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관파천

디젤  |   2005-05-17 02:35:23
노관(露館)파천이라고도 한다. 을미사변 이후 일본세력의 배경으로 조직된 제3차 김홍집(金弘集)내각은 일세일원연호(一世一元年號) ·태양력 사용, 군제개혁, 단발령의 실시 등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명성황후의 살해와 단발령의 실시는 친일내각과 그 배후세력인 일본에 대한 국민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자극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났다. 이범진(李範晉) ·이완용(李完用) 등의 친러파 세력은 친위대(親衛隊)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으로 분산될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세력만회와 신변에 불안을 느끼고 있던 고종의 희망에 따라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협의, 파천계획을 진행하였다. 이들은 미리 인천에 와 있던 러시아 수병(水兵) 150명과 포(砲) 1문을 서울로 이동하고 2월 11일 새벽 국왕과 왕세자를 극비밀리에 정동(貞洞)에 있던 러시아 공관으로 옮겼다.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즉시 김홍집 ·유길준(兪吉濬) ·정병하(鄭秉夏) ·조희연(趙羲淵) ·장박(張博) 등의 5대신을 역적으로 규정하여 포살(捕殺) 명령을 내려 김홍집 ·정병하 ·어윤중(魚允中)은 군중에게 타살되고 유길준 ·조희연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로써 친일내각은 몰락하고 박정양(朴定陽:首相 ·內相) ·이완용(外相 ·學相 ·農相) ·이윤용(李允用:軍相) ·윤용선(尹容善:度支相) ·이범진(法相 ·警務使) 등의 친러파 정부가 구성되었는데, 중심인물은 이범진이었다. 신정부는 의병항쟁을 불문에 부치고, 죄수들을 석방하는 등 민심수습에 힘쓰고, 일본세력으로 개혁하였던 제도를 구제(舊制)로 환원하였다. 일시에 지지기반을 상실한 일본측은 독립국가의 체면을 내세워 국왕의 조속한 환궁을 요청하였으나 고종은 ‘불안 ·공포의 궁전보다는 노국공관의 일실(一室)이 안정하니 당분간 환궁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선왕조의 보호국을 자처하게 된 러시아는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을 비롯하여 경원(慶源) ·종성(鐘城)의 채광권, 경원전신선(京元電信線)을 시베리아 전선에 연결하는 권리, 인천 월미도 저탄소(眝炭所) 설치권 등 경제적 이권을 차지했다. 이에 구미열강(歐美列强)도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여 경인(京仁) 및 경의선(京義線) 철도부설권 등 중요이권이 값싼 조건으로 외국에 넘어갔다. 아관파천 1년 간은 내정에 있어서도 러시아의 강한 영향력 밑에 놓이게 되어 정부 각부에 러시아인 고문과 사관(士官)이 초빙되고, 러시아 무기가 구입되어 중앙 군제도 러시아식으로 개편되었으며 재정도 러시아인 재정고문에 의해 농단되었다. 1897년 2월 25일, 고종은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라는 내외의 압력에 따라 러시아 공관을 떠나 경운궁(慶運宮:덕수궁)으로 환궁하고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고 왕을 황제라 칭하여 중외에 독립제국임을 선포하였다.  (네이버에서...) 우리나라 왕들이**얼마나 무능한지** 보여주는 예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정세도 비슷할껄요~ (친중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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