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正日의 인권유린에 계속 침묵할 것인가? (펌)
김생 |
2005-06-06 03:04:36
金正日의 인권유린에 계속 침묵할 것인가?
東獨의 인권유린 사례를 30년간 수집한 善의 교훈
통일의 날까지 東獨의 인권유린 사례 4만2000건을 수집·정리한 잘츠기터 중앙등록처는 독일 연방공화국 기본법 정신과 체계가 東善에 구분 없이 적용된다는 의지의 표상이었다.
徐志源 美 후버연구소 객원연구원
1952년 대구 출생. 서울大 정치학과 졸업. 청와대 공보비서실 행정관. 駐英대사관·駐제네바대표부·駐UN대표부·駐베를린 공보관 역임. 譯書 「도이치 현대사」(全 4권, 비봉출판사 刊).
統獨 후의 起訴와 처벌을 준비
북한 회령에서 있었던 공개처형 동영상이 공개됐다. 이 영상자료는 한 탈북자가 북한에 몰래 들어가 촬영한 것을 일본의 n-TV가 입수하여 지난 3월16일 방영한 것이다.
공개처형에서 처형된 이들에게 씌워진 죄목은 「非法越境(비법월경)」과 「인신매매」였다. 북한 전문 인터넷신문 데일리엔케이(www.dailynk.com)의 박인호 기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非法越境이라는 것은 북한당국에 허가(출국신고)를 받지 않고 중국으로 넘어갔다는 뜻이다. 인신매매는 여성과 아동을 납치해서 유흥업소 같은 곳에 팔아넘긴다는 것이 아니라, 돈을 받고 주민들의 脫北을 도와준 것을 말한다. 「공화국 公民(북한 주민)을 외국에 팔아먹었다」는 논리로 인신매매라는 죄목을 붙인 것이다』
만약 이런 사건이 우리보다 먼저 평화통일을 이룩한 독일연방공화국에서 벌어졌다고 한다면 어떻게 다루어졌을까? 서독 정부는 그 사건에 대해 이렇다 할 논평도 없이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었을까?
아니다. 독일의 연방 법무부 산하 잘츠기터 중앙등록처에서 사건의 전말을 최대한 상세하게 조사하고, 각종 관련 증거물을 수집하여 보도자료를 내는 한편, 사건번호를 매겨 공식적으로 등록 보관했을 것이다.
1961년 8월 東獨은 막무가내로 베를린 장벽(東獨은 당시에 이를 두고 「反파쇼 방호벽」이라 불렀다)을 설치한 후 무자비한 국경 단속에 들어갔다.
이에 대해 독일연방공화국(善)정부는 1961년 11월24일 법무부 산하에 중앙등록처를 설치하고, 사무실을 東獨 접경 지역인 니더작센州의 도시 잘츠기터에 설치했다. 이 잘츠기터 중앙등록처는 東善 분단 이래 東獨이 저질러 온 東獨 탈출기도 주민 살상행위와 납치·구금 등 東獨주민들에 대한 각종 탄압행위의 증거수집과 기록보관을 담당했다.
그 목적은 연방공화국 정부가 관련 범인들을 비록 당장은 체포하여 단죄할 수 없더라도, 범인들이 혹시 서독에 잠입하거나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장차 통일이 되었을 때 기소하여 처벌하기 위한 증거를 미리 확보해 두자는 데 있었다.
잘츠기터 중앙등록처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까지 東獨 탈출을 시도하다가 東獨체제에 의해 살해된 희생자 수를 197명으로 집계했다. 통일 후 그동안 수집해 온 모든 자료들을 연방검찰청에 넘겨주고 중앙등록처가 해체된 1992년까지 밝혀진 희생자 수는 372명이었다. 1997년 최종적으로 확인된 희생자 수는 916명이었다.
