룡이 날아올랐다해서 룡정
오성붉은기 |
2005-05-24 12:56:11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 자치주 룡정시가지의 동남쪽이고 륙도하와 해란강의 합수목에서 동북쪽으로 멀지 않은곳에 바로 륙도구로 불리다가 룡정으로 이름이 바뀌게 한 용드레우물이 있다.
김재권선생이 엮은 룡정시관광안내 제1권 <<유서깊은 해란강반>>에서는 <<용드레우물>>이라는 소제목으로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룡정(龍井)이란 지명을 가진데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력사문헌을 연구하고 로인들을 찾아 고증한데 의하면 용드레우물은 1839년부터 1880년사이에 조선이민 장인석과 박인덕이 발견하였다.
이 우물은 일찍 녀진족들이 쓰던 우물이였다. 초기에 륙도구에 자리잡은 한족과 조선이민들이 우물이 깊은데다가 오가는 길손들이 드레박을 빌리는 일이 너무 잦아서 용드레를 해놓았다. 그때로부터 용드레우물이라 부르게 되었고 이 고장 이름도 용드레촌이라 부르게 되어 륙도구촌과 같이 불렀다. 그후 용드레우물에서 룡이 날아 올랐다는 아름다운 전설을 만들었다. 특히 1934년11월, 용드레촌 리기성이 발기하여 우물을 수선하고 약 2메터 높이의 비석 하나를 세우고 비문을 <룡정지명기원지정천>이라고 새겼다. 그리고 우물주위에다 버드나무를 심었는데 그때 심은 버드나무 한그루가 아름드리 고목으로, 력사의 견증자로 오래동안 남아있었으나 전례없던 문화대혁명때 비석은 자취를 감추었고 우물도 메워졌다.
1986년 룡정시인민정부에서는 후대들에게 애국주의교양과 향토애교양을 진행하기 위하여 력사문물인 용드레우물을 수건하고 비석을 복원하였다.>>
우리는 상기 글을 통해 룡정이란 지명은 바로 용드레우물에서 룡이 날아올랐다는 전설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용드레우물이 한자어로 번지여 룡정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해야 한다. 룡이라는 이 명사가 우리말로는 <<용>>이라 불리운다. 그래서 <<룡>>과 통하는것이지만 <<용드레>>라는 이 용어를 <<룡드레>>라고 쓰지는 않는다. 세상에 <<용드레우물>>은 있어도 <<룡드레우물>>은 없다. 지레대원리로 만들어낸 용드레우물은 우물의 일종이고 혹시 고유명사로 <<룡드레우물>>이라는 이름을 지을수도 있기는 하지만 그러면 용드레의 의미를 떠날수도 있다. 이전에 룡정에 있은 룡정지명의 우물은 바로 용드레우물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룡정이라는 이 용드레우물은 룡이 날아올랐다는 전설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용드레우물의 전설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룡정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모두 룡이 하늘로 날아 올랐다는 내용과 관련이 있다. 그 례들을 보면 아래와 같다.
<<정준이와 마을사람들은 우물이 너무 깊어서 용드레 만들어 달아놓았고 칠월 칠석날에 소와 돼지를 잡고 떡을 해놓고 존장의 인도하에 기도를 하고 룡이 날아올랐다 하여 우물이름을 <<룡정>>이라 하고 그옆에다 <<龍井>>이라는 두 글자를 새긴 석각을 세웠다. 그후부터는 이 고장을 용드레촌이라 부르던데로부터 룡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우물에서 룡이 승천하면 후세에 장수가 나고 이 고장에 행운이 트일것이라던 박로인의 유언을 생각하고 리씨로인의 아들은 이튿날로 우물앞에서 돼지 잡고 소 잡고 룡제를 지냈다. 그리고 우물가에 수양버들을 심고 석비를 세워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 아무 시에 리씨가 우물가에서 룡이 승천하는 것을 보았다는 것을 비문에 새겨넣었다>>
