구는 7억 632만명이 되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것보다 4,638만명이 적었다. 이 중, 기근에 의한 출생률 저하가 2,128만명이 되고 이것을 참작하면 2,510만명이 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모택동」의 「대약진」정책에 의해 「지나」인민은 근대사상 최대규모의 재앙을 당하게 된것이다.  이러한 사태의 심각함은, 지방으로부터의 뻥튀기된 식량 증산 보고에 취한 수뇌부에게는 실감되지 않았다. 60년에도 270만 톤의 식량을 무리하게 징발하여 수출하고 있었다. 이 양은 3 천만명이 반년간 끼니를 잇는데 충분한 양이었다. 61년초에는 「모택동」도 「대약진」정책을 계속할 수가 없게 됨을 알고 「유소기」나 「등소평」등의 실무파에 정치실권을 양보했다. 철강증산 운동은 중지되고 농민의 수입도 일한것에 따라 분배되게 되었다. 「등소평」이 『「흰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것이 좋은 고양이다』라고 하는 발언을 한 것이 이 때이다. 「쥐를 잡는다」라는 것은 「국민을 먹일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인 것이다. 실무파의 시장주의적 접근에 의해 2년 정도로 중국 경제는 다시 호조를 띄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시 후퇴한 「모택동」은 권력탈환을 노려 역습에 나온다. 「지나」인민들 앞에는 「문화대혁명」이라는 희대의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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