장벽 붕괴 이후 밝혀진 희생자 수가 크게 늘어난 것은 중앙등록처의 東獨 현지 조사가 불가능했고, 東善 국경까지 이르지 못하고 東獨 안에서 혹은 北海나 동구권 쪽으로 탈출을 시도하다가 살해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잘츠기터 중앙등록처는 30년간 운영되면서 분단 이래 東獨체제가 저질러온 약 4만2000건의 살인·불법 구금 등 주민 탄압과 非인도적 만행을 파악해 기록으로 남겼다
13세 어린이에 기관총 난사
1966년 3월14일 西베를린의 노이쾰른區 가까운 장벽 부근에서 놀고 있던 열 살짜리와 열세 살짜리 東獨 어린이들이 사살됐다. 아이들이 어쩌다가 장벽에 그렇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두 명의 東獨 국경경비대원들이 아이들의 장벽 접근을 막는답시고 40~50발의 자동소총탄을 갈겨 댔다는 사실이다. 열세 살짜리 어린이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다른 한 아이는 東베를린의 인민경찰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몇 시간 후에 죽었다.
東獨 국경경비대원들에게 내려져 있던 악명 높은 「사살명령(명령 제101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越境(월경)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무조건 막는다. 무단월경을 시도하는 자는 말살시킨다. 단, 1차적으로 『정지! 움직이면 쏜다!』는 口頭경고를 발한다. 口頭경고를 듣고도 움직이려 할 경우에는 공포탄을 쏘아 재차 경고한다. 그래도 달아나려 할 때에는 조준 사격을 가한다. 조준 부위는 하반신으로 한다. 단 善이나 西베를린 지역을 향한 사격은 엄금하며, 여성과 어린이에 대해서는 사격하지 않는다」
어린이들에 대한 사격을 금한다고 했으면 아이들을 살해한 東獨 국경경비대원들은 처벌받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특별휴가 등 보너스와 표창장이 주어졌다.
東獨은 이 사건을 철저하게 은폐했다. 아이들의 시신은 즉각 화장 처리됐고, 그 부모들은 아이들이 엉뚱한 장소에서 예기치 못한 사고로 죽었다는 통보를 받았을 뿐이었다. 통일 이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사건 말고도 어린이는 40명 이상, 여성은 30명 이상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사살명령의 단서조항은 한마디로 대외선전용 허언에 불과했던 것이다.
크리스 귀프로이는 베를린 장벽을 넘어 탈출을 기도하다 사살된 마지막 東獨 주민으로 기록된 사람(1968년생이니까 사망 당시 21세의 청년)이다. 그는 1989년 2월5일 야음을 틈타 친구 가우디안과 함께 장벽을 넘으려다가 東獨 국경경비대원의 집중사격을 받아 가슴에 10발 이상의 총탄을 맞고 죽었다. 같이 도망치던 가우디안은 중상을 입고 체포되어, 같은 해 5월24일 1급 탈출시도 혐의로 3년 형을 선고 받았다. 이들은 세상이 어수선해지니까 사살명령이 흐지부지되었을 것이라고 착각, 탈출을 감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발포 관련자 全員 재판에 회부
善 정부는 같은 해 9월 東獨 형무소에 복역 중이던 가우디안을 위해 보석금을 지급한 후 10월19일 西베를린으로 신병을 넘겨받았다. 이들에게 사격을 가했던 네 명의 東獨 병사들은 사건 당시 전례대로 각각 150마르크의 상금과 함께 부대장 표창을 받았다.
이 병사들은 통일 이후 베를린 지방검찰청에 의해 기소되었다. 그중 두 명은 1992년 1월에 무죄 석방되었다. 탈출자들에게 치명상을 입혔던 하인리히라는 국경경비대원은 당초 3년 반의 징역형이 구형되었지만 결국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1994년 연방고등법원은 그의 집유기간을 2년으로 줄여 주었다.
귀프로이와 다른 두 청년의 살해사건 관련 혐의로 기소되었던 東獨 공산당 간부 S. 로렌츠와 H. 뵈메는 2000년 열린 1심 공판에서 『사건 발생 당시 사살명령을 철폐할 만한 지위에 있었다고 할 확증이 없다』는 논거로 무죄가 선고되었다. 상급심도 2004년 8월7일의 공판에서 이들에게 유죄를 선고하면서도, 사건 발생 후 시일이 오래 경과했다는 이유로 집행유예 15개월을 선고하는 데 그쳤다. 이 공판으로 東善 국경지대 사살관련 사건에 대한 재판이 종결되었다.
