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교의 이주역사

007  |   2005-06-02 07:56:21
화교의 이주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3시기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제 1 시기로 한무제의 서역원정으로 로마제국과의 사이에 실크로드가 열렸으며 주변의 이민족으로부터 조공 외교의 형식이 등장하였다. 즉, 서역의 진출은 대세력을 형성하였던 흉노족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어 아시아대륙 내부의 타민족에게도 대규모의 이동을 가능케 하였다. 이러한 민족의 대이동은 게르만민족의 대이동을 일으켰으며, 이것은 로마제국을 붕괴시키는 한 요인이 되었다. 한편 민족의 이동에 의해 동방에서는 5호16국에 의해 화북지방은 이민족정권의 흥망의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화북의 한족은 양자강 이남까지 이동하였으며, 이것에 의해 한족은 화남지방을 개발하였으며, 일부는 화북에 보건까지 이동하였고, 나가서는 서보르네오의 폰티악의 해외에 집단이주하는 씨족들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던 중 당 왕조의 출현으로 중국을 동아시아 대국에서 아시아 대륙의 지배자, 아시아에 군림하는 세계 제국으로 비약시켰다. 당의 전성기때에는 페르시아, 아라비아등 세계 각지의 상인들이 모여 세계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아라비아 상인들은 육로로는 페르시아, 중앙 아시아의 상인들과 실크로드를 따라 장안, 낙양에 와서 거래하였다. 따라서 당의 수도 장안의 국제도시의 양상을 띠었다. 외국 상인의 출현은 반대로 중국 상인들은 국내 상업, 해상교통, 대외무역의 발전과 함께 해외로 유출되어 근접의 동남아시아나 북아프리카까지 이주하였다. 당시 외국인은 중국인을 당인으로 불렀으며 그들이 밀집한 곳을 당인가(唐人街)로 불렀다. 차이나타운을 지금도 중국어로 당인가로 불려지는 것은 이러한 역사에 유래한 것이다. 한편 당말기에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대량의 피난민들이 해외에 이주하기도 하였다. 황소의 난은 몽고의 망명등과 함께 정권변동에 의해 해외 이민, 망명 이민의 선구가 되었는데,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은 당 전성기에 발전한 해운업을 통해서 가능하케 해주었던 것이다. 제 2 시기로 명왕조때이다. 명왕조 초기는 바다의 왕자라 할만큼 해운업이 발달하였다. 영락제때 시작한 남해 원정은 동남아시아의 일원에서 스리랑카, 인도, 페르시아, 아라비아는 물론 아프리카의 동해안까지 진출하였다. 원정대는 동남아시아 각지에 각지에서 화교 사회의 실태를 조사하여 때로는 분쟁조정이나 도적들의 토벌까지도 해주었다. 원정의 주된 목적은 남해무역에 강남 상인의 관심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발달한 향해술과 해운업 그리고 이윤을 지상으로 하는 강남상인들의 후예들은 선진기술과 선진문명의 영향으로 동남아시아에 진출하였다. 이후 약 100여년 간은 명의 국위와 함께 안정되게 거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명의 중기에서 말기까지는 화교들도 중국의 역사와 함께 고난의 역사가 시작된다. 즉 선진문명을 갖고 있던 화교들이 서양인의 식민지 지배자에 종속되어 어쩔 수 없이 협력을 강요당하게 된다. 이권의 갈등으로 서양인이 화교에 대해 유혈사건이 여러차례 있었으나 쇠퇴일로에 있던 명 왕조는 고향을 떠나 이득을 탐낸 천민이라는 구실로 구원의 손길을 주지 않았다. 또한 청이 건국된 후에도 외교상의 부탐을 덜기 위해한 자세로 일관하게 된다. 제 3시기로 청말기의 대량유출기이다. 아편전쟁이후 북경조약이 오늘날의 대량의 화교로 만든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이시기에 서양은 영국을 시발점으로 대부분의 나라에서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근대적인 임금 노동자 고용방식을 채택한다. 이것은 우수한 노동력을 갖고 부지런한 중국인 노동자가 지속적인 노동력의 보충원으로 주목받기에 이르렀다. 서양은 노예에 대응하는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고 인구가 많은 중국이 대상이 되었다. 또한 중국내에서는 대기근으로 자신들의 생존권을 위해 해외로 이주하게 된다. 19세기 이후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한 중국인의 해외 이주는 꾸리(苦力)무역으로 시작되었다. 신대륙행은 노예 노동력을 대신한 것으로 거의가 노예와 비슷하여 유괴되어 해안 가까운 수용소에 집합된 뒤에 배로 해외에 이동되었다. 