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역사

디젤  |   2005-05-18 01:53:15
분  단 2차 세계대전으로 일본 통치시대가 끝나고 혼란으로 가득했던 1948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 탄생했다. 미국이 지원하는 대한민국이 서울에 수립되자, 이에 맞서기위해 소련의 지원을 받는 항일 지도자인 김일성을 지도자로 조선민주주의 인민국화국이 세워진 것이다. 김일성은 이후 약 50년간 북한의 정치·경제 체제를 형성하고 지배했다. 전  쟁 1950년 6월, 북한이 무력통일을 목적으로 남한을 급습하며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남쪽에 진출한 미국 주도의 유엔군에 맞서 중국군이 북한을 지원했다. 전쟁이 끝난 1953년까지 3백만명 이상의 한국인이 죽었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었다. 약 1백만명의 중국인들이 죽었고, 미국인 희생자도 5만4천명 을 넘어섰다 D M Z 1953년 7월 37일, 무장 전투 행위가 종료됐지만, 북한과 남한은 법적으로 여전히 전쟁중이다. 양측은 북위 38도선을 따라 설치된 DMZ(비무장지대)를 사이에 두고 분단됐으며, 이는 지구상에서 가장 중무장된 경계선이 됐다. 한국전쟁은 미국과 소련간의 대립 또한 심화시켰다. 미국은 북한의 공격을 억제하기 위해 수만명의 병력을 남한에 주둔시켰다. 지금도 비무장지대를 따라 각각 1백만명 이상의 병력이 맞서고 있으며, 언제라도 한국 전쟁을 재개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주 체 사 상 김일성의 북한은 '주체사상'이라는 이름의 정치사상을 창시했으며, 이는 초기 경제성장과 산업적 성공을 가져왔다. 하지만 1970년대에 들어 북한의 경제상황은 높은 군사비와 개혁부족으로 인해 급속하게 침체됐다. 김일성은 북한체제를 소련에 가깝게 재정비했지만, 1980년대 말 소련이 붕괴되며 중국 체제로 다시 돌아갔다. 이 사진은 김일성(오른쪽)이 중국 지도자 마오쩌뚱과 만나고 있는 모습이다. 폭 탄 테 러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은 1987년 115명의 희생자를 낸 대한항공기 폭발사고 및 1983년 4명의 각료를 포함한 남한인사 17명이 희생된 버마 랑군(현 미얀마 양곤) 폭발 사건 등 국제적 테러활동으로 비난을 받고있다. 1970~80년대 북한의 특수부대를 담당했던 김정일은 여러 건의 국제납치 사건에도 연루돼 있다. 이 사진은 항공기 폭탄테러 용의자의 모습이다.   세   습 1994년 7월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이 82세의 일기로 급작스럽게 사망하며, 북한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비통에 빠졌다. 몇 해 동안의 추모기간이 끝나고 1998년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이 북한정권을 이어받았지만, 주석의 자리는 '영원히' 그의 아버지 이름으로 남겨뒀다. 김정일은 '친애하는 지도자'로 숭배를 받고 있지만, 외국에는 이 비밀스러운 지도자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긴  장 1994년 북한은 몇 달간의 고위급 외교를 통해 미국과 ‘기본합의문’을 체결함으로써, 미국과의 군사적인 충돌을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북한은 연료 공급과 2개의 경수로 건설에 대한 국제원조를 조건으로 핵무기 프로그램의 동결과 궁극적 폐기를 약속했다. 이 사진은 미국이 협상에 있어 약속을 위배하고 있다는 북한의 비난이 한창이던 2002년 8월, 첫번째 경수로 기공식의 모습이다. 간  첩 1996년 9월, 북한 간첩 잠수함이 남한의 동해안에서 좌초되는 사건이 발생하며, 남북관계가 더욱 껄끄러워졌다. 이 사건에 대한 대대적 수사과정에서 13명의 남한 병사 및 민간인들, 그리고 24명의 북한 특공대원이 사망했다. 이후 북한은 간첩선 남파에 대해 사과했고, 당시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을 면밀히 감시했다. 이후 몇 년 동안, 남북한 해군은 서로 상대방의 해상권 침입을 비난하며 충돌을 일으켰다. 식 량 난 1990년대 중반 2년 동안 계속된 대홍수와 다음 해의 극심한 가뭄으로 북한의 농업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계속되는 가뭄, 비효율적 농업정책, 경제성장 저하 등으로 1997년에 이르러 북한의 식량부족은 더욱 심각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로 사망한 것으로 보이며, 사람들은 살아 남기 위해 풀이나 나무껍질을 먹고있다고 구호단체들은 전하고 있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식량을 얻기 위해 중국으로 탈출했다. 2002년까지 많은 북한 사람들이 외부의 식량원조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동안, 5세 미만의 어린이 중 45%가 극심한 영양실조상태에 빠졌다. 미 사 일 미사일 시험발사는 북한이 일본의 어느 지역이라도 공격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조만간 미국도 사정거리 내에 들어올 수 있다는 강한 경고 메시지였다. 당시 시험발사 이후 북한은 더 이상의 미사일 시험발사에 대해 자발적으로 일시 정지하겠다고 선언했다. 2003년 CIA의 조지 테닛 국장은 북한이 미국 영토에까지 도달할 수 있는 미사일을 개발한 것으로 보인다고 미 의회에 보고했다. 회  담 2000년 6월 평양에서 열린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북한 지도자 김정일(왼쪽)과 남한의 김대중 대통령이 첫 만남을 가졌다. 이 역사적인 정상회담으로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고 한국전쟁으로 헤어진 이산가족들의 상봉을 마련한다는 내용의 합의문이 발표됐다. 남북정상회담은 남북간의 화해와 조화를 위한 비약적 발전으로 많은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남북정상회담 이후 화해노력을 위한 움직임이 크게 지연됐다. 상  봉 남북정상회담의 가장 큰 성과는 수차례에 걸친 이산가족 상봉이었다. 비무장지대를 사이에 두고 헤어진 수백만 명의 한국인들은 70-80대가 되었고, 이산가족 상봉은 이들에게 정말 감동적인 일이었다. 편지나 전화를 비롯해 서로 직접적인 연락을 전혀 할 수 없었던 수백명의 한국인들이 다시 한번 사랑하는 가족들을 품에 안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다. 앞으로 더 많은 이산가족 상봉이 계획됐다. 납  치 2002년 9월, 북한 지도자 김정일은 일본의 준이치로 고이즈미 총리에게 1970~80년대 북한의 특수부대가 일본 시민들을 납치했다는 놀랄만한 사실을 인정했다. 납치된 일본인들은 간첩들에게 일본문화와 일본어를 가르친다는 목적의 기이한 정보수집운동의 일환으로 이용됐다. 김정일은 13명의 일본인들이 납치됐다고 밝혔으며, 생존해 있는 5명에게 지난 해 일시 일본 방문을 허가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일본에 남아있다 교 착 상 태 미국은 북한이 1994년의 협정을 위배하고 무기에 사용될 우라늄 농축 계획을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2002년 회담에서 인정했다고 말했다. 북한은 이같은 사실을 부인했고, 이후 몇 달 동안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됐다. 북한은 영변 원자로(사진)를 비롯한 핵 시설을 재가동시키는 등 여러 행동을 취하며, 미국과의 단독회담을 요구했다. 이러한 북한의 행동에 미국은 이 지역 주둔 병력을 증강했지만, 북한을 공격할 계획은 전혀 없다고 밝혔다. 또한 미국은 회담에 협박 당하지 않을 것이며, 북핵문제는 다자간회담을 통해 해결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출처 : CNN한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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