이 대목에서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사건 당시 死體부검을 담당했던 東獨 의료진은 귀프로이가 심장을 관통 당해 사망한 것으로 진단했다. 공식기록에는 「심장장애로 인한 사망」으로 기록됐다. 東善 국경을 넘으려다 사살된 다른 東獨人들과 마찬가지로 귀프로이의 경우 訃告(부고)를 내는 것조차 금지됐다.
非인간적 냉혹성이나 철면피한 진실 왜곡 등 그 처리과정이나 내용에 있어서 북한이나 東獨 간에 아무런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 1989년 11월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그 1년 후 東善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면 장벽 너머에서 벌어졌던 이러한 참극들은 그대로 망각 속에 묻혀졌을 것이다.
東獨, 잘츠기터 중앙등록처 폐지 요구
잘츠기터 중앙등록처가 東獨에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음은 不問可知(불문가지)이다. 東獨은 잘츠기터 중앙등록처가 『東獨에 대한 모략과 노골적인 내정간섭을 자행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東獨은 『연방공화국(善)이 진실로 東獨과의 관계 정상화를 원한다면 「冷戰의 잔재」인 잘츠기터 중앙등록처를 즉각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東獨의 E. 호네커 서기장은 東獨의 主權 인정문제 등을 협의한다는 명목으로 서독 사회민주당(SPD)의 슈뢰더(現 총리), 라퐁텐(前 사민당수) 같은 차기 大權주자들을 東獨으로 불러들여, 잘츠기터 중앙등록처의 폐지를 끈질기게 요구했다. 사민당의 잘나가던 진보파 인사들이 호네커에게 어떻게 고해성사를 하고 그들의 정치적 장래에 대해 어떠한 降福(강복)을 받았을지는 그런저런 점에서 쉽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안팎으로부터의 압력을 의연하게 물리치고 잘츠기터 중앙등록처를 통일의 그날까지 끝끝내 지키고 이겨 낸 사람들은 바로 건전한 역사의식과 양식을 가진 善의 中道 내지 右派 세력들이었다. 이 세력들의 굳은 의지와 혼신의 힘을 다한 저항노력이 없었더라면 東獨과 善 左派 세력의 파상공세를 견뎌내지 못하고 잘츠기터 중앙등록처는 일찌감치 문을 닫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굳이 국가보안법 개폐 논란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잘츠기터 중앙등록처 폐지를 둘러싼 밀고 당기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잘츠기터에서 東獨의 人權유린에 대한 자료를 챙기고 기록을 유지하거나 말거나, 東獨은 자유를 찾아 이른바 「反파쇼방호벽」을 넘으려는 주민들을 거침없이 사살했다. 또 딴은 열심히 자료를 챙겼다지만 막상 통일하고 보니 그때까지 챙긴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규모로 非인도적 만행들이 속속 드러나는 바람에 그동안의 작업이 그야말로 隔靴搔痒(격화소양)처럼 된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우리 지도자들은 「동서독式 통일은 안 된다」고 하는 엽기적인 주장을 펴면서 브란트類의 東方정책을 따르기에 바빴다. 덕분에 우리 국민들은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은 동서독 통일의 후유증을 찾아내는데 몰두해 왔다. 그 바람에 독일의 경험에 대한 우리 국민의 관심은 無에 가까워졌다. 東獨 탈출 주민 총격 살상 사건을 두고 통일 후에 벌어졌던 재판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이가 드문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다.
참고가 될까 하여 東獨 주민 총격살상 사건 재판의 전반적 흐름만 간단히 정리해 본다.
통일 후 독일검찰은 東獨 국경경비대원이나 기관요원들이 자기네 실정법과 관행을 준수할 의무를 능가하는 소위 「인간의 도리」라고 하는 上位法을 지켰어야 마땅했었다는 논리로, 「자신들은 상급자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했다.