<<바로 룡왕의 아들이 처녀를 안고 우물에서 승천하는 것을 한 사람이 보고 그 우물 이름을 룡이 날아오른 우물이라고 <<룡>>이라고 하였는데 후에 이곳에 인가가 많이 모여 마을을 이루게 되자 지명을 룡정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들에서는 우리는 어떤 계시를 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껴야할 것이다. 룡정은 바로 중국조선족문화의 요람이다. 이 요람의 박동이 바로 용드레우물에서 울리기 시작했다면 룡정이라는 이 지명을 놓고 전선들이며 구구히 이야기가 나올 것은 당연한 일인데 그 내용에서 우리는 중국조선족문화는 생기는 그때부터 자체의 특성을 지니고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룡은 중국문화에서 아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중국심볼의 이미지를 가진다. 뱀을 토템으로 하였던 중국대륙 중국부근의 씨족들은 수렵시대에서 농업시대에로 들어서는 과정에 물과의 련계를 념두에 두고 룡이라는 이 상상물을 만들어 내면서 룡을 토템으로 숭배하였다고 볼수 있을 것 같다. 조선반도에서는 룡이라는 이미지가 원래 중국에서처럼 그렇게 뚜렷한 위치에 있은 것이 아니다. 룡을 토템으로 여긴 조선반도의 씨족에 관한 이야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조선반도의 전설들에서는 룡이 꼭 바다와의 이야기에서 등장한다. 그 정도이다. 룡정이라는 이름이 용드레우물에서 룡이 날아올랐다는 이야기로 전해지면서 제를 지내는 등으로 이어진다면 이 자체는 중국문화의 영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승천이요 또는 동해룡왕과의 관계를 가지는 이야기 등을 보면 한반도문화와의 떨어질수 없는 유대를 생각하게 되니 이 량자의 결합이 곧 중국조선족문화를 만들어낸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중국조선족에게 있어서 룡은 토템으로 된 것은 아니지만 거의 그쪽으로 비중을 싣고있은 듯 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승천이거나 제를 지내는 것은 토테미즘적기분으로 볼수 있는것이요, 그러면서도 필경 토템으로까지는 되지 않은 것은 또 룡에 대한 반도적인 사고의 발상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룡정지명유래의 전설들은 모두 이런 맥락에서 보지 않을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중국조선족문화의 이중성격적특성을 다시한번 실감하게 된다. 즉 그것은 형성초기부터 중국문화와 조선반도문화의 유합속에서 성장해온 점이라는 것이다. 룡정이라는 지명과 함께 용드레우물문화는 중국조선족문화를 잉태했고 낳고 키워주는데서 생명수역할을 했는데 이 생명수를 마시면서 우리 문화가 성장해온 발자취는 룡정의 초기교육발전실태에 뚜렷이 찍혀있다.
룡정실험소학교 마당에는 <<서전서숙>>옛터 유적지기념비가 있다. <<서전서숙>>은 연변에서 처음으로 신식교육을 실시한 학교로서 첫기에 22명의 학생을 모집하였다고 한다.
<<리상설은 서전서숙에서 민족독립을 위한 반일애국사상을 고취하는 신식교육을 처음으로 실시함으로써 조선통감부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난 민족교육을 실시하려던 대담한 시도를 룡정에서 실현하였다. 이는 또한 연변땅이 개척되기 시작해서부터 몇십년래 실시해오던 재래식서당교육범주를 훨씬 초월한 현대교육 창시의 리정비이기도 하다. >>(김재권)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물론 항일사상도 있지만 서전서숙이 연변에서 처음으로 꾸려져 <<현대교육 창시의 리정비>>가 되였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우리 문화의 용드레우물이나 다름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07년에 일본의 간도파출소에 의해 억지로 문을 닫아 8개월이라는 운명으로 끝나기는 하지만 서전서숙의 교원들은 일부 학생들을 데리고 훈춘방면으로 옮겨가 2년에 가까운 교원과 학생들이 연변 각지에 우후죽순처럼 일어난 여러 학교의 골간으로 되었다고 한다. 물론 룡정에는 대성중학교라든가 동흥중학교 등 해내외에 널리 알려진 학교들을 포함하여 여러 학교들이 상대적으로 집중되여있어 해방전까지는 중국조선족집거구에서 학교교육이 가장 발전했던곳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룡정을 중국조선족문화의 요람이라 할수 있는 리유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서 민족문화교육이 상대적으로 집중되였으며 가장 빨리 발전했다는 점이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룡정의 당시 민족교육이 우리 발전문화발전의 용드레우물이였다. <<우물>>에서 바로 윤동주거나 심련수와 같은 우리 민족의 <<룡>>들이 하늘로 날아오른 것이 아닐가.
김성호(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