그들 중국인은 지배자였던 만주족의 청조풍의 변발형이었기 때문에 머리가 돼지꼬리와 비슷하다 하여 Pig trade로 불렸다. 이것이 꾸리무역이다. 따라서 꾸리(苦力)라고 불릴 만큼 그들의 생활은 힘들었다. 하지만 해외로 돈벌이를 나가는 사람들의 본국 송금은 남아 있는 가족의 유일한 수입원이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경제적․정치적인 이유로 자신이 여비를 지출하는 자유이민자들까지도 등장하게 되어 그 인원수는 엄청나게 증가된다. 화교들 중에서 특히 관심을 가져야할 사람들은 객가(客家)들이다. 객가의 뜻은 토착인이 아닌 타지역에서 온 사람이란 의미가 잠재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원래 객가인은 중국 중원의 세력있는 상층사회에 속하여 중화민족을 대표하는 엘리트이다. 왕조교체기의 전반, 정치적 억압, 자연재해등의 원인으로 고향을 떠나지 않을 수가없어 북에서 남으로 이동하였다. 남하한 그들은 이미 그 지역에 살고 있던 토착인들과 대립, 투쟁을 계속하면서 광동, 강서, 복건의 성(省)경계를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사천, 동으로는 대만, 남으로는 해남도로 남중국의 각지에 정착한다. 송대에 호적을 만들면서 먼저 들어온 주민을 주적(主籍), 그리고 나중에 유입해서 들어온 사람들을 객가인(客家人)으로 불렀다. 객가인들은 이미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주적이 풍부한 토지를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 개간하지 않은 곳이나 비옥하지 않은 곳으로 이동 할 수 없었다. 이들은 남녀가 평등으로 한 집을 지탱하고 이들이 유일한 재산은 교육이었다. 이것은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의 중국을 이끄는 많은 인물들이 여기에 속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또한 문화나 역사, 생활습관이 다른 사회에서 소수자로 살았던 객가인들은 해외이주를 그렇게 어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많은 객가인들이 이주하였며 그들이 현재의 화교의 상류층을 형성하고 있다. 객가인은 화교의 선구자이다. 세계 각지의 화교들이 현재의 경제적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객가인들을 통해서 배웠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 본토에서는 등소평을 위시한 많은 객가출신의 정치가들이 집권안에 있다. 그들은 등소평과 같이 개혁․개방을 추진하는 가장 핵심의 인물들이며 21세기 중국을 이끌어갈 엘리트 그룹이다. 그들의 각 개인적 성향은 부류한 동남아시아의 화교 부호와 정치가들을 통해 예측 가능할 수 있다. 첫째, 남녀빈부를 막론하고 근로를 존중하는 정신을 가졌다. 경제적․사회적 어려움으로 이주한 새로운 지역에서 고통을 이기고 빈곤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더럽고 험한일도 마다하지 않고 근면성실하게 생활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한순간의 큰 이득보다는 티끌모아 태산의 정신으로 부를 축적하였다. 둘째, 화교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인간관계이다. 혈연관계를 갖고 있는 가족관계, 친척관계 그리고 지연관계를 갖은 동향관계, 친구관계이다. 화교기업은 대소를 막론하고 거의 가족  영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휴계자 양성시 가족 중에서 장남에게만 국한하지 않고 능력위주로 계승하기 때문에 그 경영의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어려움을 처했을 때 도와주는 셋째, 다른 상인들과 같이 신용을 가장 중시한다. 그들은 원칙적으로 도박을 하지 않으며 거래는 전부 현금거래를 원칙으로 한다. 혈연, 지연 업종의 조직 안에서 신용을 잃어버리면 생존 기반을 잃어버림을 의미한다. 따라서 신용이야말로 생명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이와 더불어 정치 지향적이다. 또한 하나의 중국사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동남아시아의 지배층에 형성되어 있어 중국본토에 어떤 식으로든 도움과 투자를 할 것이다. 이것은 중국의 개혁․개방적으로 지도부가 선회한 후 경제성장의 안정적인 밑거름이 되어왔다는 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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