東獨 주민들로서는 善 사람들이 생소한 法理를 들고 나와 자기들을 혼내려 한다고 여길 수도 있었다. 그런 사태를 피하기 위해 독일 검찰은 사건 발생 당시의 東獨 국내법 위반 혐의를 적용했다. 일단, 소급 법 적용 논란은 피하고 보자는 취지였다. 그래도 재판 과정에서 생겨나는 이런저런 불만과 의혹이 모두 해소되는 것은 아니었다.
역사적 사실들을 그대로 재판상의 증거로 채택하기에 부적합한 경우도 있었고, 東獨 특유의 정책결정 과정과 위계질서 속에서 정확하게 누가 책임을 져야 할 당사자인지 딱히 집어내기도 만만치 않았다.
재판에 회부된 호네커 등 東獨 공산당 간부들이나, 국경경비대원은 자신들의 행위가 東獨의 實定法(실정법)에 반하는 행위가 아니었다고 강변했다.
독일의 법학자인 에카르트 예세는 『그런 주장을 받아 주는 것은 東獨체제의 만행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것과 같다』고 펄펄 뛰었다.
통일독일 연방정부의 콜 총리 등으로서는 舊동독 정권下에서의 인권유린 행위에 대한 재판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그에 대해 「勝者의 正義」라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東方정책이니 뭐니 해서 실컷 퍼주고 치켜세우고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통일이 되자 과거 대화의 상대방들을 법정에 세우는 것도 겸연쩍었을 것이다.
『정치 재판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콜 총리의 발언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왔다. 내무장관 쇼이블레는 『독선보다는 아량을 보이는 게 중요하다』고 거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호네커 같은 자들도 통일독일의 기본법(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인간의 존엄성, 無罪추정원칙, 죄형법정주의, 형벌 不소급의 원칙 등에 따른 「法의 보호」를 주장하고 나섰다.
처벌이 물러진 까닭
당연히 엄벌에 처했어야 할 호네커를 비롯한 東獨 지도부 요인들에 대해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어야 하는 국가의 의무」를 다하다 보니 재판이 제대로 진행될 수 없었다. 「현재의 건강상태로 재판을 받을 수 있는지?」, 「얼마나 더 살 수 있는지?」 따위를 두고 攻防(공방)을 벌이는 것이 전부였다. 그동안 이 자들이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재판도 제대로 받지 않고 天壽(천수)를 다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잘츠기터 중앙등록처를 유지하면서 기를 쓰고 모은 증거자료들이 유명무실하게 된 것처럼 비쳐진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절대 간과해서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안팎 곱사등이가 되면서도 끝내 폐지공세를 버티어 낸 잘츠기터 중앙등록처는 독일연방공화국이 國號나 헌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통일과업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었던 중요한 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잘츠기터 중앙등록처는 그 존재만으로도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 정신과 체계가 東善에 구분 없이 적용된다는 독일연방공화국의 의지의 표상이었다.
1989년 東獨주민들의 대량탈출사태 때 善이 東獨주민들을 동족으로 끌어안을 수 있었던 것도, 이어 東獨 전체를 善의 헌법질서 아래로 흡수통일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정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金正日의 인권유린 사례 수집·정리해야
지금 이 순간에도 金正日 정권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있다. 그가 그런 惡行을 저지르는 것은 東獨체제가 善으로 탈출을 시도하던 주민들을 무수히 학살했지만, 통일 이후 그 책임자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金正日이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지나치게 비약일까?
脫北 도우미가 인신매매 혐의로 공개 총살당하는 마당에 국가보안법 개폐 논의는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되기 힘들다. 자유를 갈구하는 북녘 동포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는커녕 쪽박을 깨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것보다는 지금부터라도 잘츠기터 중앙등록처를 본받아 金正日 정권의 망나니 짓을 역사 앞에 남김 없이 밝히고 억울하게 죽어 간 원혼들을 달래 줄 증거자료들을 더 늦어지기 전에 수집·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